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맞춤 10초

좌충우돌, 미국맘 성장기 (9)

by 마이 엘리뷰

가슴이 '저릿저릿'해지는 순간이 있다. '찌릿찌릿'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좀 더 차분하고 단정한 자태의 순간들. 나도 모를 어떤 무게감에 경건해지면서도 내 안의 어떤 흥분감이 그 무게감을 뚫고 새어 나오는 느낌들. 남편과 연애시절 처음 데이트하러 약속 장소로 향하던 순간이 그러했던가.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 직전 엄마와 공항에서 보내는 마지막 커피 데이트의 느낌도 이 부사와 닮았다. 마냥 좋기만 한 느낌이 아니라, 그 위에 이 좋은 순간을 어떻게든 묵직하게 오랜 시간 지켜내야겠다는, 잊지 말아야겠다는 책임감이 동반되는 기이한 단어. 국어사전의 표현을 살짝 열어보자면, '저릿저릿'은 '심리적 자극을 받아 마음이 순간적으로 매우 흥분되고 떨리는 듯한 느낌'이란다. '매우 자꾸 저린 듯한 느낌'이라고 덧대어 서술돼 있는 만큼, 이 감정은 반복해서 재생해보고 싶은 장면에 특히 적용된다.



노곤노곤 졸음이 쏟아지려던 5월의 어떤 오후, 아기를 내 무릎 아래에 재워두고 '다닥다닥'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여름학기에 듣기로 한 강의의 수업계획표를 살펴보고 미리 읽어둬야 할 읽을거리들을 부지런히 확인했다. 과제 일정들을 꼼꼼하게 살피고 대충 이런 맥락으로 리포트를 써 나가야 되겠다고 다짐해두는 중이었다. 눈꺼풀은 무거웠지만 출산 이후에도 바지런히 학업을 이어가려는 내 빠릿빠릿한 몸짓이 싫지 않았던 그 시간. 그때였다. 오묘하게도 뺨 한쪽이 따뜻한 색깔의 물감으로 '쏵' 번져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졸음을 애써 쫓아내려고 미간에 인상을 쓰고 있다가 '번쩍' 눈을 동그랗게 만들고 정면을 응시해보았다. '어머, 안 자고 있었구나.' 아기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어떤 울음의 분위기도 보챔의 몸짓도 없이 가만히 누워서 그저 내 얼굴 위로 눈길을 얹어두었다.


세상과 마주한 날, 발도장 쾅.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엄마랑 아빠랑 부지런히 눈도장 쾅쾅


참 '저릿저릿'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는 흔하지 않은 감정이다. '으앗, 떨려', '어머! 너무 설레'처럼 경쾌하게 방방 뜨는 느낌이 아니다. 그 무언가가 묵직하게 나를 내리누르는데 그게 설렘 따위와 비슷한 간지러움을 보태는 것. 날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또렷한 두 눈동자가 너무도 영롱해서 나마저도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분위기에 설렜고 그 교감이 바스락 거렸던 내 마음을 살살 간지럼 태웠다. 바로 '저릿저릿'의 기분이 얹힌 것.


투명한 그 눈빛의 힘에 부드럽게 설렜고 자연히 미소가 번졌다. 이 순간의 기억과 잔잔한 감정들이 사진이나 영상에 담기지 않음이 그저 안타깝다고 되뇌어본다. 너의 고운 눈빛을 그냥 덧없이 흘려두고만 있었다니... 너의 두 눈이 내 두 눈을 응시하던 눈 맞춤의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눈치채지 못했다니. 그제야 나도 너와 닮은 자태로 그 눈을 정확하게 응시하고자 바라보려고 바지런을 떨어본다. 그냥 엉성하게 쳐다보는 건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 같다. 최선을 다해 과녁을 향해 '명중'하듯이 너의 깊은 마음을 향해 눈을 꽂아두려 해 본다.


깊숙이 잠든 줄만 알았던 네가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을 때의 느낌이란! 그 순간은 오래도록 잊지못할거야. 너와의 눈맞춤 10초.


그렇게 너와의 눈맞춤 10초. 그 검은 눈동자가 너무 맑아서 내 검은 속을 다 꿰뚫어 보는 것 같잖아. 그 깊은 눈동자가 너무도 진지해서 무언가의 메시지를 진심 다해 전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잖아. 정말 무언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잖아.


내 얼굴을 응시하고 있는 건지, 눈과 입 사이 어딘가 명료하지 않은 곳에 그저 시선을 두고만 있는 건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교감'하고 있는 것 같은 그 순간에 취해서 결국에는 10년 뒤, 20년 뒤에도 이 장면을 영영 그리워하게 될 거라고 미리 짐작해두었다. 소설가 한강의 <작별> 속 주인공과 아들 윤이의 한 때 그 시절과도 이 장면이 참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아침 빛에 저절로 떠진 그녀의 눈이, 미리 깨어 있던 아기의 검은 눈과 마주쳤었다. 왜 그랬는지 그날따라 아기는 보채지 않은 채 그녀가 눈을 뜨길 기다리며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둘의 눈이 마주친 순간 아기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렇게 절대적인 믿음이 담긴 웃음을 그녀는 그날 처음 보았다. 흔히 말하는 절대적인 사랑은 모성애가 아니라 아기가 엄마에게 품은 사랑일지 모른다고, 신의 사랑이란 게 있다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ㅡ 한강 <작별> 중에서 ㅡ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p.41)


엄마가 되고나니, 한강의 <작별>은 이전과 또다른 방식으로 읽혔다. 눈사람이 되어버린 자와 아들 윤이의 이야기. 작가가 윤이를 불러올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졌던 오후풍경.


시간이 지나면서 이 눈맞춤의 시간은 차츰 변해 갈 것이라는 걸 안다. 아마 5초도 채 안되도록 냉정하게 짧아질 수도 있겠지. 때론 분노나 원망에 차서 훨씬 더 길게 날 응시하는 순간도 있을 거라는 걸 미리 학습하고 인정해내야겠지. 하지만 어쩌면 엄마 곁에서 친구처럼 보듬어 주려고 길고 따뜻하게 밀착력을 더하며 네가 먼저 아이컨택을 시도하는 날들도 있을 거야. 바로 오늘처럼. 그럴 땐 남편과 썸을 타던 시절만큼이나 설렘의 정서가 깃들 수 있을까. 그렇다면 단연 또 다른 '저릿저릿'함의 느낌이 서서히 찾아들겠지. 또 다른 기운을 타고 너와의 눈맞춤에 의미를 더하고 추억할 수 있는 순간이 될거야.


너의 두눈을 명료하게 응시할 또 한번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어.


이쯤에서 글을 얼른 마무리 짓고 아기 침대에 바짝 다가서야지. 영롱했던 두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을 복기하다가, 또 다른 눈 맞춤의 순간을 자칫 놓쳐버린다면 너무도 억울할 테니!


내일도 최선을 다해 너와의 10초를 기억하겠다고 다짐한다. 혹시라도 그 언젠가 마음이 허전한 순간들이 찾아든다면 그 '저릿저릿'함의 감동을 저 위로 떠올리며 텅 비어 가는 마음을 보듬어 볼 작정이니까. 우울함이나 걱정 따위의 감정에 괴로울 듯한 날이 있다면 눈맞춤의 경이로움으로 살살 달래나 갈 생각이니까. 나의 그 순간을 소설집 한쪽의 문장들에 빗대보며 돌이키고 또 돌이켜본다. 눈사람에게도 윤이와의 잊을 수 없는 아련한 순간이 있었듯, 내게도 이 장면은 아련하게 저릿저릿하게 떠나지 않을거야. 저절로 떠진 나의 눈이 우연히 너의 시선과 마주칠 또 한 번의 순간을 또 한번 기다리며.


한강의 소설을 내내 곱씹다가 빗방울을 조금 맞는대도 좋을 것 같았던 오후. 너와의 눈맞춤 순간을 되뇌며 그 경이로움을 빗방울에 실어보기
한 달 뒤 너와 또 어떤 느낌으로 눈을 마주치게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