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귀를 기울이면'을 봤습니다. 영화 자체를 감히 평가하자면 '아름다운 영화'였습니다. 영화에게 일상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힘이 있더군요. 분명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야경, 가로수, 전철, 그리고 학교인데 상상 속의 존재인 듯 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일본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 생겼습니다.
저는 그 힘이 '희망'에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 '스키시마 스즈쿠'와 '아마사와 세이지'는 꿈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스즈쿠는 글을 쓰는 작가, 세이지는 바이올린 제작 장인을 꿈꾸죠. 이들만이 꿈을 향해 가고 있지 않습니다. 스즈쿠의 어머니도 못했던 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스즈쿠의 언니는 거창한 꿈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자신의 원했던 독립을 이뤄냅니다. 영화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희망은 세상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드는 렌즈입니다.
영화를 한 마디로 나타내자면 '아름다움'입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노트북은 검은색 화면으로 바뀌고 제 얼굴이 비춰졌습니다. 갑자기 씁쓸하더라고요. 이 영화, 뭔가 개운치 않았습니다. 그 원인을 오랜 시간 고민했고 결국은 찾아냈습니다. 바로 '꿈'이라는 존재가 이제는 영화의 판타지로 삼기조차 너무 버겁다는 데 있었습니다.
20대 후반이 된 스즈쿠와 세이지를 만나는 상상해봤습니다. 참고로 저는 일본 사회엔 살아보지 않았으니 한국 사회에 사는 스즈쿠와 세이지로 전제하겠습니다. 일단 예술을 택한 그들은 엄청난 생활고에 시달릴 겁니다. 스즈쿠는 당장 생활비를 위해 아르바이트에 전념합니다. 아르바이트를 마친 후 힘든 몸을 이끌고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죠. 잠깐 머리를 식히는 셈치고 스마트폰을 봤더니 세상에, 손모씨라는 사람이 표절로 수많은 문학상을 타왔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무얼했나라는 생각에 스즈쿠는 김이 빠집니다. 표절도 못 알아보는 심사위원의 눈에 들기 위해 그토록 노력해왔나 싶습니다. 그를 무너트리는 건 빈곤한 생활도 아닌 무력해지는 '꿈'입니다.
세이지는 그나마 낫겠네요. 부모님이 중학생 신분 때 이탈리아 유학을 보내줄 정도로 여유가 있으니까요. 그는 이탈리아 크레모나에서 열심히 공부에 매진합니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바이올린 괴물들이 넘쳐나네요. 생각지도 못했던 한국인이 이탈리아 현악기 제작 콩쿠르에서 우승합니다. 우승을 못했단 자신에 대한 실망감에 집에 와 눕습니다. 그런데 유튜브를 보다 보니 유학 간 사람들이 만든 브이로그가 꽤나 인기입니다. 이탈리아 멋있는 곳으로 가서 뭘 먹고 놀기만 해도 조회수가 나오고 광고가 붙네요. 세이지는 고민합니다. "나도 유튜버나 할까?" 꿈이 허무하게 바뀌는 순간입니다.
글을 쓰겠다는 스즈쿠의 꿈이 쉽게 이뤄질까요?
너무 염세적으로 그들의 미래를 그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기시감이 들 정도로 우리 인생의 패턴과 유사합니다. 20대 후반이 된 스즈쿠와 세이지는 행복할까요? 그들은 '하면 된다' 정신으로 20대 후반까지 달려왔는데 이 길이 맞는지 몇 번이고 돌아보지 않았을까요? 그 돌아보는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모두들 공감할 수 있을 겁니다.
긍정성의 폭력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에서 긍정성이 얼마나 무서운지 경고합니다. 긍정성 과잉, 쉽게 말하자면 '하면 된다' 정신이 세상에 팽배해지면 폭력은 내 안에서부터 생기기 시작합니다. 남탓을 할 수 없기 때문이죠. 부정적 타자로부터 폭력이 오는 게 아닌 시스템에서 폭력이 다가옵니다. 영화 '귀를 기울이면'에서도 이에 대해 경고합니다. 작가가 되겠다는 스즈쿠에게 아버지는 근심하며 말합니다. "남과 다른 방식의 삶을 사는 건 힘들단다. 왜냐하면 남탓을 할 수 없거든."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 긍정성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려줬다.
한국 사회는 그 어떤 곳보다 긍정성을 긍정합니다. 개인의 노력과 시스템의 공정성만 갖춰지면 위로 올라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나도 많은 청년들이 긍정성의 폭력에 시달렸습니다. 남탓을 할 수 없으니 스스로를 갉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코로나 시국 20대 여성의 극단적 선택 비율은 전년 대비 25.5% 늘었습니다. 남성이라고 다를까요. 최근 광주광역시의 조사에 따르면 은둔형 외톨이 중 20대 남성이 가장 많고 취업 실패가 계기가 됐습니다. 남들은 다 하는 취업, 나만 못한다고 생각해 아예 사회와 단절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런데 그나마 긍정성의 폭력을 견디던 청년을 배신하는 존재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엘리트입니다. 긍정성의 폭력이 결과적으론 성취로 이끌도록 사회를 고쳐나가야 할 엘리트들이 잘못된 사회를 용인하고 오히려 이용해온 게 최근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 예로 조국 전 법무부장관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아들딸을 위해 동양대학교 표창장 위조 발급, 서울대 공익인권센터 인권증명서 허위 발급을 한 문제가 터졌었습니다. 최근 법원은 정경심 교수의 입시비리 혐의를 인정해 징역 4년을 선고했습니다. 조국 전 장관의 아들에게 허위 인턴 확인서를 발급해줬다는 혐의로 기소됐던 최강욱 열린민주당 대표도 징역 8개월과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실체적 진실은 이러합니다. 혹여 혐의에 비해 너무 과한 정치적 멍에를 쓴 것이 아니냐는 푸념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긍정성의 폭력을 견뎌온 청년에 대한 배신이었습니다. 특히 그 누구보다도 정의를 내세웠던 인물이기에 배신감이 클 수밖에 없죠.
반대 진영도 마찬가지입니다. 나경원 전 미래통합당 원내대표 아들의 논문 공동저자 등재에 대해 서울대학교는 '부당한 저자 표시'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결정 이유에 대해 서울대는 저자에 포함될 정도로 기여하지 않았다고 명시했습니다. 검찰은 이에 대해 미국의 형사사법공조 결과가 도착할 때까지 시한부 기소중지 처분했습니다. 고교 재학 중 논문 포스터에 제1저자로 등재한 것에 대해선 무혐의 처분을 내렸습니다. 나경원 전 원내대표는 조국 전 장관과 다르게 법적 책임이 없습니다. 하지만 시민들은 분노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똑같은 입시 과정을 거칠 수 있었을 지 의문스럽기 때문입니다. 역시나 긍정성의 폭력을 견딘 청년을 배신했습니다.
우린 어딘가 닮았나봐요
이는 한국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지난해 미국에서 부정 입학자가 대거 적발됐습니다. 버클리 대학의 경우 한 부모가 아이를 체육특기생으로 입학시키기 위해 소위 빽을 쓰고 수천달러를 기부했습니다. 그 아이는 그 팀에서 한 번도 뛴 적이 없고요. 조금 더 시간을 돌려서 2019년엔 '로리 러프린'이라는 유명 배우가 두 딸을 대학에 넣기 위해 5억6천만원 정도를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입시비리가 상류층에서 만연하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모두가 경악했습니다. 상류층, 즉 엘리트들이 미국에서도 긍정성의 폭력을 견디는 자를 배신한 겁니다.
즉, 이 문제는 진영과 국경의 문제를 벗어난 모든 엘리트층의 문제입니다.
이에 대한 해답은 어디에 있을까요? 일단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폭력은 또다른 폭력을 부를 뿐입니다. 해답은 '귀를 귀울이면'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영화 속 인물, '니시 시로'에게 배워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게 필요한 건 '니시 시로'의 경청이다
니시 시로는 세이지의 할아버지로 스즈쿠, 세이지가 꿈을 향해 발을 디디는 데 큰 공헌을 한 인물입니다. 그 공헌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엄청난 돈을 대준 것도 아닙니다. 글을 쓰는 스즈쿠를 위해 소설 아이템을 던져주거나 고액 과외를 시켜주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경청했을 뿐입니다. 몇날 몇일을 걸려 소설을 쓴 스즈쿠의 글을 해가 질 때까지 읽었기에 스즈쿠는 꿈을 향해 달릴 수 있었습니다. 만약 대충 읽고 "뭐 나쁘지 않네" 이렇게 말했다면 스즈쿠는 꿈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경청입니다. 엘리트층의 경청이죠. 언젠가부터 엘리트층과 그 외 사회 구성원 간 대화가 단절돼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국, 나경원 관련 사건을 보면 엘리트만의 시각으로 정치적 해석에 그치고 있습니다. "에이 이거 봐, 너도 결국 똑같은 입시비리 저질렀네!" 수준에 그치는 거죠. 정말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해법은 전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그들이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면 그런 수준 낮은 공방에 그칠 수 있었을까요? 저는 감히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엘리트층이 긍정성의 폭력에 지쳐가는 청년들에게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줬으면 합니다. 그러려면 경청이 우선입니다. 단시간에 바뀔 것이라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니시 시로처럼 모닥불 앞에 앉아 천천히 청년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물꼬를 틀어주길 바랄 뿐입니다. 정말 어른들이, 아니 엘리트층들이 청년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이 세상이 영화 '귀를 기울이면' 속 세상처럼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