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재의 하루 2020.11.22
오랜만에 글을 쓴다. 2주 동안 파리를 떠나 연극 작업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만의 공간에서 딱 자리 잡고 앉아 노트북으로 글을 써야 하는데 전혀 그럴 수 없는 환경이었다. 가끔 전원이 켜지지도 않고 이미 자판 몇 개가 떨어져 나간 이 허약한 노트북을 들고 여행을 간다는 건 상상할 수가 없다. 휴대폰으로 글을 쓰자니 글 쓰는 맛도 안 나고. 그래서 잠시 글쓰기를 멈췄다. 생각들은 점점 쌓여가는데 답답한 마음을 다 풀어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뭐 견딜만했다. 파리로 돌아가면 다시 신명 나게 글을 쓸 수 있으니깐.
첫 주는 프랑스 서쪽 시골에 갔다. 건물에 인터넷 신호가 안 잡혀 오랜만에 유튜브를 보지 않고 고요한 밤을 보냈고 아침을 바람 소리, 새소리와 함께 시작했다. 숙소에서 조금만 걸으면 들판에 있는 소를 볼 수 있고 또 조금만 걸으면 광활한 바다를 볼 수 있는, 예술 활동을 하기에 최적의 공간이었다. 잘 먹고 잘 자고 작업인 듯 휴양인 듯 휴양 같은 작업.
둘째 주는 파리보다 더 북쪽, 벨기에와 가까운 도시 릴로 갔다. 릴은 사람들이 친절하고 도시가 예쁘지만, 파리보다 해가 없고 비가 자주 내리기로 악명 높은 곳이다. 6일 동안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생존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햇볕이 그리웠다. 고마워 비타민D. 네가 없었다면 내가 견딜 수 있었을까? 물론 비타민D가 없었더라도 같이 작업했던 친구들 덕분에 견딜 수 있었을 거다. 작업 방식이나 연기 스타일이 나와 너무 다른 두 친구. 이번에 작업하면서 나의 부족함이 너무 많이 드러났고, 친구들의 깊은 이해심과 비교되는 나의 쪼잔함에 나 스스로에게 실망하기도 했다. 괜찮다며 토닥토닥 다독여주고 나를 위로해주는 친구들. 그러면서도 '근데 그건 네가 잘못한 거야'라고 꼭 짚고 넘어가는 녀석들. 거 참.
학교가 끝나자마자 다양한 작업을 해볼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하다. 언제나 그렇듯 창작을 한다는 것은 고생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라 매 순간 기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런 어려운 일을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11월에 하는 모든 연극 작업들은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관객을 만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작업은 누구보다 나를 위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2년 동안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하나씩 꺼내보고 다시 경험한다고 말해야 할까? 학교 시스템이 워낙 정신없고 빠르기도 했지만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이해하는데 특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나로서는 천천히 다시 해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주 동안 파리를 떠나 작업을 하면서 먹은 것들을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나도 다시, 소화하는 시간을 좀 가졌다.
내일부터는 한국에 연극팀과 화상으로 장면 연습을 시작하고 파리에서 다시 일주일간 작업을 한다. 여러 감정과 생각이 밀려온다. 열심히 살고 있는 나 자신을 향한 대견함, 그리고 매번 모든 걸 잘 해내고 싶은 욕심 때문에 나 자신을 몰아세워 안타깝기도 하고, 너무나 당연하지만 매번 반복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렇지만 또 푹 자고 나면 괜찮아진다는 걸 아니깐 그냥 넘어가자는 생각. 그러므로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