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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먀우 Oct 05. 2020

독일 테클렌부르크 야외극장 기행 2

스포일러: 1편의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https://brunch.co.kr/@myau/4

기행 1편을 안 보셨다면 요기로.




6월에 공연을 보고 난 뒤 8월의 두 번째 공연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보통 모든 일이란 한번 해 보고 나면 뭐야 별 거 아니었네, 다시 하면 잘 하겠네, 싶은 법인데 이 일만은 뭐야 별 거였네, 어떻게 해봐야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내에서 표를 파는 걸 시도해 봤지만 오타쿠 없는 독일에서 단 한장의 매우 좋은 좌석과 좋은 배우와 좋은 작곡가의 공연 티켓을 탐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두 장이었으면 소셜 이벤트를 들이밀며 네 주변의 친구 가족 어쩌구와 함께 소중한 추억을 만드세요를 외치며 어떻게 팔아보았으련만. 한국의 오타쿠적 토양, 모두가 마음 속에 낚시, 수석, 원예, 아이돌, 배우, 가수, 그 외 기타등등을 품고 살아가는 모습은 감히 독일이 따라할 수 없다.


표를 파는 것에 실패한 상황에서 두 번째 공연날이 다가왔다. 6월의 공연은 하지를 지나는 시점이라 해가 매우 길어 10시경까지 밖이 밝았지만, 8월이라면 해가 훨씬 더 빨리 질 것이다. 여전히 운전 능력이나 친구 혹은 가족은 없었고, 이번은 목요일 공연 티켓을 끊은 탓에 무한한 시간을 들여 자전거를 타고 갈 수도 없었다. 결론적으로, 돈과 독일의 넘쳐나는 휴가로 문제를 해결해 보기로 했다.


우리 회사는 주 40시간 근무만 지킨다면 팀에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출퇴근이 자율이었기 때문에, 목요일 빠른 탈주와 금요일 휴가라는 해결책을 날렸다. 2주간의 여름휴가를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그렇게 휴가 카드를 날리기가 좀 아쉽긴 했지만, 표를 날리지 않는 방향을 선택했다. 이번에는 레히팅엔까지 자전거와 함께 기차를 타고 간 다음, 레히팅엔에서 테클렌부르크까지 가는 6km의 길만 자전거를 타고 등반하기로 했다. 테클렌부르크는 나름 동네 관광 휴양지로 알려져 있던 만큼, 평이 괜찮은 호텔들도 여러 군데 있었고, 그 중 한 군데 숙소를 잡았다. 1박 60유로라는 가격에 깔끔한 숙소였다. 호캉스가 테마인 만큼 가면 갑자기 생산성이 높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며 노트북이며 아이패드를 이리저리 챙겼다. 방석과 담요와 혹시 모르니 우비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목요일 오후 네다섯시 경 뮤지컬 보러 가야 한다고 팀원들에게 알리고 일찍 퇴근을 했다.


레히팅엔 기차역에서 내려 시내를 관통하는데, 지난번 새벽에 기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기 위해 레히팅엔 시내를 지날 때 길에 사람이 너무 없어서 무서웠는데 그냥 그 동네에는 평일 낮에도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시내 작은 무대에서 무슨 밴드 같은 사람들이 라이브 공연을 하는데 나이 많은 사람들 열명 남짓만이 앉거나 서서 공연을 듣고 있었다.


구글맵은 이번에는 막혀서 통행할 수 없는 산 속 오솔길로 나를 인도했고, 결국 포기하고 전에 가 본 길로 호텔로 향했다. 호텔은 약간 헤멘 보람이 있는 곳이었다. 숙소 앞에 탁 트인 여름날의 흠 잡을 거 하나 없는 아름다운 풍광이 나를 맞아주었다.


아니 근데 여기까지 자전거 타고 올라오는 사람들이 있더라? 난 끌고 걸어서 올라왔는데...
1박 60유로에 바깥 정원(?)까지 딸리다니요


높은 곳에서 보는 바깥 풍경은 옆 방 때문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나, 밖으로 나가 앉을 수 있는 아담한 테이블이 딸린 방이 배정되었다. 1박 60유로 치고 깔끔하고 있을 것 다 있고,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놓여져 있는 안내 책자를 읽어보니 아침이 포함된 5박 숙박 플랜을 259유로에 제공한다고 했다. 식당이 딸린 호텔이라 저녁 메뉴를 포함한 요금도 있었다. 다음 여름 휴가는 바둑대회를 전 유럽으로 싸돌아다닐 것이 아니라 이런 데서 통조림 하면서 글이나 쓰며 생산성이나 찾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그 다음 여름인 올해 여름은 게임 속 바다 보면서 보냈지만 말이다) 아주 간단한 어매니티도 갖추어져 있어서, 크루엘티 프리 (동물 실험을 하지 않은 제품이라는 인증) 토끼 로고가 찍힌 샤워 용품이 욕실에서 나를 반겨 주었다.


푹 쉬고 여러 가지 해야 할 일들도 좀 생산성 있게 하는 게 원래 목표였는데, 생각보다 이까지 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 금새 공연을 보러 갈 시간이 되었다. 이번에는 현명하게 구글맵이 알려주는 경로를 무시하고 방석을 든 사람들의 뒤를 따랐다. 덕분에 하산과 등산을 반복하지 않고 평지를 편안하게 걸어 극장에 도착했다.


https://youtu.be/-Y0ckT1A2GY

테클렌부르크 야외극장에서 상영한 <돈 카밀로 운 페포네> 홍보 영상


2회차 공연 감상은 크게 다른 게 없었는데, 지난번에 앉았던 자리가 보혀트가 연기한 돈 카밀로 신부님의 성당 진영 쪽이라 더 괜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첫 공연 즈음엔 일반인 수준의 임팩트 없는 발성이라 대단히 실망했던 예수님 역할 배우분의 발성이 프로 수준으로 좋아져 있었다. 예수님, 두 달 사이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공연이 끝나도 쪼르륵 돌아갈 숙소가 있다는 것이 마음이 놓여 마음껏 몰입할 수 있었다. 독일 여름은 끝없는 비참함만을 제공하는 겨울을 보상하듯 모든 것이 완벽하다. 지난 번에 공연 봤을 때 보다도 추워서 겨울 외투를 챙겨오지 않은 걸 후회했지만, 선득하고 건조한 밤바람에 자연과 함께하는 야외극장 특유의 정취, 공연까지 함께하니 참 이번 여름은 이거면 미련 없이 보내 주어아겠다 싶을 정도로 아득히 좋았다.


숙소로 돌아와 글이라도 쓰고 할 일을 좀 해 보려 했으나 피곤해서 적당히 인터넷 세계를 쏘다니다가 잤다. 노트북은 단지 어깨의 피로를 위해서라는 걸, 집 나가도 생산적인 일은 하지 않음을 이쯤 하면 알 때도 된 것 같은데.


하나도 생산적이지 않은 상태로, 아침을 먹고 씻고 정리하고 체크아웃을 하고 테클렌부르크를 둘러보았다. 시가(?) 부분은 지난 번에 보았으니 볼 필요가 없을 것 같고, 공원이 있다고 해서 쿠어파크로 향했다. 나 말고도 산책을 나와 공원을 찾아가는 관광객들과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이 몇 보였다. 노트북 왜 들고 왔냐. 자연과 푸르른 녹음이 가득한 공원을 대충 둘러보고, 빠개질 것 같은 어깨를 부여잡고, 레히팅엔 기차역 가는 길에 있는 물을 구경가기로 한다. 또 구글맵을 믿었다가 두세시간 정도를 헤멘 끝에 옥색의 물뷰를 한 자리 차지한다. 사진을 찍고, 다시는 죽었다 깨어나도 돌아올 일이 없을 것을 짐작하며 레히팅엔에서 기차를 타고 다시 오스나브뤼크로 돌아왔다.


쿠어파크
Tecklenburg의 Canyon


집에 오는 길에 지난 레히팅엔의 시골집들은 이런 데서 다른 독일인들처럼 한적하게 가족 근처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서 서글펐다. 우리 엄마 DIY도 목공도 좋아할텐데, 이런 데서 주택에 살면서 독일에 널리고 널린 건축 자재 파는 마트에서 나무랑 자재 잔뜩 떼다가 이것저것 만들며 살았으면 재밌었을 텐데. 우리 회사 다른 애들처럼 독일 시골에서 누가 봐도 외국인이 아니고 누구의 구설수에도 오르내리지 않을 방식으로 이런 한적한 곳에 살아갈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아서 금새 망상을 접었다. 프랑크푸르트 근처 작은 도시에 살았던 최순실 일가처럼 주변 독일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전부 웬 중국인이 이사왔다 하고 나서서 감시나 하고 일지나 적겠지. 수십 년을 같은 골목에 살아온 사람이 대부분일 테니 특유의 정과 특유의 폐쇄적 커뮤니티가 있을 건데 거기 또 이방인의 모습으로 껴 보려고 살가운 척 애쓰는 것도 상상하니 너무나 피곤한 일이다. 역시 도시 촌놈은 도시에서 익명성 껍데기를 뒤집어 쓰고 살아가는 것이 제일이다.


이 두 번에 걸친 테클렌부르크 기행은 '혼자 오타쿠짓' 키워드와 내 나이를 빼고는 내가 생각하고 해 본 가장 독일스러운 짓이었다. 엄청난 고령화 상태인 작은 동네, 지역 기반의 이런 데서 이런 공연을 한다고? 싶은 동네와 한국적 상식으론 어울리지 않는 저렴하고 퀄리티 높은 공연, 독일에서 아주 흔한 숙박과 공연 관람을 결합한 형태, 여름날 휴양지같은 할 거 없는 동네에서 호텔에서 숙박하기, 자전거 타기, Wanderung(등산?)까지. 삐끗한 건 혼자서 배우 덕질의 연장선으로 왔다는 점과, 내 나이 뿐이였다. 독일은 나이 많은 사람들이 아무래도 돈이 많아서 오페라 같은 경우는 60대만 되어도 최연소 관객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의심스럽고, 뮤지컬은 그 보다는 관람객 연령층이 어리지만 10대~30대의 젊은 관객층은 매우 드물다. 게다가 시골 사랑하는 지역 기반 정신과 주말이면 40km씩 심심풀이 삼아 자전거 타고 놀다 오는 정신까지. 내가 만약 런던에서 공연을 보고 왔다면 그건 하나도 독일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아주 멀고 낯설고 무서운 나라의 정신 사나운 대도시라 나는 절대 안 갈 거야 정도의 반응이었겠지. 휴양지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내가 가 본 하고 많은 여행지들 중에 테클렌부르크 기행을 글로 남긴다. 다른 데라면 나보다 더 정성스럽게 쓴 훌륭한 여행 수기를 잔뜩 찾을 수 있겠지만, 한국어로 된 테클렌부르크 여행기 중에선 내가 쓴 글이 으뜸이지 않을까 하는 자신을 가지고 말이다. 대충, 유일하길 바란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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