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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재 Jan 23. 2024

'창백한 푸른 점' 속에서,

부조리에 대한 카뮈와 네이글의 이야기. (논문 요약)

참고문헌:

     

최성호,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부조리의 철학: 카뮈와 네이글에 대한 독법」, 철학적 분석 0.41 (2019): 33-59.

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 한정준 옮김, 사이언스북스, 2020.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보면 지구는 특별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류에게는 다릅니다. 저 점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저 점이 우리가 있는 이곳입니다. 저곳이 우리의 집이자, 우리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당신이 아는, 당신이 들어본, 그리고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바로 저 작은 점 위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쁨과 고통이 저 점 위에서 존재했고, 인류의 역사 속에 존재한 자신만만했던 수 천 개의 종교와 이데올로기, 경제체제가, 수렵과 채집을 했던 모든 사람들, 모든 영웅과 비겁자들이, 문명을 일으킨 사람들과 그런 문명을 파괴한 사람들, 왕과 미천한 농부들이,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들, 엄마와 아빠들, 그리고 꿈 많던 아이들이, 발명가와 탐험가, 윤리도덕을 가르친 선생님과 부패한 정치인들이, "슈퍼스타"나 "위대한 영도자"로 불리던 사람들이, 성자나 죄인들이 모두 바로 태양빛에 걸려있는 저 먼지 같은 작은 점 위에서 살았습니다.

  우주라는 광대한 스타디움에서 지구는 아주 작은 무대에 불과합니다. 인류역사 속의 무수한 장군과 황제들이 저 작은 점의 극히 일부를, 그것도 아주 잠깐 동안 차지하는 영광과 승리를 누리기 위해 죽였던 사람들이 흘린 피의 강물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 작은 픽셀의 한쪽 구석에서 온 사람들이 같은 픽셀의 다른 쪽에 있는, 겉모습이 거의 분간도 안 되는 사람들에게 저지른 셀 수 없는 만행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잦은 오해가 있었는지, 얼마나 서로를 죽이려고 했는지, 그리고 그런 그들의 증오가 얼마나 강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위대한 척하는 우리의 몸짓, 스스로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믿음, 우리가 우주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망상은 저 창백한 파란 불빛 하나만 봐도 그 근거를 잃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우주의 암흑 속에 있는 외로운 하나의 점입니다. 그 광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안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파멸시킨다 해도 우리를 구원해 줄 도움이 외부에서 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 中.          



1. 허무주의적 귀결     


  고대에서 중세로, 중세에서 근대로, 더는 넘지 못할 것 같은 기술의 발전은 아직 끝을 모른다는 듯 발전해나가고 있다. 칼 세이건의 서술처럼,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고 가슴 아파하는 이 모든 것들은 결국 광활한 우주 속 먼지 같은 작은 점 위에서, 우주적 관점에서는 아주 덧없이 짧은 순간 동안 스쳐 지나가는 일에 불과하다. 우리가 “삶은 무의미하다”라거나, “삶은 덧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인식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히 살고,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어도, 심지어 우리가 신적 외양을 갖춘다고 할지라도 여기서 어떠한 삶의 유의미함이 귀결될 수 있을까? 그저 장엄한 스케일로 인생의 무의미함을 논하고 있진 않을까? 전쟁이나 독재의 직접적 위협이 사라진 뒤에 실존주의의 유행이 (그것이 일종의 ‘유치한 철학’으로 치부되며) 그친 뒤에도, 사람들은 줄곧 실존주의에 대한 수요를 보여준다. 어쩌면 인간의 삶이란 매 순간이 위기인 것은 아닌가 싶다. 전쟁이나 전체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고 해서, 내 마음의 두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닌 셈이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우리의 마음속은 텅 빈 것이 아닌, 다른 종류의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른다. 출판업계가 무너지고 인쇄된 것들의 가치가 점점 폄하되는 와중에도 여전히 카뮈는 읽히고, 니체는 읽히고, 쇼펜하우어는 읽히는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요컨대 부조리란 ‘우리의 삶과 불가결한 관계에 놓여있다’는 카뮈의 지적이 옳은 셈이다. 최성호는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카뮈와 네이글의 부조리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다. 이 짧은 글은 해당 연구에서 밝힌 카뮈와 네이글의 부조리론에 대한 요약에 지나지 않는다.          



2. 카뮈의 부조리론     


  최성호에 따르면 카뮈의 부조리론은 시지프스의 운명이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지향도 없는 무한 반복”인 데에서 드러난다. 카뮈는 이러한 시지프스의 운명을 우리 현대인의 운명에 빗대며, 현대인 역시 시지프스와 다르지 않은 운명에 처해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반문할 수 있다. “우리의 삶과 행위에 목적, 이유, 지향이 없다니? 그렇지 않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 행위의 삶에 적절히 정당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이 말이다.


Q. 왜 책을 읽는가?

A. 내 꿈은 철학을 공부하고 교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Q. 왜 철학을 공부하고 교육하려 하는가?

A. 인간은 본래 진리에 대한 물음을 품으며, 이를 해소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Q. 왜 그런 것을 묻고, 해소해야 하는가?

A.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이다.     

Q.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이며, 왜 그에 맞게 살아가야 하는가?

A. ….


  이것이 무한퇴행의 문제이다. ‘우리의 삶과 행위에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지향도 없다’는 것은 그 방향성이 어디선가 정당화의 근거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요컨대, 우리는 대답을 찾지 못한다.

  이런 부조리에 대한 가능한 해답으로서, 카뮈는 ‘자살’을 고찰한다. 하지만 자살이란 결국 이러한 무의미에 대한 동조이자 수긍, 결국 ‘우리 삶에 의미란 없다’는 시인에 불과하다. 시지프스가 ‘부조리의 영웅’일 수 있는 것은, 이처럼 확실해 보이는 삶의 무의미함에도 불구하고, 이 삶을 무한히 살아내는 반항으로써 ‘없던 의미에 의미가 있음을’ 반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3. 네이글의 부조리론     


  최성호가 소개하는 네이글의 부조리론은 카뮈의 것과 문제 제기의 관점을 달리한다. 네이글에게 있어서도 삶은 부조리하다. 그러나 카뮈가 말하듯, 우리 삶의 욕구, 욕망 – 그리고 그 욕망이 가닿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세계 사이에서 부조리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네이글은 우선 인간의 관점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① 일인칭적, 주관적, 행위자(실천가)적 관점

② 삼인칭적, 객관적, 관찰자적 관점 (영원의 관점)

  ①의 관점에 따라 행위할 때, 앞서 언급한 ‘정당성의 무한퇴행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문답이 오갈 수 있다.


Q. 왜 책을 읽는가?

A. 내 꿈은 철학을 공부하고 교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Q. 왜 철학을 공부하고 교육하려 하는가?

A. 그것은 내 꿈이고, 나는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 이상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은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이것은 순전히 우리 주관의 문제, 우리 삶의 개인적 문제에 국한되기 때문이며, 이에 대한 더 이상의 물음도 그에 대한 대답도 필요하지 않다. 문제가 되는 것은 ②, 곧 ‘영원의 관점’이다.

  쉽게 말해 삼인칭의 객관적 시선, 우주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우리의 지극한 개인적 해답은 여전히 정당성이 부족한 상태이다. 결국 우리는 ‘창백한 푸른 점’ 속에서, 덧없이 작은 공간과 덧없이 짧은 시간을 스쳐갈 뿐이기에, 우리의 삶과 행위는 도대체 의미가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게 된다. 문제는 인간에게 ①과 ②의 관점은 충돌한다는 점이다. 차라리 ①의 관점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이글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능력’ 또한 지니고 있다. 하나의 관점이 나의 삶을 주관적으로 정당화한다 할지라도, 또 다른 관점은 내면에서 객관적 정당화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관점을 무시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네이글은 이러한 두 관점의 충돌, 특히 ②의 관점이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가 부조리를 겪게 되는 현실에 대해 통탄하거나 좌절할 필요도, 또한 카뮈의 시지프처럼 과장된 영웅주의로 대응할 필요도 없다고 답한다. ②의 관점은 인간만이 향유하는 하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네이글은 인생의 부조리에 대한 최선의 대응으로써 ‘아이러니’를 제시한다. 우리에게 문제를 야기하는 ‘영원의 관점’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회의할 수 있는 관점’이다. 부조리가 우리에게 주는 절망과 비탄마저도, “과연 이러한 절망과 비탄에 정당성이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진지하게 고찰하고, 또 마땅히 살아나가야 하는가?”라는 진지한 물음 앞에는; 이러한 물음이 절대적으로 진지한지, 그리고 이에 반대되는 회의와 비관이 절대적으로 진지한지 알 수 없는 미궁으로 남아 있다. 그저 우리는 이에 대해 아이러니를 머금은 미소로 응대하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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