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때는 빳빳한 종이처럼, 날카로운 종이처럼,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흰 종이처럼 나는 백지와 같았다. A4, B5, A3 등 모양과 크기는 모두 다르겠지만
시작은 흰 백지였다. 그렇게 하나씩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세상의 모든 것을 담아내려고
했다. 하나둘씩 담아내던 것들이 내가 되었고 내가 가진 추억과 시간이 되었다.
그런 낭만으로 나는 내가 가진 종이 위에 그려냈다. 이런 추억과 시간, 낭만, 신념,
무엇이든 만들어갔고 그려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만든 종이가 접혀야만 되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들을 그려냈고 써 내려갔다. 아름답게 그려진 종이는 내가
되었고 나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사회인 되었다.
사회인이라는 게, 돈을 벌기 시작하면 나는 내가 가진 것들이 멋지고 이상의 것이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내가 그렸던 종이들을 접기 시작해야 했다. 그리고
하나둘씩 접어갈 때 나는 구깃구깃해진 종이가 되었다. 하나둘씩 접힌 종이는
내가 가진 것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보기 싫어 검은색으로
하나둘씩 지워갔다. 그리고 펼쳐진 종이는 주름과 같이 종이 접힌 자국이 남았고
내가 만들어낸 그림과 색깔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삶인가 싶었다.
접힌 자국은 상처와 흉터와 같았다.
내가 가진 꿈, 이상, 희망, 모든 꿈 꿔왔던 것들이 현실과 부딪혀 사라졌다.
아름다운 것들이 아닌 구정물에서 뒹굴던 종이와 같이 변해갔다. 어쩌면 남들의
처럼 사는 것으로 물들어져서 내가 원하던 것들이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남들처럼 가는 길로 따라 걸어가 돈을 위해서 살았더니 나는 꾸깃꾸깃 접혀 나를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종이를 찾고 싶었다.
다시 시작하고 싶을 때, 나 자신이 그렸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게 될 때,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그래야만 나는 나로서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종이를 다시 폈을 땐 자국이 사라지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내가 만든 종이들은 꾸깃꾸깃 접혀 있었고 나는 다시 종이를 열어봤다.
접힌 종이 자국들은 되돌아오지 않았지만 나는 내가 그렸던 것들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부끄러워서 진심을 접었고, 돈 때문에 자존심을 접었고, 현실 때문에 꿈을 접었던 나를
다시 볼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힘든 종이이지만 나에게는 과거였고 현재이며
앞으로 내가 선택할 미래였다. 새로운 종이는 없었고 내 삶만 남아있었다. 마치 보잘것
없는 먼지처럼 종이도 쓰레기처럼 보였다. 어쩌면 살고 있는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라며 위로해보지만 하늘조차 그려지지 않은 종이를 보며 나는 다시 한번 흰색으로
칠하면 흰 종이로 변하지 않을까라며 칠해보지만 회색으로 변해가는 종이밖에 없었다.
나는 내가 가진 종이를 많은 빛깔을 있었지만 접힌 자국들과 지저분한
색들이 겹쳐져 있었다. 그것이 나였고 나는 조금씩 현실에 물들어갔다.
하지만 그런 나를 사랑해주는 누군가가 있었다.
나 자신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다고 느낄 때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는 이가 있었고
끊임없이 나를 좋아해 주고 응원하던 이도 있었다. 아니 단 하나뿐이 가족이 있어서
나는 다시 일어서 종이를 다시 이야기할 수 있었다. 내 종이가 초라하고 보잘것없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에게 손 내밀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나의 가치는 그 어느 것도 바꿀 수 없고 너만 한 가치는 그 어디에도 없을 거라고,
그렇게 나의 삶은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나 보다.
종에 있던 자국들은 상처와 흉터가 되었지만 그것으로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다시 일어서는 법,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법, 나로서 사는 그런 지혜들을 하나둘씩
얻을 수 있었다.
나는 내가 그렸던,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