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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런식으로 생각이 나요.

내가 사랑하는 작가

by 밝둡

그때, 먼 길을 떠나게 되면 가방 안에 마지막 퍼즐처럼 책 한 권을 끼워 넣었다. 교양 수업 때 수업 자료였던 그 책은, 포켓북만큼 조그맣고, 하얗지 않은 누런 종이색의 종이로 된 책이었는데, 말의 힘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난 처음 가는 곳의 여행길에도 로드맵이 쓰여진 가이드북처럼, 그 책을 펼쳤고, 읽고 또 읽었다. 물론 그런 식으로 읽었던 그 책을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적은 없다. 아우구스투스가 나오는 부분을 읽다가 창가에 기대어 잠든 적도 많았고, 가방 안에서 길을 잃어버린 그 책을 구출하지 않은 채, 몇 개월이 흐른 적도 있다. 그 책은 언어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언어를 의식함, 행함, 문화에 대해서 말했다. 두툼한 나의 입술을 통해 나왔던 말들의 실체를 지나치게 진지한 문제로 만드는 그 책은, 하찮을 정도로 작았던 그놈을 섭렵하지 못하는 재미로, 끈질기게 사라지지 않고, 질척거리다가, 30년 가까이 된 최근에서야 보이지 않는다.


그래, 고생했지 뭐.

내게서 소외받은 것들에게 달라붙어서 내 영혼에 대해 궁시렁거리고 다닐지도 모르겠다. 그것의 힘이 그러하니까 말이다.


그 조그만 놈을 생각하다가, 조금 더 크지만, 얇았던 책이 있었음을 알아차린다. 그 자리에는 좀머씨 이야기가 차지했다가, 콘트라 베이스에게 뺏겼다. 두 권의 책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에게 쓰여진 책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좋아했다. 글 곁에 숨어 있듯 걸어 다니는 수많은 독백들을 사랑한다. 다시 읽노라면 어디론가 도망가 버린 듯한 쥐스킨트의 꿈틀거리는 독백이 느껴졌다. 구름이 계속 움직이고, 태양이 떠 있고, 그 뒤를 달이 줄을 서고 있는 동안, 기필코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중얼거리는 그의 독백이 자글자글한 글이 꽉 차 있던, 책을 사랑했다. 소중히 여기던 콘트라베이스 책은, 한 학기를 앞두고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을 한 선배의 미국행 비행기에 태워주었다. 그리고, 쥐스킨트는 어느 날 갑자기 은둔 생활을 시작했고, 나도 자연스럽게 책과 헤어졌다.


그 뒤로, 내 마음을 흔들고 씹어대고, 강바닥에 묻히며, 시야를 방해하던 글들이 있었고, 내 마음의 닻에 걸리진 못했다.


좋아하는 것과 별로인 것을 나누는 기준이 명확하지 못함을 안다. 한방에 죽여 버릴 수 있을 정도의 날카로운 기준치가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그게 없어서인지, 아니면 아직 멀었는지, 좋아하는 것과 별로인 것들 사이에는 까탈스러운 미식가의 꿈틀거리는 눈썹처럼 지맘대로다. 모기만큼 짜증 난다.


그보다, 귀찮은 일이 있다. 좋아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하루 종일 말해도 되겠지만, 그건 비겁함과 연결되는 시간이다. 어쨌건, 욘포세는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되었다. 욘포세의 글을 읽으며, 내용과 전혀 상관없이 웃고 있었다. 글의 앞뒤가 있다면, 머리가 있는 쪽에 배꼽이 있는 것 같은 나의 세계처럼, 욘포세는 등장했다. 반복이 반복되는 그의 글은, 리프처럼 하나의 음악처럼 들렸고, 그만해도 될 만큼, 말리고 싶은 만큼 반복되고, 나열과 나열, 그리고 또 나열들이,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의 설명서처럼 보였고, 나 같은 놈을 위한 위로곡처럼 들렸다. 글은 내용을 잃고 반복의 덩어리로 성큼성큼, 또는 둥실둥실 나를 농락했다. 매만졌다. 신기한 마음을 키웠다. 재밌는 기분에 기준치를 넘긴 쾌락을 주사했다. 개같이 재밌었다. 슬픔이 만연했고, 허풍처럼 가벼운 풍선이 가득 찬 마을 하나가 바다를 거머쥔 채 저 하늘 어느 너머로 기어가는 듯한 상상을 하게 되었다. 게 중 글쓰기에 대한 짧은 글 하나를 본다.


"내가 글을 쓴다면 그것은 하나의 원칙이다. 그런 다음 나는 내가 무엇을 쓰는가에 관해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시작하고 진행이 되면 잠시 후 나는 극작품 또는 텍스트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갖는다. 무엇인가가 오고 나는 그것을 받아 기록해야 한다. 내가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은 것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내게 중요하다 - 이는 일의 마술이다. 나는 앉아 있다. 피오르의 내 작은집에. 그리고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

- ( fosse, 2001)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지나가듯이 쓰인 이 글을 나는 사랑한다. 무엇인가가 오고 나는 그것을 받아 기록해야 한다. 내가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은 것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내게 중요하다.


내가 나이고 싶어 하는 그런 모습을 의식하는 순간, 망친 거다. 그런 마음을 갖기 위한 준비를 한다. 준비를 하기 위해 힘을 뺀다. 힘을 빼는 의식은 무조건 중요하다. 움직이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그래, 나도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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