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로바니에미에서
오로라를 보기 위해 열세 시간 오십 분을 날아 헬싱키를 거쳐 다시 한 시간을 더 날아 로바니에미에 도착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곳은 오로라를 보기 위한 첫 번째 선택지가 아니겠지만, 한정된 시간과 체력 그리고 귀차니즘으로 최적화한 나의 목적지는 산타클로스의 도시, 로바니에미였다.
비행기 티켓은 고작 떠나기 2주 전, 그리고 나머지 여정은 일주일 전에 결정했으니 열심히 준비한 여행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혼자 여행을 떠나겠다는 마음만은 오래오래 고이 준비했으니 그걸로 될까?
로바니에미 현지 여행사의 투어 상품들은 대부분 2인 이상이 함께 신청할 수 있었다. 6년여 만에 혼자 떠나는 여행인데, 굳이 동행을 찾고 신경 쓸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찾게 된 한 여행사에서는 소규모 그룹으로 투어를 진행하는데, 혼자여도 신청할 수 있는 활동들을 친절히 알려주었다. 이메일로도 친절함이 뿜뿜 느껴지던 까미유Camille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오로라 투어는 첫날에 참여해요! 이곳에 있는 동안 오로라를 볼 확률이 더 높아지도록.”
북극권(Arctic Circle)에 위치한 이곳은 아침 9시 정도였지만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더 이르다 느껴졌다. 12월다운 찬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하얀 세상에 아주 서서히 밝아오는 하늘에서 뿜어내는 오묘한 색깔이 여행의 시작을 알렸다. 호텔을 잡은 것도 아니면서 체크인 시간 따위 생각하지 않은 내 안일함을 나중에 후회했지만, 이렇게 아침 로바니에미의 모습을 보아서 다행이었다. 이 도시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춥고, 바깥을 돌아다닐 일은 아니라 생각했다. 공항에서 나와 바로 산타클로스 빌리지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가며 보이는 풍경에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키가 큰 나무들에 눈이 소복하게 쌓인 모습은 내가 상상하던 겨울 나라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늘이 밝아오면 금세 해가 떠오르는 홍콩과 달리, 해가 온전히 떠오르기까지 시간이 한참 걸린다.
산타클로스 빌리지에서 시간을 꽉꽉 채워 보낸 후, 체크인 시간을 기다리며 버거킹에서 점심 겸 저녁을 먹었다. 기다리던 중 저녁 오로라 투어를 갈 여행사의 이메일을 받았다. 오로라에 대한 조사도 열심히 하지 않고 온 나는 오로라를 보는데 이렇게나 많은 요소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에 놀랐고, 자세한 이메일이 고마웠다.
체크인하고서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미 따뜻하게 입었다고 생각했지만 하루 종일 덜덜 떨고 있었다는 것을 실내에 들어가고 나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로라를 기다리며 밖에서 얼마나 있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걱정이 되기도 했다.
시간 맞춰 여행사 오피스에 갔다. 예약해 둔 방한복과 부츠도 빌려 신고, 투어를 이끌 가이드와 함께 할 사람들도 모두 만났다. 프랑스인 가이드 제러미와 프랑스에서 온 네 사람, 독일에서 온 두 사람, 그리고 나 이렇게 밴을 타고 출발했다.
제러미는 내게 조수 역할을 맡겼다. 조수석에 앉아 별이 보이는지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많은 사람이 오로라 헌팅을 간다고 생각하지만 오로라 헌팅은 사실 별을 쫓는 일이라고 했다. 오로라를 결정하는 요인들은 여럿 있고, 우리 머리 위에서 오로라 현상이 일어나는 지는 그 요인들에 달려있지만, 결국 우리가 오로라를 볼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은 맑은 하늘이라고. 별이 보이면 오로라도 볼 수 있다고 말이다.
산이 별로 없고 호수가 많은 핀란드는 날씨가 금방 변한다. 낮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오로라를 찾아 길을 나선 후 계속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길 양쪽을 빽빽하게 메우고 있는 검은 숲 사이에 눈 덮힌 하얀 길을 달리고 달렸다. 제러미는 가끔 차를 멈추고 기상 상황을 확인하고, 새로운 좌표를 찍었다. 하지만 날씨는 더 나아지지 않았고, 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가끔 먼 하늘에 빛기둥이 보였다. 차가운 공기 속에 있는 얼음에 차량 상향등의 빛은 이렇게 반사되어 빛기둥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래서 어두운 눈길이지만 운전하기에 위험하지 않다고.
더 이상 멀리 가기보다는 어딘가 차를 세우고 소시지 등을 구워 먹으며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차에서 내려 바비큐를 할 수 있는 공터로 갔다. 손전등을 끄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불을 지폈다. 따뜻한 불 주위에 둘러앉아 오로라에 관한 전설과 핀란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북극여우 꼬리에 붙은 불이 만든다는 오로라는 보지 못했지만, 피워놓은 장작불과 그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듣던 이야기가 그만큼 좋았다.
그 밤이 좋았지만, 이 먼 길을 온 이유는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였다. 며칠 뒤 여행사 대신 '오로라 헌터'로 알려진 사람에게 연락했다.
나: 전 12월 XX일부터 XX까지 로바니에미에 있을 예정인데, 그 사이 오로라 헌트 그룹에 빈자리가 있으면 함께 가고 싶어요.
헌터: 여기서 한 시간 거리에 지금 하늘이 맑은 곳이 있어요. 10~15분 이후에 출발할 거예요. 지금 맥도날드로 올 수 있나요?
나: 딱 10분 거리에 있어요. 지금 나가면 되나요?
헌터: 그래요. 곧 만나요.
이렇게 급하게 마음의 준비도 없이 옷을 껴입고 출발했다. 오로라 헌터인 폴은 급하게 모인 사람들을 차에 태우고 달리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로바니에미에서 차를 타고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곳. 폴은 계속 여러 가지 지도와 웹사이트를 확인하며 거침없이 운전했다. 한 시간쯤 달리자, 별이 보이기 시작했다. 삼십 분을 더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폴, 그리고 다른 그룹을 이끄는 폴의 동생은 저기 바로 오로라가 보인다고 설명했다. 하늘에는 뭔가 희미한 빛이 보였다. 오로라인 걸 알아차리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폴은 우리를 위해 각자 사진을 여러 장 찍어주었다.
별빛과 오로라만 보이는 이곳에서 우리는 한참이나 하늘을 보고 있었다. 오로라는 조금 더 선명했다가 흐릿했다가 또 자리를 옮겼다. 폴에 따르면 이건 '아기 오로라'라고 했다. 별이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다가 같은 그룹에 있던 프랑스 친구가 외쳤다. "소원을 빌어야 해!" 우리는 영어로 별똥별Shooting star이 생각나지 않아 몸짓으로 서로를 이해했다. 그는 나에게 불어로toile filante를, 나는 한국어로 별똥별을 알려주었다. 아마도 이 단어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오늘 본 하늘은 오래도록 기억하겠지.
폴과 동생은 또 새로운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조금 더 탁 트인 곳으로 가서 새로운 오로라와 별을 보았다. 영하 27도는 내가 견딜 수 있는 온도가 아닌 것을 느끼고 다시 차에 올랐다. 매일같이 오로라와 밤하늘을 볼 텐데도 폴은 그 누구보다 오로라와 별빛에 감탄했다. 여정을 다 마치고 돌아오자 12시가 넘었다. 6시간을 오로라를 찾고, 보고 다시 돌아오는 데 썼다. 꿈같은 6시간이었다.
내가 오로라를 보러 나갔던 밤들보다 다른 날 더 멋지고 화려한 오로라가 있었단 이야기를 들었다. 그건 내가 본 오로라가 아니었으므로 나에게는 없었던 것과 같다. 로바니에미까지 날아간 길도, 로바니에미에서 오로라를 찾아다닌 그 여정도 너무도 추웠고, 너무도 오래 걸렸지만, 그 모든 시간이 오로라를 보기 위한 의미 있는 기다림이었다.
결국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는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거나, 구름이 없는 맑은 하늘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인생도 그런 게 아닐까.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포기하지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거나, 아니면 그것을 찾아 길을 나서는 일을 끊임없이 해내는 과정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