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달러가 남긴 교훈

좌충우돌, 미국맘 성장기 (3)

by 마이 엘리뷰

미국 산부인과 체험기 총 28편은 아래 매거진과 브런치 북 (아나운서 그만두고 미국.행)을 통해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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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와서 뚜벅이 생활을 하고 있는 나. 운전 안 하고 못 사는 나라인 줄만 알았는데 보스턴의 대중교통은 꽤나 잘 갖춰져 있었던 덕분에 기꺼이 반갑게 자차 생활을 포기했다. 고로 집에서 학교까지 통근열차_commuter rail과 전철_T로 통학하겠다고 결정! 그렇게 집과 보스턴 도심을 부지런히 왕복한 지도 벌써 일 년이 훌쩍 넘었다. 종종 남편이 일찍 퇴근하는 날엔 학교까지 데리러 와주는 깜짝 찬스를 마주하기도 하지만 평소엔 매일 왕복 23.3달러 정도의 교통비를 들이며 등하굣길을 오간다. 커뮤터 레일(보스턴 도심과 근교 지역을 연결하는 통근열차) 편도 9.75달러. 전철 (우리나라에 비하면 미니 사이즈 경전철) 1회 2.4달러. 한국의 대중교통비와 비교한다면 결코 저렴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보스턴 도심의 만만치 않은 주차비에 (학교 측이 제공하는 주차장 혜택은 없다는 슬픈 현실) 타국에서 운전 스트레스까지 받았을 것을 고려한다면 (평소 운전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타입) 대중교통 이용하겠다는 선택은 꽤나 합리적이고 현명한 거라고 판단. 땅땅땅.

보스턴은 그린라인, 레드라인, 오렌지라인, 블루라인과 같이 전철노선이 잘 짜여져있는 편. 도심에선 전철이용이 더 편리할 때가 있다.


계획이 다 무슨 소용이야

그런데 아주 살짝 억울한 일이 생겼다. 대중교통의 티켓을 미리 사둔 게 그 발단. 코로나 사태가 이렇게나 미국을 심각하게 물들이기 이전이었다. 매일매일 탈 때마다 티켓을 구매해도 되지만 어차피 사야 할 티켓, 미리 한꺼번에 모아 사는 것도 당연히 편리하겠지 싶었다. 게다가 흔히들 쓰는 뱅크 오브 아메리카 신용카드의 캐시백 혜택을 최대치로 받고 싶은 마음에 나름의 전략을 세워둔 게 화근. 한 달에 딱 한 번씩 캐시백 최대치 (3%)를 받을 수 있는 카테고리를 (교통, 여행, 식음료, 인터넷 쇼핑, 교육 등) 설정할 수 있는데 내 경우 2월의 카테고리는 '교통/여행'. 3월의 카테고리는 '인터넷 쇼핑'으로 설정하려고 일찍이 생각해뒀다. 3월은 임신 막달인 만큼 아마존에서 아기용품을 잔뜩 주문할 심산이었기 때문에.

전철과 커뮤터레일. 우리나라만큼 저렴하진 않지만 배차간격도 잦고 꽤 쾌적한 편. 운전을 하면 손발이 묶이지만, 대중교통 안에선 등하굣길 공부하면서 오고가기 딱좋다.


그렇다면,
3월분 교통티켓도
2월에 미리미리 좀 사두어야지.

캐시백 혜택을 좀 더 받을 수 있을 때 교통티켓을 미리 '쟁여' 두려고 머리를 굴렸다. (그래 봐야 고작 3% 이지만, 한 달이면 10달러를 넘는 금액. 이게 어디야?) 소박한 혜택이지만 이왕 사야 할 것, 조금이라도 이득 보면 좋은 거니까. 3월에 국가공휴일과 미리 공지된 휴강일 제외하고 못해도 14번 정도는 왕복하겠지, 남편이 데리러 오는 날은 대중교통 이용할 일이 없을 테고, 이래저래 따져가며 내게 필요한 등하굣길의 교통티켓을 여러 장 '쟁여두기' 득템 성공. 다음 달에는 캐시백 혜택 좀 쏠쏠하겠네?


미리 티켓 좀 구매해둘까?
티켓을 미리사두면, 내 모바일 지갑에 저장해두고 만료일 전까지 사용이 가능하다. 그때 그때 꺼내기만 하면되니 편리한 방법.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괜한 소소한 욕심이 꼼꼼한 전략을, 또 이 철저한 전략 계산이 결국 근심을 부르고야 만 것. 3월 7일까지도 도심에서 보스턴 심포니와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연주 실황을 즐긴 우리 부부. 보스턴을 비롯한 매사추세츠 전역에 자가격리 권고가 내려질 줄 어떻게 알았겠나.


3월 9일 기점으로 보스턴 권역 모든 대학들의 강의가 온라인으로 전환된다는 중대발표가 나오기까지. 한국에서 한창 확진자가 늘고 코로나 이야기로 시끌시끌할 때 이곳은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라는 듯' 고요하고 평온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마스크라도 쓰고 나오면 '내가 확진환자라도 된 것처럼' 온갖 눈총을 떠 안 해야 했던 상황이었는데 이제 여기도 코로나 공포 시작.


아니, 학교 자체를 안 가게 될 줄은 전혀 몰랐던 거죠! 코로나 확진자 백만 미국, 대학에서의 모든클래스는 stay home 하며 들을 수 있는 리모트 클래스로 전환되고.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사태에 대해 주정부가 이제라도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건 반가운데 말이지, 마음속 걸리는 건 딱 하나. 미리 사둔 교통티켓. 이젠 나갈 일이 없어졌으니 도대체가 쓸 일이 없는 거잖아!


학교가 위치한 보스턴 도심으로 향하는 커뮤터레일 안 풍경. 구간마다 금액이.다르지만 내 경우 1회 편도 탑승에 9.75달러. 이 열차 언제쯤 다시 탈 수 있을까.
마음처럼 안 되는 일들, 꼭 있더라

소소한 혜택까지 다 건지려다 보니 결국 손해를 보고야 말았다. 학교 통학하는 데 써야 했을 커뮤터 레일 티켓이 여전히 내 모바일 지갑 안에서 두장이나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중. 티켓이 더 많이 남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위안해보아야 하나. 출산 전까지 최대 출석할 수 있는 날들을 꼼꼼하게 계산해서 미리 티켓을 확보해두었던 나의 '철저함'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모든 계획은 부질없었다. 미리 생각하지 말 걸. 먼저 계획하지 말 걸. 그냥 대중교통 탈 때마다 그때그때 되는대로 사서 탈 걸. 결국 9.75달러 편도 티켓이 2장에 달하는 19.5달러는 5월 9일, 약 닷새 뒤에 먼지처럼 사라질 예정이니 억울하고도 억울하도다. 예정대로 캐시백 혜택은 최대치로 받았을지언정 20달러 가까운 금액도 차감되었으니 이것은 혜택을 받은 것도 아니요, 받긴 받았으되 상당한 찝찝함과 손해를 남긴 셈.


나갈 일이 없는 일상.

때때로 계획과 계산이 허공에 샅샅이 흩어질 때가 있다. 완벽하리라고 발버둥 칠수록 보란 듯이 더. 고등학교 수험생 시절, 어떤 과목을 언제 공부할지 또렷하게 선을 긋고 시간을 적어가며 스터디 기록장을 꾸려보아도 이런저런 돌발상황들이 '번쩍' 나타나서 미리 해둔 기록을 부질없이 흐릿하게 만들기 일쑤였음을 기억한다.


방송을 하면서도 마찬가지. 이렇게 저렇게 매끈하게 멘트하고 기분 좋게 클로징 마친 뒤, 얼른 퇴근하고 두발 뻗고 편히 잘 거야! 생각해두었던 날, 갑작스러운 방송기술적인 돌발상황, 파트너의 예상치 못한 애드리브나 실수 등등에 종종 당황해서 밤새 '이불 킥' 하며 잠을 못 이루기도 했었더랬다. 단정하고 깔끔하게 대비하려고 애쓴다고 해서 내일을 위한 준비가 '완료'되고 '완성'되는 게 아니라는 걸, 늘 깨닫고 배우는 지점들. 알긴 아는데 왜 항상 같은 마음을 반복할까.


변수 가득할 육아에서는 더더욱이 계획이 소용없어질지도 몰라.
그냥 그때그때 되는 대로 할 걸.

어쩌면 미리 머리를 굴리지 않는 삶이 좀 더 나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하물며 '아기'와 함께하는 일상에서야 오죽할까. 지금 분유 4oz를 먹었으니 정확히 3시간 뒤에 또 따끈따끈한 4oz를 준비해서 대령해야지 마음먹고 계획해둔다고 한들, 아기는 1시간 25분 뒤에 갑자기 배가 고파서 울 수도 있는 것. 넉넉히 4oz를 준비해두었더라도 격렬히 보채는 아기를 달래다가 '왈칵' 1oz를 쏟아서 흘려버릴 수도 있는 것. 혹은 오늘따라 낮잠에 푹 빠져든 아기가 뽀얗게 준비해둔 분유 맘마를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아서 우유병을 섬세하게 흔들어 댄 내 노력이 아예 소용없게 될 수도 있는 것.


이럴 거라면 정말로 애쓰지 말아야겠다고 또다시 마음먹기. '될 대로 되라'고 흘러가는 대로 몸과 마음을 맡겨두는 편이 더 나을 거야! 오히려 계획해두었다가 허무하게 무너져내리는 마음을 자주 겪는 것보다 이 편이 더 현명하고 지혜로울 수도 있겠다고.


"될 대로 되라지."


약 23,400원 내고 배운 교훈.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과 몸짓으로는 힘겨운 일들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계획을 짜두고 최대한 체계적으로 일상을 재단해서 살고 싶다는 것도 중독이라면 중독일 테니. 계획해서 더 좋은 이득을 취하고 싶었던 마음이 산산조각 났으니 이 에피소드, 이거 내게 꽤 괜찮은 배움이 되었을까. 미리 준비해서 티켓을 구입하는 '철저함'보다 그때그때 되는대로 즉흥적으로 티켓을 사서 급히 기차에 올라도 괜찮을 '여유로움'을 연습해야지. 그런 어른이 되어야지. 특히 변수 많은 육아 중에는 더더욱이.


19.5 달러는 내 손 안에서 희미하게 자취를 지워갔지만 아아,,, 나는 달러 환율 1200원 곱하기 19.5달러, 약 2만 3천400원에 달하는 배움의 가치를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글을 읽는 그대에게 전합니다.

오늘 하루,
그냥 그때그때 되는 대로
하늘은 이렇게나 좋은데, 왜 나가지를 못하니. 대중교통 이용할 일이 전혀 없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의 하루하루


미리 짜두지 않아도 “케세라세라” 될대로 잘 될거라고, 예견된 노선따라 쭉쭉 잘 흘러가줄 거라고 믿어보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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