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개발자로 6개월동안 AI 멱살 잡은 이야기
캐나다에 워홀 와서 10일만에 정규직 프로그래머 잡 오퍼를 받았는데, 입사 5개월만에 일본 출장 후 휴가 중에 줌 미팅 콜 한통으로 "no cause"로 "지금 이 순간으로부터 즉시" 해고당했다. 구직도 빛의 속도더니 퇴직도 빛의 속도였다. 쓰읍, 인생이 이게 맞나? 너무 빨라서 정신 못 차리겠네.
내가 일본어, 영어를 다 할 수 있다는 이유로 프로그래머인데 자꾸 통역을 시켰다. Job description에 없는 일을 자꾸 시킬 거면 보상이라도 더 달라고 공식 루트로 면담을 요청했더니, 후에 출장때 상급자가 나한테 "언어는 숨 쉬는 거다. 보상의 대상이 아니다." 라고 했다. 내가 통역가가 되고 싶었으면 통역가가 됐지 프로그래머 하고 있겠냐?! 일본에서 일을 해본 것도 아니고, 그냥 오타쿠 일본어가 다인데, 명확한 업무 범위도 지시사항도 없었다. 해고 직전, 그러니까 출장 직전에 받은 나에 대한 평가서는 나에 대한 회사의 좋은 평가가 적혀 있었다. 해고 통보 후에 그 평가서 좀 달라고 회사에 두 번이나 요청했는데 씹고 안 줬다.
일본 카루이자와의 카페에 앉아서 하루 아침에 해고가 됐다만은 할 수 있는 게 많지는 않았다. 변호사 상담 결과, 원래는 몇달치 월급정도를 받아낼 소송을 요청할 가능성이 있지만, 캐나다 땅 밟은 지 10일만에 사인해서 보낸 고용 계약서에 포함된 독소조항 때문에 좀 더 보상을 받기 위한 소송은 어렵다고 했다. 뭐야 캐나다 왜 이렇게 별로인 나라야. 2025년 캐나다의 IT시장은 유난히 차가웠고, 워킹 홀리데이 임시 비자와 짧은 캐나다 경력으로 재취업을 하기는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AI 멱살 잡고 앱 만듦.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linkrush.korean
갑자기 하루 아침에 해고당했으니 일 자체를 하려는 의욕은 넘쳤다. 일 하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출퇴근도 좋아하고 (!!!) 그러나 내가 할 줄 아는 건 유니티밖에 없었다. 유니티 + 인더스트리라는 꽤 좁은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었고, 이 혼란한 현세에는 메타버스고 AR이고 VR이고 나발이고가 설 자리가 없었다. 구직을 지속했지만, 구직 하나에만 매달리고 싶지는 않았다. 링크드인의 거의 모든 내가 지원할 수 있을법한 잡 공고는 며칠만에 100명 이상 지원했다는 마크가 찍혀있었고, 가능할만한 많은 포지션에 지원했지만 오퍼는 커녕 면접 요청조차 없었다. 이런 시장이라면, 임시 비자 소유자보다는 영주권자 시민권자를 회사 쪽에서도 우선하겠지. 독일 쪽에는 그래도 포지션이 좀 있어서, 차라리 다시 독일에 가야하나...? 라고 종종 생각했지만, 일단 캐나다에 온 이상 무를 썰어야지. 무를 아직 못 썰어서 아직 떠나지 않았다.
온타리오에서 제일 크다는 노동 관련 로펌 변호사한테 회사 소송 관련 의견을 물어보고, 계약서 때문에 어렵고 자기들은 어려운 소송은 맡지 않는다는 의견을 들은 뒤에, 앱 브레인스토밍을 시작했다.
아이디어는 몇 개가 있었다. AI api를 이용한 대화 논지 분석 앱? 다 통화 가계부 앱? 연애 시뮬레이션 풍의 어학 학습 게임? 태스크를 설정하고 달성하면 춤추는 동물 애니메이션이 나와서 칭찬해주는 앱? 내가 필요한, 쓰고싶은 앱? 사람들이 필요할만한 앱? 뭐가 있을까?
챗쥐피티를 붙들고 계속해서 물었다. 이 아이디어들 어때 보이는데? 검토해줘.
다른 아이디어들은 일회성이 강하거나, 시장성이 약해 보였다.
어학 학습 앱은 어떤데? 요새 AI가 막 어학 앱도 만들어 주던데.
어학 앱 정도면 AI 도움을 받으면 1인 개발로 가능하지 않을까?
완제품은 말고, MVP만 내서 시장성 검증을 하면 되지 않을까? 그럼 몇달만에 MVP 뽑지 않을까?
클리셰 위주로 스토리 짜고, 내가 4개국어 가능하니까, 내가 가능한 AI한테 로컬라이징 맡기고 내가 검토하면 되지 않을까?
AI는 나를 충분히 뜯어말리지 않았고, 그렇게 나는 업무지옥으로 스스로 저벅저벅 걸어들어갔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앱을 브레인 스토밍으로부터 6개월만에
- 구글 플레이 스토어 출시
- Order, Select, Translate, 독백, 대화, 캐릭터, 배경음악, 음성 등을 갖춘 학습 페이지
- 단어장 페이지
- Firebase Auth + Firestore + Function 으로 서버리스 백엔드 구축
- 시나리오, 캐릭터 설정
- 약 20강 어치 시나리오 작성
- 한국어 대사에 대해서는 TTS 음성 적용
- 캐릭터 일러스트 외주 및 관리
- 팝업, 한글 입력 키보드 등의 편의성 관리
- 스토리에서 만난 캐릭터와 메신저 인터페이스로 대화할 수 있는 AI call
- 영어, 일본어로 Localization
- 광고 적용
- IAP 적용 (구독, 티켓제)
을 만들었다. 뚝딱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매일매일 "정말 이게 맞나?"를 되뇌었다.
AI의 보조를 받으면서 하나하나의 업무량은 그렇게 난이도가 높거나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다만 조금씩 욕심내다 보니까 "내가 이것까지 해야하나?" 라는 갯수와 필드의 종류가 미친듯이 많았을 뿐. 마케팅의 ㅁ도 꺼내지 않아서 일부 업무들은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NPC 그림도 그려서 넣고, 배경화면 보정도 하고, 기능 하나하나 붙이다 보니까 이것도 넣어야 할 것 같고, 저것도 넣어야 할 것 같았다. 시나리오 작성이나 번역도 자동화가 가능할 줄 알았는데, 결국 내가 상당 부분 써야 했다. AI가 감을 한번 잡으면 속도가 빨라지는데, 감을 못 잡으면 결국 내가 다 검토해야 했다. 인간이 했을 때 더 나은 영역(일러스트, 시나리오 작성 등)이랑, AI가 해줄 수 있는 영역(프로그래밍, 시나리오 초안 제공)을 섞어서 사용했다.
원래 영어 학습 앱으로 기획했는데, 올 여름에 케데헌의 열기가 너무 뜨거워서 한국어 학습 앱으로 중간에 피벗했다. 영어 앱 시절엔 최소한 알파벳을 알고 기본적인 영어 읽기가 가능한 사람들을 타겟으로 기획했는데, 한국어는 한글도 모르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 같았다. 한국어 키보드도 없겠지. 하나 만들어 줘야겠지. 그렇게 하나하나 붙이다 보니까 끝도 없었다.
최적화는 아직 되지 않았고, 아직 버그와 누락된 부분들도 제법 있지만, AI로 앱을 만들었다.
AI로도, 간단한 수준의 앱이 아니라 제법 제대로 된 앱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정말로 뭘 하고싶은지가 가장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지구 온난화와 전력 소모에 대한 약간의 흐린 눈과...)
AI를 왜 첨부터 제대로 해주지 않느냐고 흔들면서, 캐나다의 여름은 너무 아름다워서, 기분은 꽤 좋았다.
해고 이후로, 캐나다 영주권 준비한다고 프랑스어 공부도 하고, 심심해서 전화일본어도 하고, 탐조도 다니고, 운전 연수도 받고, 승마도 시작하고, 의료 문제가 생겨서 한국도 다녀오고, 출퇴근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많은 것들을 하면서 열심히 놀았다. 새 사진 자랑해도 아무도 안 봐주니까 여기다가 올려야지.
더 길게 썼는데, 너무 기술적인 이야기가 되는 것 같아서 일단 이 글은 여기서 끊음.
다음글은 요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