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4월 어느 날, 파주의 혜음원지에서 ‘조선시대 인문학 하이킹’이라는 강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시간을 반으로 자르고 다시 반으로 쪼개도 여전히 모자랄 만큼 바쁜 일상에 쫓겨 그날도 책상에 엎드려 쪽잠을 자고 서둘러 파주로 향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어떻게 여행했을지, 그들이 걸었던 길을 따라 걸으며 여행의 유형과 당시의 유람 문화에 대하여 열성적으로 설명하였다.
강연이 막바지에 이르러 ‘즐거운 일 있거든 그때 바로 즐겨야지 어찌 내년을 기다리겠는가.’라는 시 한 구절을 소개했다. 수강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휴대전화를 들어 연신 사진을 찍었다. 이 시를 소개하자마자 나는 아차 싶었다. 나조차도 그때 바로 즐기지 못하고 내일이며 글피, 다음 달과 내년을 기약하고 있건만 다른 사람에게 훌쩍 떠나기를 이리도 당당히 권할 수 있겠는가. 나부터 당장 떠나야겠노라고 마음먹었지만, 강연을 마치자마자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업무였다.
그래서 나는 바둑기사가 둔 바둑을 복기하듯이 나의 옛 여행을 추억하기로 했다.
여수, 이름만 들어도 까닭 없이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여수다. 여수라고 하면 단연 ‘밤바다’가 먼저 떠오르겠지만 야영을 즐기는 배낭여행자들에게는 밤바다보다 섬 바다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이른 봄, 꽃섬으로 알려진 여수 하화도로 향했다. 하화도는 산책로가 잘 갖추어져 있어 하룻밤을 머무르더라도 여유로운 걷기 여행과 야영이 모두 가능하다. 깜깜한 새벽녘에 길을 나서 넓고 푸른 바다 위에서 일출을 감상하였다. 하화도 선착장에 도착하자마자 왼쪽으로 굽이진 언덕을 바로 오른다. 사방으로 탁 트인 하화도의 풍경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언덕에 수놓아진 노란 유채꽃이 마치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가까이 다가서자 그제야 바다와 뭍이 나뉘어 보인다.
하화도에는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망대가 있다. 서로 누가 더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지 경쟁이라도 하듯이 너도나도 아름다운 봄과 수평선을 뽐내고 있었다. 어느 전망대가 낫다고 할 수는 있지만 어느 전망대가 못하다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하였다. 그 이름도 참으로 특이하다. 낭끝전망대, 시짓골전망대, 깻넘전망대, 막산전망대. 낭끝, 시짓골, 깻넘 이와 같은 말들은 전라남도의 방언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생각해 보니, 선착장 맞은편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섬마을 할아버지에게 낭끝이 무어냐고, 깻넘이 무어냐고 물어볼 걸 그랬다. 아니, 몹시 궁금하니 여쭤보러 다시 가야겠다. 이렇게 다시 떠날 구실을 만들어 본다.
여수 하화도에는 섬마을 주민들이 함께 가꾼 애림민 야생화공원이 있다. 봄날, 하화도에 간다면 앙증맞은 제비꽃부터 노란 유채꽃과 붉은 동백까지 자태를 뽐내는 온갖 꽃들을 만날 수 있다. 그렇기에 하화도는 그 이름처럼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찾아가 보아야 할 곳이다. 텐트를 가지고 여행을 떠나온 사람들은 주로 야생화공원에서 밤을 보낸다. 내가 막 도착했을 때는 삼삼오오 떼를 지어 함께 모여 있는 친구들과 부부 캠퍼가 있었다. 나는 마치 어제부터 함께 있었던 것처럼 공원으로 슬그머니 들어가 한 공간을 차지하였다.
이어서 배낭과 텐트를 정돈하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처럼 하화도도 식후경, 맛집을 찾아 나섰다. 하화도 선착장 앞, 특이한 이름을 가진 와쏘식당에는 하화도에서만 맛볼 수 있는 서대회와 문어 요리, 바삭한 부추전 등을 맛볼 수 있다. 나는 셋이 먹다 한 명이 죽어도 모를 만큼 맛 좋은 부추전을 주문하였다. 하화도 옆 개도에서 생산되는 개도 막걸리와 함께 곁들여 먹으니, 풍미가 넘쳤다. 시큼한 막걸리 한 잔을 마시고 마저 바닷가 꽃길 따라 섬을 걸었다. 눈송이가 내려앉듯이 사뿐사뿐 걷다가 막걸리 한 잔에 거나하게 취한 사람인 양 비틀비틀 걷기도 하고, 어디선가 짹짹 새 소리가 들려오면 따라 울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어린아이가 소풍을 떠나온 듯이 봄을 맞았다.
조선 후기 여행자의 삶을 살았던 심노숭(沈魯崇, 1762~1837)은 노년에 고대하던 금강산 유람을 하루 앞두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평생 근심만 많고 즐거움은 적으니 만일 근심이 없어질 때를 기다렸다가는 아마 늙어 죽고 말 것이다. 좋은 시절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슬퍼하고 오랜 염원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다가 마침내 금강산으로 떠날 계획을 정하였다.”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일다가도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고 온갖 근심 걱정 때문에 자꾸만 다음을 기약하게 된다. 하지만 무려 이백여 년 전에 이미 여행자였던 그는 만일 근심이 없어질 때를 기다렸다가는 늙어 죽고 말 것이라며 우스갯소리를 툭, 하고 던진다.
이대로 근심과 함께 늙어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성큼 여름이 다가오기 전에 여수의 섬, 하화도의 바다로 다시 떠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