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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애진심 Dec 30. 2022

나는 대한민국 군인 아줌마입니다.




임관 후 바로 전방부대에 배치를 받았다. 당시 여군부사관이 임관을 하게 되면 육본이나 군사령부 같은 상급부대에 배치를 받고 행정지원관으로 임무수행을 했다. 하지만 우리 기수는 임관 후 바로 전방으로 배치되었다.



초임하사 때의 일이다. 처음 자대배치를 받고 간 곳은 전방 어느 부대의 중대였다. 그곳에는 남군 선배들이 여럿이 있었다. 처음으로 중대에 여군 후배가 왔으니 함께 근무하게 된 남군들도 당황스러워했다. 그중 내가 00 반장님으로 불러야 하는 나보다 연륜이 있는 남군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는 나를 아줌마라고 불렀다. 전하사 혹은 00 담당관이라고 하지 않고 아줌마라고 불렀지만 나에게 깍듯하게 존칭을 해주시는 분이었다. 아마도 첫 여군과의 임무수행이 어색해서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벌써 20년 전이고 요즘 같았으면 성희롱이니 인권침해니 하며 난리가 났을 텐데 그때만 해도 관심의 표현이나 어색함을 넘어서기 위한 친근함으로 생각했다.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나 또한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한 번은 퇴근 후 중대 간부들과 식사를 하기 위해 부대 근처 식당을 갔다. 한참 식사를 하고 있는데 그 선배가 "아줌마 여기 반찬 좀 더 주세요"하며 식당 아줌마를 부르는 소리에 아주 자연스럽게 내가 대답을 했던 적도 있었다. 덕분에 함께 식사하던 간부들과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있다. 결혼도 안 한 20대 초임하사가 아줌마라는 호칭에 아주 적응을 잘했던 결과였다.



나의 군생활은 벌써 20년이 되었다. 10년이면 변한다는 강산이 두 번이나 변했다. 그동안 하사에서 중사를 거쳐 상사로 진급했다. 결혼을 했고 올 2월에는 셋째 늦둥이를 출산했다. 덕분에 아이를 셋이나 키우는 진짜 아줌마가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맞벌이 부부이면서 더군다나 군인부부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남편과 함께였기에 이겨낼 수 있었다.



두 집, 세 집 살림을 하는 부부군인들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든 가족 모두 같은 집에서 살려고 노력했다. 육아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시댁이나 친정 모두 도움을 받을 만한 상황이 되지 않았다. 오로지 남편과 나 그리고 어린이집이 모든 것을 해결해야만 했다. 군 생활, 집안일, 육아를 병행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물론 힘들고 버거울 때도 있었지만 군인이 된 것을 후회한 적은 없다. 사회생활을 하며 육아하는 엄마들이 모두 나와 같이 힘들지만 잘 견뎌내고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군대 가기 전에는 한 직장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입대 후 20년이라는 세월을 묵묵히 견디면서 참을성과 끈기를 가지게 되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혹은 상황들이 불편하면 도망가기 바빴지만 이제는 그것을 현명하게 해결하려고 한다. 상급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통해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불평불만 하지 않고 일단 시작하는 추진력이 생겼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겪으면서 나를 훈련시킬 수 있었다.



초임하사 때는 군 생활이 천년만년 영원할 것 만 같았다. 육군 주임원사가 되겠다는 큰 포부를 가진 적도 있었다. 이제 와서 보니 지금까지 했던 군 생활보다 앞으로 남은 군 생활의 기간이 더 적다. 마흔 중반을 지내다 보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많아진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이제는 대한민국 아줌마가 되기 위한 준비가 필요한 때이다.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아주 작고 소소한 것부터 시작해 보려고 한다. "꽃이 진 자리마다 / 열매가 익어가네"라고 시작하는 이해인 시인의 <익어가는 가을>이라는 시가 있다. 조금 늦게 핀 꽃이라도 꽃이 지면 열매가 익어가기 마련이다. 이제는 열정과 도전정신으로 다시 시작할 때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나는 대한민국 군인 아줌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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