현상학 역사의 동상이몽

by 현재

현상학의 역사를 압축하여 표현하자면, '동상이몽'이라고 할 수 있겠다.

후설은 지향성 개념을 처음에는 외향적으로(『이념들 I』 시기), 후에는 내향적(관념론적)으로(『데카르트적 성찰』 시기), 더 지나서는 다시 외향적으로 - 그러나, 동시에 내 바깥에서 나를 향하는 쌍방향적으로 변형한다(『위기』 시기). 이 모든 전유가 계획적이었다는 주장도 일부 있으나, 『성찰』 시기에 그의 조교였던, 그리고 '지향성의 외향적 속성'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집필했던 '에디트 슈타인'이 "지향성은 내향적인가?"라는 논제 후설과 몇 시간을 다퉜다는 사실은 꼭 후설이 계획적으로'만' 글을 쓰지는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 일을 계기로 에디트 슈타인은 후설의 곁을 떠나 수녀가 된다.

슈타인은 후설의 속기법을 읽어낼 수 있던 유능한 조교였는데, 그녀가 떠난 후 후설 현상학파는 난처한 상황에 빠진다. 그런데 이 빈자리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게 된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그 대체자였다.

후설의 둘째 아들은 1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했다. 후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제 할 일을 꼭 해내던 사람이었지만 아들의 죽음 이후에는 그렇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후설의 죽은 아들과 나이대가 비슷했고, 아주 영리하고 충실한 제자로서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후설의 사제관계에서는 이례적으로 그는 새로운 애제자에게 사적인 호감을 표시하곤 했다. 그 애정은 후설이 나이가 든 시점의 한 생일에 극에 달하는데, 그의 아내는 하이데거를 두고 '현상학의 아들'이라 칭했다. 후설이 곧 현상학의 아버지였기에 하이데거는 후설에게 아들 같은 존재가 되었다. 하이데거는 이 장단에 어울려 후설을 종종 '아버지'라고 표현한다.

후설 현상학에서 대상의 실재성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 분명한 '~에 대한 ~'이라는 지향성이 실재했기 때문이다. 대상이 실재하지 않더라도 의식의 지향성이 가닿는 무언가는 있다. 의식의 구조가 있고, 이 의식의 구조는 주체와 타자에게 모두 있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이데거라는 유능한 조교이자 후임, 혹은 새로운 아들도 생겼겠다. 현상학의 논의는 끝날 것만 같았다.

어느 날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의 표지를 직접 뽑아갔고, 이내 한껏 기대감을 품고 이 저술을 후설에게 헌사한다. 그러나 그 속에는 '존재'라는 근본 문제를 망각한 모든 철학에 대한 비판이 득실거렸다. 하이데거에게 이 문제를 다루게 한 것은 후설의 스승, 브렌타노의 박사학위논문이었다. 후설은 브렌타노의 지향성 개념을 중요하게 읽었지만, 하이데거는 같은 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다룬 '존재 범주'를 더 중요하게 읽었다. 후설은 놓치고, 하이데거는 잡아냈던 것이다. 하이데거에게는 비난의 의도가 없었지만, 후설은 '존재를 망각한' 철학자가 되어 있었다. 후설은 하이데거를 파문하듯 비판했다. 현상학을 제 나름대로 받아들인(심지어는 '현상학'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했던) 엘리아데나 야스퍼스에게 격려와 지지의 서신을 남겼던 것과는 대조적인 반응이었다. 후설은 하이데거가 배신했다고 느낀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이데거도 후설에게 앙심을 품게 된다. 훗날 후설의 저작들이 금서가 되고, 그의 저작 활동 일체가 제약을 받으며 정리되지 못한 원고들이 독일을 떠나게 된다. 끊임없이 보완되던 후설의 현상학은 약 반세기 가량 세상에 제대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 독일에는 후설과 하이데거가 만나지 못했던 방문학자 한 명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사르트르이다. 레몽 아롱과 레비나스를 통해 현상학을 뒤늦게 접한 사르트르는 후설과 하이데거가 함께 현상학을 진전시키던 일련의 과정을 목격하지 못했다. 사르트르는 이 미완의 사조를 빠르게 흡수하여, 자신의 색깔을 잔뜩 입힌 채 돌아간다. 『자아의 초월성』, 『상상력』, 『상상계』, 『존재와 무』 등이 쓰이며 현상학은 실존주의의 한 흐름으로 인식되었다. 후설은 이 과정을 모두 지켜보진 못했지만, 이를 목도한 하이데거는 (후설이 알았더라면 그 역시 그랬을 텐데)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 이 새로운 사조를 불만족스럽게 여긴다. 사르트르의 장례식은 500만 명 정도가 지켜보았다고 한다. 역사상 어느 지식인도 죽는 날까지 이런 파급력을 유지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의 명성 덕분에 현상학은 곧 사르트르의 학문이 되었다. 이 프레임 탓에 실존주의가 몰락할 때 현상학도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21세기를 들어서면서는 심지어 본 고장인 독일에서조차 20년가량 현상학을 연구하는 교수가 채용되지 않는 일까지 이어진다.

하이데거는 나치 행적과 스승을 정치적으로 핍박한 일, 그리고 잦은 불륜 행각으로 비난을 받곤 한다. 그런데 아내도 만만치 않았다. 하이데거의 장남은 훗날 어머니께 들었던 놀라운 사실을 밝혔다. 자신의 친부는 마르틴 하이데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 내외는 서로의 불륜을 알면서도 형식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가족력(?)이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사이의 관계와 겹쳐지며 "실존주의는 참 끔찍하다"라는 통념에 힘을 싣기 시작한다. 망나니, 방종, 히피, 이단아의 사상적 지주는 실존주의이다. 그리고 실존주의는 현상학과 가깝다. 심지어 현상학의 창시자가 기른 (동시에, 사르트르에 따르면 그 역시도 실존주의자인) 후계자 하이데거도 사르트르와 다름이 없어 보였다. 그 사이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라는 범주에 묶어버린 또 다른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기차에서 한 여성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 "선생님, 실존주의는 참 끔찍해요!" 경건한 가톨릭 신자로서 실존의 문제를 다루던 마르셀은 사르트르를 적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황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은 것이다.

현상학의 '판단중지'는 일체의 모든 사회적 관념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는 정치적 이념으로부터도 마찬가지이다. 메를로-퐁티는 이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사르트르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메를로-퐁티도 시대의 흐름에 의해 공산주의 이념을 지지했지만 이내 정치적 갈등으로 사르트르와 갈라졌다. 메를로-퐁티는 정치적 견해들을 철회하고 다시 현상학적 태도에 몰두한다. 하지만 메를로-퐁티가 머지않아 단명하는 바람에 균열은 메워지지 못했다. 더군다나 현상학의 주제에서 아주 친밀한 이해를 공유하고 있던 폴 리쾨르와의 만남이 성사되지 못했다. 그 (실패한) 만남의 시도는 메를로-퐁티와 사르트르 사이의 동행이 유지되던 사이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마르셀의 제자와 자신의 친구가 교류하지 않길 원했던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생전에 후설 아카이브를 설립한 반 브레다 신부와 많은 서신을 주고받았고, 프랑스 내부에서 후설의 유고까지 탐독하기에 이른 몇 안 되는 '후설 현상학의 후예'였다. 리쾨르가 생전에 메를로-퐁티를 만나지 못했던 탓에 리쾨르는 메를로-퐁티의 후설 독해를 모두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메를로-퐁티와 유사한 주제를 다루던 리쾨르였기에, 훗날 리쾨르는 프랑스에서 메를로-퐁티를 주제로 연구한 제자를 가장 많이 길러낸 학자가 되었다. 세상을 떠난 메를로-퐁티를 배우려거든 리쾨르를 찾아가야 했다. 그런데 리쾨르는 후설의 유고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 탓에 프랑스에서 후설 유고의 중요성은 점차 퇴색되어 간다.

금세 20세기 프랑스 철학에서 현상학은 한 물 간 사조가 되었다. 후설의 모든 기획이 프랑스에 전달되지 못한 탓이 크다. 후설 현상학의 가장 중요한 소개자였던 레비나스는 현상학의 문제보다 종교의 문제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현상학 이해의 공백 덕분에 프랑스에서 현상학은 '아주 쉽게 극복될 수 있는 철 지난 사조' 정도로 파악되었다. 결국 에디트 슈타인과 후설의 논쟁이 현상학을 도외시하는 거대한 파도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