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 小王(시아오왕)
“너를 이제 아무 때나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섭섭하고 슬퍼서 눈물을 멈출 수가 없어.”
“울지 마, 시아오왕... 금방 다시 올게”
나의 작은 시아오왕은 한참을 내 품에 안겨 어린아이처럼 엉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정 많은 시아오왕은 어느새 나를 그녀의 마음 깊숙이 담았나 보다.
그녀가 이토록 서럽게 울만큼 내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었기에 …….
함께 있을 때 더 잘해주지 못한 미안함만 가득했다.
중국에서의 생활을 끝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나와의 헤어짐을 마음 아파하며,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던 순박한 그녀의 갈색 눈동자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녀는 남자 친구를 따라 고향인 하남성을 떠나 돈을 벌기 위하여 대도시 북경에 왔다. 시아오왕은 나와 친한 중국 아줌마의 집안일을 거들어주고 있었고 아줌마의 소개로 다른 몇몇 집의 집안일을 해주며 돈을 벌었다. 내가 아줌마의 집에 놀러가는 날에는 시아오왕은 분주히 집안일을 하느라 늘 바빴다.
북경이 익숙해질 무렵 갑자기 SARS사스가 발생하였다. 사스의 위험을 피하여 여느 한국 유학생들처럼 나도 한국으로 일시 귀국을 해야 했고, 중국이 정상을 되찾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다시 북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직 학교는 봉쇄되어 있어 내가 적당한 집을 찾기 전까지 친한 중국 아줌마의 배려로 아줌마가 여행 가고 없는 빈집에 혼자 살게 되었다.
나 홀로 빈집에 있는 것이 걱정되었던 중국 아줌마는 시아오왕에게 부탁하여 나를 이것저것 챙겨주라고 하였다. 시아오왕은 집안 정리를 다 하고 나면 내가 좋아하는 토마토 계란 볶음을 만들어줬고 내가 그녀가 만든 음식을 먹는 동안 나에게 여러 가지를 질문했다. 한국에서 부모님은 뭘 하시는지, 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한국의 시어머니는 정말 며느리에게 매서운지, 한국 남자들이 드라마에서처럼 가부장적인지 궁금한 것이 많았다. 밤에 혼자 자는 것이 무서운 날에는 시아오왕을 졸라 같이 자면서 시아오왕의 고향 이야기, 나의 한국 이야기를 하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시골 생활만 하느라 이국적인 음식을 접해보지 못했다는 시아오왕을 일식 뷔페에 데리고 가고 싶었다. 중국은 해산물 요리가 특히 비쌌기 때문에 시아오왕의 큰 눈이 휘동그레 지면서 내가 그런 귀한 음식을 먹어도 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고 극구 사양을 하였다. 일식 뷔페가 귀한 음식도 아닐뿐더러 음식은 맛있게 먹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은 누구나 먹을 자격이 충분하니 오늘은 나를 돌봐주고 있는 너에게 내가 한턱 쏘겠다고 시아오왕을 끌고 일식 뷔페에 갔다. 시아오왕은 난생처음 먹어보는 초밥을 야무지게 잘도 먹었다. 입이 터져라 초밥을 밀어 넣으며 함박웃음을 터트리는 그녀의 모습이 유난히 천진난만해 보였다.
중국 아줌마의 집에서 안전하게 한 달을 머물고 학교 앞에 적당한 거처를 마련하였다. 이사 후 집을 정돈하고 시아오왕과 그녀의 남자 친구를 집으로 초대했다. 요리가 능숙지 않았던 나를 위하여 그들은 음식 재료를 사 가지고 와서 풍성의 의미로 생선 요리를 만들어 같이 나눠 먹고 밥을 다 먹고 난 후 만두를 한가득 만들어 내가 배고플 때마다 냉동실에서 꺼내 먹을 수 있도록 얼려 놓고 갔다. 간혹 일을 안 하는 주말이 되면 집으로 놀러 와 어지럽혀진 방을 같이 청소하고 한국 드라마를 보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 중국에서는 생선의 중국어 발음인 鱼yú가 넉넉하다 뜻의 余yú와 발음이 같아서 손님 초대 시에 풍성하고 넉넉해지라는 의미로 생선 요리를 준비하여 내놓는다.
하루는 결혼식을 생략하고 혼인신고를 했다는 그들의 보금자리에 놀러 갔다. 환하게 웃는 시아오왕의 화사한 미소와 대조적으로 두 사람이 양팔을 벌리면 닿는 벽 , 딱딱한 나무 침대와 낡은 부엌살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날 저녁 집으로 돌아와 내가 혼자서 누리고 있는 내 방의 호사로움이 꽤나 부담스러웠고 마음은 무거웠다.
그녀는 나와 같은 나이다. 그녀는 하루 종일 힘들게 남의 집안일을 해주고도 매우 적은 돈을 벌었지만 아주 열심히 정직하고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았다. 사실 그녀의 꿈은 미용 기술을 배워 미용실을 차리는 것이었는데 그녀가 생각하기에 꿈을 도전하기에는 나이도 많았고 기술을 배울 돈도 부족했다. 배움도 짧고 막상 다른 기술도 없는 시아오왕이 할 수 있는 일은 남의 집안일을 하는 것 뿐이었다. 아직 젊은 시아오왕이 하루 종일 힘든 일을 하지 않아도 돈이 되는 기술을 배워 안락하게 편히 지낼 수 있는 공간을 어서 빨리 마련했으면 싶었다.
몇 해 전 시아오왕을 북경에서 만났다. 이십 대였던 우리는 사십 대가 되었고 서로의 얼굴에서 보이는 조글조글한 주름을 안쓰럽게 살폈다. 앳됐던 시아오왕은 어느새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시아오왕은 북경에 남아 입주 베이비시터를 하며 돈을 벌고 있었고, 그녀의 남편은 세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에 내려가 작은 식당을 열었다. 시아오왕은 내가 가족들을 데리고 북경에 온 것을 참으로 기뻐하고 나를 닮은 첫째를 유난히 예뻐했다.
긴 시간을 낼 수 없었던 그녀와 짧은 만남 후 헤어진 그날 밤에 문자를 보냈다.
“시아오왕, 우리가 다시 만나기까지 십 년이 넘게 걸렸구나. 오늘 널 보니 진짜 기분 좋다”
“네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정말 안심이 되고 참 기쁘다. 다음 생애에는 부자 남편을 만나 내 아이들을 직접 키우면서 살면 소원이 없겠다.”
나의 북경 가족여행이 혹여나 그녀를 쓸쓸하게 한 것은 아닌지 그저 미안할 뿐이었다.
시아오왕은 몇 년 뒤 소원대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아이들 곁으로, 남편의 곁으로……
그러나 그녀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다. 시아오왕의 남편이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해 두세 살 아이의 지능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열심히 일하고 노력했지만 삶은 그녀에게 모질었다.
하루하루 녹록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그녀지만 명절에, 해가 바뀔 때 그녀는 나에게 먼저 연락을 한다. 건강 잘 챙기고, 스트레스 받지 말고, 사는 게 힘들지만 그래도 좋은 날이 온다고. 힘내라고! 내 걱정을 하며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시아오왕이다. 모든 것을 다 품어줄 수 있는 넉넉한 그녀이기에 그녀의 삶은 고단한 걸까?
오늘 하루도 그녀가 평범한 의식주 해결을 위하여 얼마나 분주하게 움직였을지, 얼마나 힘든 하루를 살아냈을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가녀린 시아오왕의 어깨에 짊어진 십자가의 무게가 무거워 보인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는 니체의 말처럼 그녀는 왜 살아가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 힘든 현실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씩씩하고 지혜롭게 살고 있는 그녀가 대견하다. 아무쪼록 그녀가 어린 세 아이들을 평안하게 잘 키울 수 있도록 한줄기 따사로운 삶의 빛이 어서 빨리 그녀에게 반짝이면 좋겠다.
이 글이 그녀보다 내가 좀 더 편한 세상에 있다는 나의 위로와 동정이 아니기를......
시아오왕, 진심으로 너를 존경한다.
항상 응원할께, 加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