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앙커플의 얘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기독교적 관점에서 쓴 글이므로 원치 않으시면 뒤로 가기 눌러주세요).
미정은 구씨에게 '나를 추앙하라'고 합니다. 사랑 가지고는 안 된다면서. 그 말을 듣고 구씨가 추앙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여기에서 worship이라는 단어가 또렷하게 나오는 것을 보고 저는 전율했네요.
worship은 크리스천이라면 매우 친숙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배를 말하죠.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사랑은 결국 그가 지으신 인간,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유일한 율법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율법을 완성하셨고요.
미정이 구씨에게 원하는 추앙은 그런 성경적인 사랑,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지지입니다. 사실 이것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부모로부터 받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미정은 한 번도 채워지지 않았죠. 그래서 그냥 사랑 가지고는 안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냥 사랑은, 처음에는 채워줄 것처럼 굴다가 결국은 개새끼가 되어 끝나버리는 미정 구남친들의 사랑, '이 놈 별 거 없네' 하는 눈빛을 보내면서 헤어질 꼬투리를 잡는, 끌어야 하는 유모차가 있는 창희 전 여친들의 사랑, 처음에는 설렘을 주다가 나중에는 이리저리 재면서 피곤하게 만드는 박준우(기정 회사 로또남) 여친들의 사랑일 것입니다.
하지만 구씨는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15년간 밤의 세계에서 술취한 인간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탐욕과 폭력, 배신 속에서 누구도 믿지 못하고, 안식을 누리지도 못하고 살았던 그는 사람이라면 진절머리가 납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지요. 제호가 하루종일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성격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제호하고 일하지 않았을 거에요. 사람 말을 듣기도 싫고, 대답할 말을 생각하기도 싫거든요(그래도 어두운 밤길에서 소주병 부딪히는 소리를 내면서 미정을 안심시켜주는 정도의 친절은 가지고 있지만요).
구씨는 거절하면서 말합니다. "너는? 너는 누구 채워준 적 있어?" 그래서 미정은 결심합니다. 먼저 채워주기로요. 좋아하는 것 같아도 다 불편한 구석이 있어서 실제론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용히 지쳐가는 대신 다르게 살기로 합니다. 상대방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거에 덩달아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고, 그냥 쭉 좋아하는 것,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기로 하지요.
미정이 이렇게 결심한 것은 구씨가 특별한 존재라서가 아닙니다. 한 번도 채워지지 못했고, 그냥 두면 위험할 것 같은 사람이 눈 앞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정의 말을 빌면 '아무나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러니하지만 미정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딱히 선한 의도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미정에게는 삶이 큰 가치가 없어요. 그러니 그냥 이렇게 계속 살 바에야 한 번 다르게 살아보자고 눈 앞에 있는,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르는 알콜중독자를 사랑할 결심을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아무나 사랑하겠다고 외치는 기정은 그렇게 못하지요. 자기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기 때문입니다(이것은 '내려놓음'으로 이어지지만 말이 길어지므로 생략하겠습니다).
그런데 미정의, 딱히 선하다고 볼 수 없는 그 의도가 구씨를 변화시킵니다. 이것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는 말씀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구씨는 비오는 밤에 술취한 자신을 걱정해서 달려온 미정을 봅니다. 그 조건없는 애정에 구씨는 상처입은 발로 멀리뛰기를 도약하면서 변화할 의지를 보입니다. 추앙커플의 탄생이지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 뿐입니다. 창희가 구씨 허락도 없이 집에 들어가 소주병을 치웠을 때 미정이 말합니다. "인간을 갱생시키겠다는 의도가 너무 오만해." 이것은 현대 크리스천들이 주의깊게 들어야 하는 대목입니다. 불신자를 전도하면서 상대를 나보다 못한 사람으로 여기고 가르치려고 하는 태도는 오만이에요.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고전 13:4)"라고 말씀하셨는데 무례하게 행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가르침은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거든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그를 사랑으로 섬길 때에만 변화는 일어납니다.
미정이 구씨를 추앙하기로 결심한 의도는 그다지 선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죠. 창희가 소주병을 치우는 의도는 구씨를 돕겠다는 선한 것입니다. 앞서 제호의 얘기에서 봤듯이 인간의 선한 의도가 선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선하지 않은 의도도 선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느냐' 중요한 것은 그것 뿐입니다. 미정의 행위는 본인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실천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구씨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었어요. 하나님은 그닥 선하지 않은 의도뿐만 아니라 인간의 실수, 죄와 같은 악한 것도, 그가 그것을 하나님께 올려드릴 때 선하게 바꾸실 수 있습니다.
구씨가 추앙하기로 하면서 가짜로 말해도 되냐고 했을 때 미정이 대답하죠. "말하는 순간 진짜가 될 텐데." 저는 여기서 두 번째 전율했어요. 말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하나님은 말씀 그 자체이시며,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어요. 말은 그만큼 힘이 있습니다.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말은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미정은 극 중에서 그 자신이 해방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예수님을 표상합니다. 그래서 미정이 말 안에는 진리가 있습니다(작가는 "미정이 말은 귀해"라는 현아의 대사를 통해 초반부터 그것을 확증합니다).
나중에 구씨의 직업이 호빠 출신 조폭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많은 사람들이 실망했는데요. 구씨가 다른 무엇도 아닌 호빠 출신인 것은 인물의 상징에 비추어볼 때 매우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친구들은 세리와 창녀들이었으니까요. 구씨의 직업은 그 두 가지 특징을 다 겸하고 있죠(그 와중에 작가는 시청자들을 배려해서 구씨가 호빠 선수를 2주만에 때려치운 것으로 설정했죠). 미정과 구씨의 관계에서 미정은 예수님 같은 구원자의 역할을 합니다. 지하철에서 앙칼진 목소리로 "내리라구!" 외친 소리에 구씨는 자다 깨서 당미역에 잘못 내림으로써 목숨을 구했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연애드라마처럼 '운명적인 연인'의 복선이 아니라 미정이 구씨의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제가 전체 드라마를 통틀어 가장 전율한 장면이 있는데요. 술에 취한 구씨가 개들에게 소시지를 던져주려다가 공격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미정이 나타나서 구해줍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술에 취한 구씨는 앞서서 비틀비틀 걸어가고, 뒤에서 미정은 막대기를 들고 구씨의 안위를 지키며 따라가지요. 이것은 이 말씀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1, 4)
중동 지역에서 목자가 양을 이끌 때, 양의 앞이나 옆이 아니라 뒤에서 지키면서 간다고 합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사망의 골짜기를 걷고 있는 것 같을 때, 그런데 내 눈 앞에 하나님이 보이시지 않아 절망스러울 때 그는 내 뒤에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안위하고 계십니다.
구씨가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했을 때 미정은 화를 내는 대신 서운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살 당신을 업어주고 싶다"고 말하죠. 저는 이 장면에서 또 한 번 전율했어요. 미정은 구씨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요. 그것은 미정 자신에게도 결핍된 것이니까요. 이 둘은 동류입니다. 그것도 1대 다수의 세계에서 늘 1이었다가 이제 겨우 서로를 만나서 2가 된 사람들이죠. 그래서 이들은 살아있는 한 서로를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아기를 보고 미정을 떠올린 구씨는 2년 동안 꾹꾹 눌러왔던 마음을 터트리면서 미정을 찾아가게 됩니다.
한편 구씨가 떠난 뒤 미정은 구씨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구씨는 성역으로 정했으니까요. 구씨가 미워질 때 대신 전남친을 욕하면서 미정은 구씨가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기를, 숙취로 고생하는 날이 하루도 없기를 기도합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 5:39)"라는 말씀이 생각난 순간이었어요.
원망하고 미워하는 대신 용서하고 축복하는 미정은 "그래서 내가 힘이 없는 거야. 누군가의 형편없음을 증명하기 위한 존재로 나를 세워놨으니까..." 라고 말함으로써 증오보다 용서가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구씨에게 아침마다 찾아오는 사람을 환대(용서)하라고 말하죠. 그 말에 힘입어 구씨는 자기를 배신한 현진형에게 '환대할 테니까 살아서 보자'라고 말합니다. 타인에 대한 증오와 죄책감으로 술 없이 지낼 수 없었던 구씨가 용서를 통해 중독에서 해방될 가능성이 보인 순간입니다.
미정이 구씨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또한 구씨가 특별히 용서받을 수 있는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그냥 미정의 결단이죠. 용서는 내가, 상대가 특별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엔가 미정의 입에서 "내 힘으로 하는 게 아니더라"는 대사가 나와요. 딱 용서를 꼬집어서 말한 건 아니지만, 그 말을 듣고 이 구절이 생각나더군요.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시편 37:5)"
마지막 결말이 인상적이었는데요. 구씨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용서한 미정은 결국 그 사랑으로 자신이 해방됩니다. 자기 자신이 형편없는 인간인 것을 타인에게 들킬까봐 전전긍긍하던 미정이 "나 미쳤나봐. 내가 너무 사랑스러워.... 마음에 사랑 밖에 없어. 그래서 느낄 게 사랑밖에 없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한 의문에서 해방되지요. 성경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미정과 구씨가 산포에서 사귀던 시절, 둘이 갈대밭을 헤치며 걸어갈 때 미정이 말합니다(이 갈대밭 씬 전후로는 미정과 구씨의 멜로라인인데, 유독 갈대밭을 걸을 때에만 미정과 구씨는 따로따로 걷고, 길이 마치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게길게 이어집니다. 존재가치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어두운 밤처럼 긴 인생을 헤쳐나가는 인간의 여정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난 궁금한 건 하나밖에 없었어.
나 뭐에요?
나 왜 여기 있어요?
91년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고 50년 후면 존재하지 않을 건데
이전에도 존재했고 이후에도 존재할 것 같은 느낌
내가 영원할 것 같은 느낌"
이 대사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보여줍니다. 인간은 영생하는 존재입니다. 흔히 천국 가는 것을 영원히 사는 걸로 혼동하는데, 우리는 천국을 가든 지옥을 가든 관계 없이 영원히 삽니다. 육신은 스러져도 영은 남거든요. 천국의 핵심은 영생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와 더불어 영원히 사느냐, 하나님을 피해 죄 가운데서 영원히 사느냐가 천국과 지옥의 차이지요.*
"그런 느낌에 시달리면서도 마음이 어느 한 군데도, 한 번도 안착한 적이 없어."
이것은 인간이 원래 하나님과 연합하도록 지음받았는데, 죄의 결과로 하나님과 분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앞서서 제호 부부가 자식들에게 필요한 사랑과 지지를 주지 못해서 자식들이 불안정애착이 되었다고 했죠. 하지만 사실 부모역할을 하다 보면 자식에게 안정적 사랑을 주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실 거에요.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의 애착입니다. 크고 힘있고 전능한 존재가 나를 보호해 주는 것, 나를 귀하게 대해주는 것, 나와 늘 함께 하고 나를 사랑해 주는 안정감과 충족감은 하나님과의 애착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특히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된 소식입니다. 비록 육신의 부모가 내게 온전한 사랑을 주지 못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서 그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애초의 부모의 사랑의 원형은 하나님의 사랑이니까요.
"죽어서 가는 천국따위 필요 없어. 살아서 천국을 볼 거야."
살아서 천국을 보는 유일한 방법은 위의 요한일서 말씀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결국 미정은 먼저 구씨를 추앙함으로써 자기 자신까지 사랑하게 되어 해방됩니다. 천국은 살아생전 고행하면서 참다가 죽어서 맛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 이 땅에서 실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2)"
그럼 우리는 어떻게 천국을 침노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서로 사랑함으로써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의아하시겠죠. 크리스천이라고 다들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는 것 같지 않던데? 서로 사랑하기는커녕 헐뜯고 미워하고 죄 지으면서 살던데?나는 크리스천이지만 삶의 문제들은 여전하고 오히려 주일예배니 헌금이니 하는 의무만 지게 되던데? 의문이 드실 수 있어요.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어요. 그 성령님을 의지하시면 됩니다.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고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살면, 신앙이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 됩니다.
최근 일인데요. 몇 년 전에 제게 큰 잘못을 한 사람이 있었어요. 저는 그 때부터 줄곧 그를 미워했습니다. 가끔씩머릿속에 떠오를 때마다 하나님이 저 사람을 벌하시기를 기도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용서하라는 마음을 주셨어요. 저는 매우 화를 냈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이 어떻게 했는지 다 아시면서 벌을 주시기는커녕 어떻게 용서하라고 말씀하세요?왜 저한테만 그러세요?" 하루종일 씩씩거렸죠. 그리고 분이 좀 가라앉은 다음 이렇게 두 마디 기도하고 잠들었습니다
- 제 뜻대로 말고 하나님 뜻대로 하세요.
- 성령님께 이 문제를 온전히 맡깁니다. 성령님께서 해 주세요.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신기하게도 어제의 분노는 사라지고, 굳이 미워할 필요 뭐 있나... 싶었어요. '에휴 그냥 용서하자.' 맘 먹고났더니 평온했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화를 낸 대상은 현재의 그가 아니라 과거의 그였다는 것, 저는 그를 미워함으로써 그 때로부터 한발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를 미워할 때에는 그 존재가 크게 느껴지면서 저를 누르고 있었는데, 용서함으로써 자유해지고 나자 그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더라구요.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고 제 힘으로 용서하려 했더라면 지난한 정신적 싸움에 지쳤을 거에요.
여기까지 제 입장에서의 드라마 감상평이었습니다. 저는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고 싶기 때문에' 제 해석이 맞다고 주장할 마음은 없습니다. ^^ 다른 분들은 이 드라마를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하네요. 혹시 여유가 된다면 못다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