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14세기 말. 혼돈의 유럽, 그 속에는 프랑스가 있었다. 십자군 전쟁을 비롯한 전쟁과 약탈, 봉건제의 여파 아래 프랑스는 휘청거렸다. 프랑스의 수많은 기사들은 잉글랜드 등지로 원정을 떠났고, 잔혹한 살육전 한가운데에 놓였다.
1386년, 크리스마스에서 며칠 지난 날, 그날은 순교자 성 토마스 베케트를 기리는 날이었다. 그 추운 아침 파리의 한 수도원의 넓은 공터는 몇천 명의 군중으로 가득 찼다. 생사가 걸린 치열한 결투의 증인이 되고자 모인 이들이었다. 이날의 결투에는 최소 한 개, 최대 두 개의 목숨이 걸려 있었다.
결투를 앞둔 이는 장 드 카르주와 자크 르그리였다. 장 드 카르주와 자크 르그리 역시 프랑스의 기사 중 하나였다. 이 결투에서 두 기사 중 한 명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이 결투에 인생이 걸린 사람이 있었다. 바로 마르그리트 티부빌이었다. 마르그리트의 명예와 목숨이 동시에 걸린 이 결투에서 그의 챔피언이 패한다면 그녀는 강렬한 화마 속으로 가라앉을 것이었다.
서로에게 겨눈 두 기사의 창은 그 무엇보다 진실을 향해 있었다. 그 창끝이 향하는 곳에 곧 진실이 만들어질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결투에서 패한 이는 곧 거짓을 고한 이가 되리라.
이제, 세 사람의 운명이 걸린 숨 막히는 결투가 시작된다.
*결정적인 스포일러는 최대한 배제하려고 하였으나, 줄거리에 대한 최소한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전체적인 흐름을 알고 책을 감상하는 것이 이해에 더욱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는 14세기 프랑스의 두 기사 사이에서 벌어졌던 결투에 관한 이야기다. 두 기사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지만, 언제나 그렇듯 시기와 질투는 그 시대에도 우정을 파괴했다. 친구의 성공에 크게 시기한 또 다른 친구는 피해망상 기질을 보이며 나름대로 실력을 증명해 보이고자 원정에 참여하여 전투를 하면서 방황한다.
치열하게 싸워 살아 돌아왔지만, 그의 커리어는 크게 변화가 없었다. 변한 것은 그에게 미모의 어린 아내가 생겼다는 것뿐이었다. 그때만 해도 두 친구의 사이는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나, 오랜 친구가 재회하여 서로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어떤 요소가 영향을 끼쳤는지는 모르지만 두 친구는 서로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친구는 친구의 아내를 만났다.
또 다른 불행은 거기서 시작됐다. 난봉꾼으로 유명했던 친구는 끝내 친구의 아내를 겁탈하는 죄를 저지르게 된다. 가해자가 으레 그렇듯 모든 피해는 피해자의 몫임을 강조하고 떠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피해자가 그에 겁을 먹고 가해자의 죄를 함구하길 바란 모양이었다.
그러나 피해자는 그러지 않았다. 모든 것을 세상에 밝히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은 물론이고, 그렇게 승산이 큰 도전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침묵하지 않았다. 가해자가 저지른 처참한 만행을 고발한 것이다. 피해자의 목소리는 일관되게 가해자의 범행을 말했다.
앞서 말했듯이 피해자에게는 승산이 전혀 없었다. 가해자가 지역 내에서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사의 방향 역시 피해자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이대로라면 가해자의 죄를 입증할 방법이 없어 도리어 피해자가 거짓말쟁이로 몰리게 될 지도 몰랐다.
그때 피해자 측이 제시한 해결책이 결투였다. 그 시대의 결투는 재판의 한 종류로 사용되었다. 규칙은 간단하다. 한 측이 죽을 때까지 결투는 진행되고 이긴 측의 주장이 진실이 된다. 피해자 측은 가해자에게 결투를 제시했다. 만일 피해자 측이 이긴다면 피해자가 고발한 가해자의 만행이 진실이 되고, 가해자가 이긴다면 피해자는 거짓 증언을 한 것으로 간주되어 화형에 처해질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결투가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이다.
공교롭게도 소설을 접하기 전 주, 동유럽에 대한 수업을 들었다. 동유럽에 역사의 흐름을 좇다 보니 전체 유럽의 이야기도 듣게 되었고, 14세기 프랑스의 대략적인 동태와 십자군 전쟁 등을 비롯해 유럽을 덮쳤던 피비린내 어린 전쟁들에 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러한 사전 지식들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 소설은 ‘소설’이라는 단어로 규명할 수 없는 책이다. 저자 에릭 재거는 이 결투의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서 노르망디와 파리를 누비며 사료를 모았다. 그는 거의 모든, 이라고 정의해도 무방한 양의 사료를 모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생생하게 그 결투의 기록을 우리에게 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가의 말에 적힌 ‘나는 언제나 과거에서 들려오는 생생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라는 문장이 이 책을 설명해주고 있다.
에릭 재거는 카르주 가문에 대한 자세한 설명으로 책의 초반부를 시작한다. 카르주 가문에 대한 깊은 이해가 주인공 장 드 카르주에 대한 이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역사적 사실이 나열된 초반부는 다소 지루하다고 느껴질 수 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나 역시 초반부 진도가 영 나가지 않아 꽤나 애를 먹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에릭 재거가 이 사건에 대해 얼마나 많은 조사를 했는지 알 수 있었고, 그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서술들은 마치 유럽의 역사를 눈앞에 펼쳐놓은 듯 자세했다. 사료에 적혀 있지 않은 인물들의 심경과 같은 것은 저자의 상상력에 의존해야 했지만, 저자가 조사한 사료는 역사적 흐름과 사건의 방향을 촘촘하게 구성하고 있어 독자들에게 생생한 현장을 전한다.
그렇기에 전체적인 역사의 흐름을 대략적으로라도 숙지하고 있다면,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를 읽을 때 초반부를 보다 흡입력 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카르주-르그리 결투의 전체적인 발단 정도를 미리 이해하고 있다면 감상의 속도와 이해가 훨씬 빨라질 것이다.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된 이후로는 사건의 결말이 궁금해서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카르주와 르그리라는 인물 자체는 소설의 초반부터 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둘이 벌이는 결투만큼은 무엇보다 흥미로웠다. 두 사람의 결투라기보다는 ‘결투’ 자체가 흥미로웠다. 두 사람의 전투는 그 과정이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들의 복장과 무기, 싸움의 흐름이 정말 생생해서 마치 두 눈으로 결투를 보는 것 같았다.
한때 러시아 소설을 조금 읽었을 때도 항상 의문이었던 것이 있었다. 도대체 결투가 남기는 것이 무엇일까. 왜 결투를 하는 것일까. 그 끝에는 언제나 반반의 확률로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데 과연 무엇을 위해 결투를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그렇게 서로를 죽이고 싶어 할까. 무엇을 위해서 싸우고, 죽이는 것일까.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결투로 사건의 진실을 가린다는 것은, 강한 자에게 진실이 따른다는 말과 같다. 대게는 강한 자가 싸움에서 이기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상대적 약자가 승리하는 결투를 두고 오히려 결투의 결과가 신의 부름을 뜻한다고 믿었다지만, 약한 자가 승리하는 일이 얼마나 있었겠냐는 게 나의 입장이다. 강한 자에게 따르는 진실은 높은 확률로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중세의 유럽에서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결투는 어땠을까. 누가 강자이고, 누가 약자였을까. 그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흥미로웠다. 약자는 질 게 뻔한 결투를 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리고 강자는 불필요한 결투를 무엇을 위해서 했던 걸까.
결투 자체는 추악한 성폭행 사건의 전말을 가리기 위한 것이었다. 한 여성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범죄자는 타당한 죗값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정말 그럴까?
나는 두 기사 중 카르주에게 조금 더 초점을 맞춰보기로 했다. 카르주의 창끝은 무엇을 겨누고 있었을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아내의 무죄를 호소하기 위해 결투에 나섰지만,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에릭 재거의 서술과 사료에 따르면 카르주는 아내와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보이지만 단순히 아내의 비극에 대한 분노만이 그를 결투장으로 인도하진 않은 것 같다.
그는 긴 시간을 피해망상에 찌들어 있었다. 원래 제 것이었어야 할 무언가를 빼앗기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가져야 할 명예가 실추되어왔다고 생각했다. 원래부터 그의 것이었던 많은 것들이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의 아내마저 망가지려고 하고 있었다.
카르주는 이런 상황에서 그의 명예를 되찾고 싶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 그가 거주하던 지역과 프랑스 전역에서 실추되었던 그의 명예, 그리고 억울하게 놓치고 있던 그의 몫을 되찾고 싶었을 것이다. 결투의 결과로 전장을 누비던 기사의 건재함을 증명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게 그의 유일한 자랑거리였으니까. 그러니 비단 사건의 진실만이 그에게 중요한 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소설의 진짜 주인공 마르그리트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마르그리트에게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을 때, 나도 모르게 그에게 일어날 일들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의 남편이 불같이 분노하여 그에게 화를 입힐지도 모른다는 상상과 수치심이라는 잘못된 감정으로 인해 잘못된 선택을 하면 어떡하나 싶은 우려였다. 그러나 그는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한 결정을 내렸다.
사실 그가 당한 비극의 진실을 밝힐 증거가 턱없이 부족했다. 한 마디로 마르그리트는 불리한 입장이었다. 증거에서뿐 아니라 그가 처한 사회적 상황 역시 불리했다. 그럼에도 마르그리트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피해를 주장하며 진실을 바로잡기 위해 애썼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자신의 죽음이 결정될 결투장에서 그녀는 군중들이 정말로 원하는 건 진실이 아니라 자극적인 유혈 사태와 더 많은 죽음뿐이라는 걸 알고 있을 터였다. 그 긴장되는 순간 고독했을 그의 두려움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그의 용기가 모든 것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마르그리트가 용기를 내지 않았으면 결투는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르그리트는 주장을 해보지도 못하고 그저 잔혹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범죄의 피해자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건을 입 밖으로 내었고, 일관된 주장으로 무고함을 주장했기에 상황의 흐름을 바꿀 수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피해자가 내는 목소리의 뒤에는 큰 용기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용기가 헛되지 않게 상황을 바꿀 수 있도록 우리는 언제나 그들에게 귀 기울여야 한다. 피해자들은 사건의 피해자라는 비참한 사실 외에도 많은 것들에 억압당한다. 마치 범죄의 피해가 오롯이 피해자의 책임인 마냥 가해지는 2차 가해, 비탈진 경사로에서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중립 기어 등이 그것이다.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은 영화화되어 최근 10월 20일 개봉했다. 현재는 개봉 후 시간이 좀 지나 서울에 1개, 경기에 2개, 총 3곳의 상영관에서만 상영하고 있다. 맷 데이먼, 아담 드라이버, 조디 코머, 벤 애플렉이 열연을 펼친 동명의 영화 ‘라스트 듀얼-최후의 결투’는 리들리 스콧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소설에서는 전반적인 사건의 흐름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면, 영화는 마르그리트와 카르주, 르그리 세 인물의 시선으로 극이 진행된다.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은 흥미로운 역사적 사건을 사료에 기반해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는 역사 소설이다. 에릭 재거가 들려주는 프랑스의 결투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게 독자를 사로잡고 있다. 유럽의 역사 혹은 결투에 관심이 있는 독자는 분명 흥미로워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초반의 장황한 역사 부분만 무사히 지난다면 충분히 손에 땀을 쥐고 읽을 수 있을만한 매혹적인 범죄 추리극이다.
역사, 특히 중세를 그리고 범죄 추리극을 좋아한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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