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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섶 Oct 18. 2022

내 안의 평화를 위하여 / 이종섶

내 안의 평화를 위하여     


이종섶        

       

잣나무 숲을 산책하는 아침입니다. 눈부시면서도 신비로운 햇살이 비칩니다. 맑고 신선한 공기가 스며듭니다. 한 걸음 두 걸음 걸을수록 가벼워지는 몸과 마음입니다. 나도 한 그루 나무가 되는 것일까요. 발을 딛고 선 땅에서 올라온 수액이 뼈와 혈관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 퍼져갑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눈에서 투명한 가지들이 공중으로 뻗어 푸른 잎사귀들을 틔웁니다. 참으로 평화롭기 그지없는 숲속 풍경입니다.


걷다가 쉬다가 하면서 산책을 하는 동안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아니 지금까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옹이가 보입니다. 한번 눈에 띈 옹이는 여기저기 수두룩하게 보이고, 옹이를 맞닥뜨린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주변의 잣나무들을 살펴보니 옹이가 없는 멀쩡한 잣나무는 한 그루도 없습니다. 모든 나무가 다 옹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두 개가 아닌 서너 개씩의 옹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옹이들을 보는 순간 그윽하게 깃들었던 평화의 감정이 흔들려 마음속에서 희미해지기 시작합니다. 애써 평화의 마음을 붙잡아두면서 그 옹이들을 살펴보니 가지를 잘라낸 단면마다 찐득한 눈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눈물이 갓 생긴 상처에서는 맑고 투명한 이슬방울처럼 흘러내리고, 오래된 상처에서는 검푸른 피눈물처럼 고약하게 쏟아집니다. 어떤 나무는 그 피눈물이 깨끗하게 마르고 나서 어여쁘게 만들어진 옹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 나무 안에 상처가 깊어가는 옹이가 있고 상처가 아물어가는 옹이가 있기도 합니다. 잣나무 숲은 옹이를 생산하는 자연의 공방이고 잣나무는 옹이를 만드는 장인입니다.


옹이들을 보면서 나 자신의 다양한 상처들을 떠올립니다. 평화를 깨뜨리기도 하고 평화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찰하게 해주었던 상처들입니다. 크고 작은 상처가 생길 때마다 아파하고 신음하며 눈물을 흘리던 날들이 한 그루 두 그루 나무가 되어 평화의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푸른 나무들만 보이지만 숲에 들어서면 기둥에 난 상처와 눈물과 옹이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숲입니다. 내가 지나온 길에 숲이 보여 정말 다행이지만 가지들이 보여주는 숲속에는 그 숲의 평화를 키우거나 지키기 위한 상처와 옹이가 무수히도 많을 것입니다. 잣나무 숲에서 피톤치드가 나와 내 마음과 심장을 정결하게 하듯이, 저 멀리 보이는 내 과거의 숲에서도 더욱 진한 피톤치드가 나와 나의 평화를 새롭게 숨 쉬게 합니다. 그때 나를 몹시도 힘들게 했던 상처에서 이렇게 고요한 평화의 향기가 납니다.


내 생각이나 습관들이 타인과 부딪혀 하나둘씩 꺾이거나 잘려나갈 때마다 나는 소중한 평화가 사라져버려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평화 없는 삶이 견디기 힘들어 속으로 끙끙대며 지내야 했던 날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한두 번 경험하면, 아니 어느 정도 경험하면 그런 일들이 다시는 없어야 했건만 나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서로서로 평화를 깨드리는 상처를 주면서 살 수밖에 없었던 모진 세월이었습니다. 


그렇게 지나온 세월의 숲을 다시 산책하며 나 자신의 평화를 살펴보는 잣나무 숲속입니다. 어렴풋하게 바라볼수록 치유가 되기는커녕 아무도 몰래 꼭꼭 숨겨놓은 아픔이 덧나고 말지만, 뚜렷하게 바라보면 볼수록 이해와 터득에서 비롯되는 현재의 유익과 성숙을 평화롭게 얻을 수 있는 법을 지순하게 깨닫습니다. 잣나무 숲에서 옹이를 발견한 아침에 평생의 유익이 될 평화의 묵상이 가슴에서 자라기 시작하는 것을 느낍니다.


예전에는 옹이만 남기고 잘려나간 가지들이 무척 아깝고 아팠을 것입니다. 옹이가 클수록 그 허탈함도 크고 깊어 먹먹한 가슴으로 허공만 바라봐야 했던 날들이었을 것입니다. 옹이를 남긴 채 사라져버린 가지들은 나뭇가지 중에서 가장 큰 가지들이어서, 낫에 찍혀 말려졌다가 아궁이 불쏘시개가 되어버리는 신세가 안타깝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아꼈던 것들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릴 때의 기분도 마찬가지여서 평화를 상실해버린 그 속상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 옹이가 흘렸던 눈물은 나무를 지저분하게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이슬같이 영롱한 눈물을 흘렸으나 가면 갈수록 시커먼 구정물을 흘려 나무 가까이 가지도 못하게 했고 그 나무를 붙잡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향도 좋을 뿐만 아니라 반듯하게 잘 자라고 있는 나무를 저렇게 고통스럽고 지저분하게 만들어 평화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기만 했습니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려서 그 이유를 생각하기도 전에 옹이의 거친 흔적들을 먼저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마다 옹이를 껴안고 우는 내 손과 옷에 언제 아물지도 모르는 상처의 진액이 엉겨 붙어 안 그래도 힘들 수밖에 없는 상처를 더욱 힘들게 했었습니다. 평화를 송두리째 잃어버린 사람의 불안과 아픔이 주는 어두움과 흔들림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옹이로 인한 나무의 손해와 상처도 많지만 옹이가 주는 이득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떠올려봅니다. 작은 그릇일수록 자신의 손실 그 자체만 생각하나 큰 그릇일수록 손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성과를 바라보는 법입니다. 오늘은 마음의 크기를 조금이라도 늘려 평화의 숨결과 햇살을 담아보기로 다짐합니다. 그 마음에 잘 마른 옹이의 표정을 담아 고운 손으로 다독다독 쓰다듬으며 그 평화의 또 다른 외피의 질감을 느껴봅니다.


옹이가 있어야 자라는 나무입니다. 가지치기해서 옹이를 만들지 않으면 잣나무 숲에 가지들이 빽빽해서 일도 산책도 할 수가 없습니다. 열매도 제대로 수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옹이가 있어야 숲을 산책할 수 있습니다. 옹이는 나무와 나무 사이에 공간을 만듭니다. 그 공간 사이로 사람이 산책하고 오솔길이 생깁니다. 나무가 만든 평화의 공간입니다. 옹이를 만들어 평화를 누리게 해주는 나무입니다.


잣나무 숲속에 난 오솔길을 걸으며 푸른 산책을 마칠 때쯤, 상처와 평화의 관계를 생각합니다. 나도 상처를 통해 자랐다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상처를 통해서 평화를 배우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합니다. 그 상처와 평화의 자각과 배움으로 인해 다른 사람을 배려하게 되었고 어려움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평화를 누리게 해주는 작은 손길이나 행동이 무엇인지를 알고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지고 있는 옹이들은 내가 잘 자라서 평화를 누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제 다른 사람이 내 곁을 지나가다 내 뾰족한 가지에 찔려 신음하거나 내 섣부른 가지에 걸려 넘어질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내 곁을 지나가기 좋아하고, 나를 바라보다 내 몸에 새겨진 옹이를 보며 자신을 조용히 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나를 산책하면서 내가 뿜어내는 향기를 맡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나에게서 나가는 진정한 평화입니다. 그것이 내가 줄 수 있는 순수한 평화입니다. 


잣나무 숲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고개를 돌려 잣나무 숲을 바라보니 푸드득 날아가는 산비둘기 한 마리가 보입니다. 허공에 흩어지는 잣나무 향이 평화롭습니다. 눈부시게 빛나는 평화의 햇살이 더욱 환해집니다. 마음 가득 평화가 고입니다. 



- 평신도 2022년 봄호 / 계간 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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