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낮과 달
2022년 10월,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제47회 서울독립영화제, 제17회 제주국제영화제, 제18회 제천국제영화제에 공식 초청 상영된 화제의 작품이 찾아온다. 신예 감독 이영아의 장편 데뷔작 <낮과 달>이 바로 그 뜨거운 호평의 주인공이다.
<낮과 달>은 남편과 사별한 후 남편이 그리워했던 제주도에서 살게 된 민희가 그곳에서 요가 강사이자 카페 사장인 이웃집 목하를 만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영화 <혜화, 동>, <용의자>,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의 유다인이 요동치는 파도 같은 마음을 품고 제주도에 온 민희 역을 연기했다. 잔잔한 바다에서 예측하지 못한 파도를 만나게 된 목하 역으로는 <우리 생에 최고의 순간>, <악녀>에 출연하고 <장르만 로맨스>를 통해 연출 데뷔까지 성공적으로 치른 조은지가 열연을 펼쳤다.
또한, <낮과 달>은 <죽여주는 여자>,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야구소녀>, <죄 많은 소녀>, <혼자 사는 사람들>, <파로호> 등 참신한 소재와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품을 연이어 제작한 한국영화아카데미 KAFA의 작품이다. 한국영화아카데미 KAFA는 봉준호, 허진호 등 거장 감독을 여럿 배출해냈기에 <낮과 달>은 영화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제주도의 가을 속에서 유다인과 조은지가 선사하는 유쾌한 이야기 <낮과 달>은 오는 10월 20일 개봉한다.
나는 달을 무척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달은 손톱달이고, 그다음으로 좋아하는 달이 낮달이다. 낮달은 달이 보이지 않는 시간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그 사실만으로도 내게 충분한 안정감을 준다. 그렇기에 <낮과 달>이라는 영화 제목 자체에 끌렸다.
민희는 남편 경치와 사별한 후, 남편이 평소 그리워했던 제주도의 집으로 이사를 온다. 그곳에서 민희는 옆집에 살고 있는 목하를 만나게 된다. 시원시원한 성격의 목하는 민희를 살뜰히 살폈고, 그의 아들 태경 역시 금세 민희와 친해진다. 새로운 곳에서 만난 든든한 동네 이웃과 함께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느낀 민희에게 갑작스러운 비극이 찾아온다.
세상에나. 새로운 친구 목하가 남편의 첫사랑이었단다. 거기다 목하의 아들 태경은 남편의 아들이기도 하다고. (이 놀라운 출생의 비밀은 영화로 확인하길 바란다.) 상실의 아픔은 곧장 분노로 바뀌었다. 경치에 대한 분노와 서러움, 목하에 대한 분노와 원망은 민희의 마음에 폭풍을 치게 만들었다.
목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든 걸 잊고 이제 겨우 평온한 일상을 일구어냈는데, 갑자기 찾아온 민희 때문에 강제로 과거의 애인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새로운 친구였던 두 사람은 한순간에 살벌한 사이로 변해버렸다.
여기까지가 공식적인 영화의 시놉시스이다. 여기까지만 읽었을 때는 <낮과 달>이 상당히 무겁고 어두운 영화일 거라고 생각했다. 남편과의 사별이라는 소재도 무겁지만, 그 남편이 아무래도 무척이나 오래 사랑한 것 같은 첫사랑과의 만남이, 그리고 오래전 헤어진 연인의 아내의 만남이 그리 유쾌한 상황은 아니지 않은가. 제주도의 가을 풍경이 그 무거움에 쓸쓸함을 더해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영화의 시작 전 무대인사에서 만난 배우들은 모두 이 영화를 귀엽고 사랑스러운 영화라고 표현했다. 어떻게 남편과의 사별, 연적과의 만남을 귀엽고 사랑스럽게 그려냈다는 건가 싶었다. 아리송한 마음과 함께 극장이 어두워지고 스크린이 밝아졌다.
1시간 반이 조금 넘는 러닝타임이 지나고서야 나는 왜 배우들이 <낮과 달>을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말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 영화의 모든 것들이 따뜻하고도 사랑스러웠다.
우선, 쓸쓸할 거라고 생각했던 가을의 제주 풍경이 너무도 따스하고 아름다웠다. 무게감이 느껴질 것 같던 파도는 시원하기 그지없었고, 외로울 것만 같던 바람은 관객석까지 시원하게 불어오는 듯했다. 바스락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캠핑장의 낙엽과 정겨운 돌담, 심지어는 내리는 비까지 제주의 가을은 한없이 따스했다.
그 제주 속에서 숨 쉬는 등장인물들은 전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제주도에서 굳건하게 뿌리를 내린 채 살아가는 목하의 싱그러운 웃음이 좋았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착실히 해나가는 태경의 목소리가 예뻤다. 민희를 살뜰히 살피던 경치의 친구 유안이 따뜻했다. 그리고, 제주도에 도착한 이후로 한순간도 빠짐없이 감정에 솔직했던 민희가 사랑스러웠다.
솔직히 말하면, 영화를 보는 내내 혹은 영화가 끝나고 민희가 보여준 모습에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다. 민희가 상식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민희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영화에서 직접 확인해보길 바란다. 내가 극장에서 영화를 봤을 때, 여러 관객들이 민희의 행동에 웃음을 터뜨리거나 한숨을 쉬었고, 나 역시 민희의 몇 번이나 약간 곤란한 웃음을 지었으니까. 하지만 영화는 민희의 행동과 감정을 귀엽고 사랑스럽게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관객들이 그에 인상을 찌푸리는 게 아니라 귀엽다고 웃어줄 수 있도록.
그렇게 영화의 따사롭고 귀여운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무거운 주제를 이렇게 유쾌하고 따뜻하게 그려낼 수 있다니.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영화의 따스한 요소들과 절대 그럴 수 없는 소재가 만들어내는 이 괴리감이 <낮과 달>의 가장 큰 특징이자 진입 장벽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조화는 분명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나에겐 조금 더 길고 진한 여운으로 남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없이 무겁기만 했다면 분명 영화를 다시 떠올리기 힘들 정도의 감정 소모를 필요로 했을 테니까.
이 영화에서 인상 깊었던 점은 등장인물들이 놀라울 정도로 감정에 솔직하다는 것이다. 태경은 물론이고, 민희와 목하는 정말로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민희는 죽은 경치를 그리워한다. 그리고 또 경치 때문에 묵묵히 눈물을 삼켜내야 했던 때를 회상하면서 원망한다. 그러다가 경치가 바라봤을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그에게 미안해하기도 한다.
민희는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을 마주한 후 소중히 걸어두었던 경치의 옷을 전부 던져버린다거나, 독한 술을 들이킨다거나, 냅다 돌담의 돌을 빼버리는 등의 모습을 통해 착잡한 분노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심지어 곧바로 목하를 찾아가 그와 경치의 관계에 대해 대놓고 묻는다. 사진에 앙큼한 장난을 쳐 목하의 속을 뒤집어놓기도 하고, 목하에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마음껏 울어본 적 있냐는 목하의 질문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목하 역시 민희 못지않게 솔직하다. 갑자기 나타나 경치의 이야기를 묻는 민희에게 목하는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는다. 제게 화내는 민희에게 퉁명스럽게 말하거나, 얼굴을 찌푸리기도 한다. 민희와 경치의 결혼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하고 민희에게 빈정대기도 하면서 목하는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 민희의 억지를 어느 정도 받아주는 것 같다가도 당신은 모든 걸 가지지 않았느냐는 민희의 말 한 마디에 버럭 화를 내기도 한다.
미혼모가 아닌 ‘비혼모’임을 민희에게 강조하던 목하는 어떤 시간을 견뎌야 했을까.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했던 것은 목하도 같은 상황이었을 텐데. 오랜 시간을 태경에게 비밀 하나를 간직하고 살아야 했던 답답함을 풀어내기라도 하듯 목하는 솔직하게 민희를 대한다.
처음에는 이들의 솔직함에 당황했다. 답답하게 혼자서 비밀을 마음에 품어두고 속을 썩인다거나, 계략을 꾸미는 게 아니라 저렇게 서로에게 다 뱉어내도 되나? 저래도 되나 싶었던 것들이 당사자들에게는 괜찮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이건 민희와 목하 두 사람이 해결할 문제지 제 3자인 관객이 상관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이 영화의 끝에서 두 사람이 어떤 결말을 만들어내는지가 점점 더 궁금해졌다.
역시 서로의 솔직함이 통했던 것인지, 그들은 나름대로 각자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을 내린 듯했다. 그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역시 극장에서 직접 확인하길 바란다. 팔씨름으로 승부를 가리기 위해 맞잡았던 두 사람의 손이 여전히 힘을 겨루고 있을지, 아니면 서로를 토닥여주고 있을지 궁금하지 않은가? 나는 그랬다. 그리고 그 선택에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분명 여러분도 그럴 것이다. 분명 솔직한 두 사람의 이야기에 몰입할 것이고, 그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궁금해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이 어떤 결론을 마주했든 그건 민희와 목하의 선택임을 꼭 기억하길 바란다. 그 선택을 받아들이는 건 민희와 목하 두 사람이지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이 느꼈을 상실과 절망의 크기를 우리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렇기에 무엇이 그들의 파도를 잠재우고 다시 잔잔한 수면으로 이끌었을지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그들을 지켜볼 수 있을 뿐이다. 마치 낮달처럼.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디서 나오는가.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질문의 답을 고민했다. 사람을, 시간을, 물건을, 또는 어떠한 생명을 그리워하는 작고도 큰 마음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나 역시 다시 내게 절대 돌아올 수 없는 무언가를 사무치게 그리워해 본 적이 있기에 더욱 그 답을 찾고 싶었다.
영화 <낮과 달>이, 그리고 낮달이 바로 그에 대한 작은 해답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 목하는 민하에게 낮달은 낮에도 그 자리에 떠 있음을 알려주며 경치가 항상 같은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말한다. 목하에게도 민희에게도 경치는 낮달 같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민희는 열심히 달려봐도 여전히 제 머리 위에 머물러 있는 낮달을 보고 깊은 생각에 잠긴다. 아마도 경치를 떠올린 것이겠지.
우리도 각자의 낮달을 가지고 있다. 언제나 우리의 낮에 떠 있는 달이 하나씩 있다.
<낮과 달>은 내년 가을에도 생각날 것만 같다. 낮달처럼 매번 내 마음속 같은 자리에 있을 것 같다. 아주 무겁지 않게, 그렇다고 아주 가볍지만도 않게. <낮과 달>을 보려고 한다면 부디 애써 무거워진 마음은 덜어내고 편한 마음으로 감상하길. 웃음이 나오면 웃고, 한숨이 나오면 한숨을 쉬고, 짜증이 난다면 짜증을 내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게 된다면 사색하라. 무언가 더하고 덜할 필요도 없이 영화가 전하는 감정 그대로를 느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이 리뷰를 읽고 있다면 이 영화를 꼭 가을이 지나기 전에 봤으면 좋겠다. 더 추워지기 전에 말이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와서 선선한 가을바람을 코끝으로 느끼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자. 낮이라면 낮달을 볼 수 있을 것이고, 밤이라면 몇 시간 전에도 여전히 하늘에 떠 있었을 달을 볼 수 있겠지. 그러고 나면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꼭 고개를 들어 낮달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꼭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 이라는 노래를 꼭 들어보길 바란다. 가사를 곱씹으면서 민희와 목하를 떠올려보면, 그들의 맞잡은 손이 조금은 이해가 될지도 모르니까.
<낮과 달>은 오는 10월 20일부터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하나 둘 추억이 떠오르면 많이 많이 그리워할 거야. 고마웠어요. 하지만 이제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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