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피넛버터 먹던 날

부캐는 미국 엄마

by 마이 엘리뷰


육아 결벽증을 버리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출처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엄마 완벽주의’를 떨쳐버리라는 얘기였다. 각종 임신육아출산 백과에 나온 이야기 그대로 아기를 정석대로 키울 수야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책에 나온 것 같은 완벽 육아를 따라잡을 수 있는 이는 없을 테다. 아기를 교과서처럼 돌볼 수 없는 날은 초보 엄마에게 흔한 일인데, ‘오늘은 이걸 실수했네, 어머 어제는 참 이걸 못해줬네.’ 자책하다 보면 육아의 날들은 더 무겁고 버거워진다. 그런 면에서 참 반갑고 고마운 이야기였다. 육아에서도 결벽증을 버리라는 것. 내겐 아기의 ‘식생활’을 챙기는 면에서 더더욱이 그랬다.



오늘 너무 부실하게 시작했나. 초라한 아기 상차림에 미안한 마음.


소위 일컫는 ‘입꾹닫’ 아기를 키우다 보면 (입 꾹 닫고 안 먹겠다고 버티는 아기), 같은 생각을 반복하게 된다. ‘엄마로서 내 할 도리를 다 하지 못했나’ 물음표를 띄우게 되는 것. 소아과 의사와 영양사들이 추천하는 식단이 있을 텐데 이를 정확하고 바르게 따르지 않아서 그런 걸까, 첫 이유식 시작부터 좀 더 정성을 다해 쌀미음을 지어냈어야 하나, 내가 미국 유학생활 바쁘단 핑계로 초기부터 너무 시판 이유식에 의존한 탓일까… 이미 지난 일들에 대한 소용없는 후회들. 100점 만점으로 환산하자면 70점도 안 되는 이유식과 유아식으로 겨우 버텨온 건 아닐지 걱정되는 마음. 그리고 여기에 더하기 미안한 마음까지. 매일매일 바뀌는 밥국, 반찬에 5첩 반상 유아식 척척 차려내는 엄마들을 보고 있자면 난 마치 형편없는 성적표를 받아 든 느낌이었다.


도대체 뭘 먹이지?
미국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든 생각


한국 친정에 머물 땐 새벽 배송으로도 이유식, 유아식을 즉각 즉각 배달받았다. 아기가 평소 좋아했던 식재료를 기억해뒀다가 동일 제품을 주문하기도 했고 때때로 자유롭게 국, 밥과 반찬 배송업체를 변경하기도 했다. 골라먹는, 아니 골라 먹이는 재미가 있었다. 평소 다이어트 식만 지독하게 고수하는 나는 간단한 요리와도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고작 나를 위해서 사과 하나, 아보카도 반쪽을 썰고 두유 한 잔, 라테 한 잔을 번갈아 마실 진대, 가스레인지 불을 켜는 것도 미숙한 내가 완벽한 영양요소를 갖춰 밥과 국, 반찬을 매일 해대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


미국에 오자마자 이런저런 유아식 브랜드를 검색하고 추천받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밥과 국 베이스의 한국형 유아식이 아니니 가격 대비 마음에 차는 아기 배달식이 없었던 현실. 부랴부랴 이런저런 과일과 퓌레, 미니 김밥 등으로 식단을 꾸려나갔는데 확실히 영양 면에서 불균형이 두드러져 보였다. 고깃국물에 밥 한 술 뜨겁게 말아 주면 마음이 놓이겠는데 불고기를 잘게 다져 썰어줘도 먹는 둥 마는 둥. 단백질이 확실히 구멍 난 식사의 날들이었다.


이 아기 식판에 어떤 음식을 채워줘야 하는 걸까.


피넛버터를 매일 한 숟가락씩 듬뿍 먹여
단백질을 보충해주세요
<엘리네 미국 유아식>, 5쪽


미국 현지에서의 유아식에 고민이 깊어가던 중 펼친 한 권의 책. 이 책의 초반부에는 위와 같은 내용이 실려 있었다. 저자 본인이 아이의 식생활이 걱정돼 찾았던 소아과에서 미국 의사가 조언해줬다는 이야기. 저자 본인도 뒤이어 이렇게 고백한다. “밥과 반찬을 먹어야 하는 아이에게 간식조차도 안될 피넛버터를 먹이라니 당시 의사의 조언이 문화 차이로만 느껴졌다 (위의 책, 6쪽)”라고. 같은 내용을 접한 나 역시 처음엔 적잖이 충격이었다. “에이, 설마 피넛버터를… 최소량의 소금 간도 안 하는데 피넛버터를 먹여도 되나?” 그저 불량한 군것질의 식재료가 아닐까 어렴풋이 생각해왔던 내 편견이 도드라졌던 순간.


하지만 저자는 다시 이야기한다. “꼭 한식이 아니더라도 미국식 식단으로 필수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하면 아이의 성장에 문제가 없겠다 (위의 책, 7쪽)”고 생각을 전환했다고. 실제 저자가 운영하는 소셜 계정 콘텐츠를 통해서도 다시금 강조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피넛버터에는 버터가 들어가지 않으며, 100% 땅콩으로만 만들어지고, 땅콩 역시 단백질의 주공급원”이라고. (물론 아기가 피넛버터에 알러지가 없다는 걸 먼저 확인해야 할 테고, 더불어 저자는 소금이나 설탕과 같은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은 제품을 사용하라고 책을 통해 조언했다)



밥을 먹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탄수화물을 먹는 게 중요하죠. 밥을 안 먹으면 빵을 먹여서 탄수화물을 섭취시키면 돼요. 소고기를 안 먹으면 닭고기를 먹이면 되고, 닭고기를 안 먹으면 피넛버터 먹이면 돼요. 피넛버터를 먹으면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으니까요.

<엘리네 미국 유아식>, 41쪽



옳거니! 밥과 국, 반찬이 포함된 한식을 해주지 못한다고 미안해할 일이 아니라 영양소를 고려해 식판을 짜주면 간단했을 일. 물론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얘기가 있지만 한식은 때때로 별미처럼 곁들여도 좋을 일이었다. 완벽한 5첩 반상을 매일 숙제 제출하듯이 차려내지 못해 안달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음을 깨달아 버린 날. Epiphany!!! 마트에서 피넛버터를 고르는 손길에 조금은 자신감이 붙었다. 아기에게 절대 먹여서는 안 될 간식이 아니라, (알러지 반응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 잘만 골라서 곁들이면 좋은 단백질원이 된다는 것을. 밥과 국이 곁들여진 밥상이 아니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죄책감을 더했던 날들에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레시피 참고는 <엘리네 미국 유아식>



두근두근. 저자의 유아식 책이 조언하는 대로 ‘피넛버터 바나나 퀘사디아’를 만들어서 아기 식탁에 대령했던 날, 아기의 손이 쉴 새 없이 식판을 향했다. ‘밥안모’가 언제적 이야기냐는 듯 (밥을 잘 안 먹는 아기들 모임), 먹고 또 먹고! 무엇보다 그 어느 때보다 식사시간을 즐기는 듯해 엄마의 마음은 그저 뿌듯했던 날.


한국식 유아식을 영영 피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새로운 식재료를 소개해도 충분히 괜찮다는 ‘허락’을 받은 느낌. 100점 만점에 100점인 한국식의 영양 식판을 대령하진 못해도 재밌는 식사 시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재차 되새겼던 날. 이쯤 하면 피넛버터는 불량엄마의 귀찮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아이템이 아니라 잘 안 먹기로 소문한 아기를 위해 먹는 재미를 더하게 해주는 현명한 센스 아이템.


꼭 밥과 국을 곁들인 한국식 5첩 반상 아니어도 괜찮다는 토닥임


그러니까 육아 이런저런 요소에 완벽주의와 결벽증을 한번 더 탈탈 털어내 버리자고 생각한다. 투뿔 등급의 아주 좋은 부위, 고급진 고기로 요리하지 않더라도 울애기 단백질원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은 있는 거니까. 피넛버터라는 비기. 밥 먹는 양이 적다고 끙끙 앓기보단 바나나 혹은 고구마로 탄수화물을 채워주면 되겠다고 경쾌 발랄하게 생각해버리기로 한다. 왜 남들 하는 그 길, 5첩 반상의 엄마가 되는 길을 따르지 못해 안달이 나있었나. 왜 때때로 자책하며 ‘육아 결벽증’을 앓고 있었나. 분명 다양한 전문가들의 조언을 두루두루 새겨들어야 할 필요는 있겠으나 그와 100% 동일하게 이행하지 못했다고 내 안의 ‘화’를 키우지는 않기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피넛버터는 ‘완벽한 육아’라는 성을 때때로 고집스럽게 지켜내지 못해도 괜찮다는 너그러운 대답, 동시에 때때로 완벽한 5첩 반상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제법 부드러운 토닥임. 내겐 그런 식재료.


밥안모 멤버 아기가 그날의 탄수화물 야무지게 냠냠 채우는 방법은? 고구마와 바나나, 쌀가루를 곁들인 마들렌.
주 참고서적. <엘리네 미국 유아식>. 스마일 엘리 지음. 세종 출판사.




(* 이 글은 개인적 육아 경험에 비춰 쓴 글로 이유식과 유아식을 아기 각각에게 적용할 시, 아기 개개인의 음식 성향에 따라 알러지 반응이 다를 수 있으므로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특히 피넛버터에 알러지 반응이 있을 수 있으니 유아식 적용 이전에 아기 알러지 반응을 꼭 확인하시길 당부드립니다.)


* 더불어 ‘피넛버터’에 관한 매사추세츠 주 병원 (Massachusetts general hospital)에서 제시한 관련 자료를 밑에 첨부합니다.

https://www.massgeneral.org/children/food-allergies/introducing-peanut-products-to-your-baby

Introducing peanut products to your baby earl in life can help prevent him from developing a peanut allergy later on. Ask your doctor when it is right to introduce peanut products for the first time. For babies and children under age 4, mix peanut butter with 1 safe food at a time. Do not give plain peanut butter to any baby or child under age 4. Do not push your baby to eat more than he wa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