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필사 61

제4부 과학혁명/ 16. 자본주의의 교리(458~472쪽)

by 명희

"일명 벽돌책으로 불리는『사피엔스』, 구입한 지 2년 됐으나 쉽게 손에 안 잡혀 숙제로 남아있었다. 올해도 안 읽을 게 뻔하다. 읽어낼 무기가 필요하다. 찾은 것이 '통필사', 손필사가 필사의 정석이다만 자신 없다. 안나카레니나 통필사를 손글씨로 한 적 있는데 쉽지 않았다. 기간에 대한 약속은 없다. 하루 한 페이지든 두 페이지든 써 '완독'을 대신할 거다. -2025.01.10.-




제4부 과학혁명

14. 무지의 발견

15. 과학과 제국의 결혼

16. 자본주의의 교리

17. 산업의 바퀴

18. 끝없는 혁명

19.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20.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


[필사와 단상]

16. 자본주의의 교리


콜럼버스가 투자자를 찾는다

자본주의는 근대 과학의 발흥뿐 아니라 유럽 제국주의의 등장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애초에 자본주의의 신용시스템을 만들어낸 것도 유럽 제국주의였다. 물론 신용은 근대 유럽에서 발명된 것이 아니다. 신용은 거의 모든 농경사회에도 존재했고, 또한 근대 초기 유럽 자본주의의 등장은 아시아의 경제 발전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18세기 후반 이전까지 세계 최대의 경제적 실세는 아시아였다는 점도 기억하자. 이것은 곧 유럽인들이 보유한 자본이 중국인, 무슬림, 인도인보다 훨씬 더 적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중국, 인도, 무슬림 세계의 사회정치 체제에서 신용이 수행한 역할은 부차적이었다. 이스탄불, 이스파한, 델리와 베이징의 상인들과 은행가들은 자본주의자처럼 생각했을지 몰라도, 궁전과 성체에 있는 왕과 장군들은 상인과 상업적 사고방식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었다.

근대 초기의 비유럽 제국들을 세운 것은 누르하치, 나디르 샤 같은 위대한 정복자들, 혹은 청과 오토만 제국의 경우처럼 관료 엘리트와 군사 엘리트였다. 이들은 세금이나 약탈(둘 사이에 엄밀한 구분은 없었다)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지, 신용체계의 도움을 받지는 않았다. 은행가나 투자자의 이자에 대해서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 반면에 유럽에서는 왕과 장군들이 점차 상인의 사공방식을 따르기 시작했고, 결국 상인과 은행가가 지배 엘리트가 되었다. 유럽의 세계정복 자금은 세금보다는 신용대부로 조달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났다. 자본가들이 일을 지휘하는 경우도 점점 많아졌다. 이들의 주된 야망은 투자를 통해 최대의 수익을 올리는 것이었다.

프록코트와 실크 해트를 입은 은행가와 상인이 세운 제국은 금실로 된 옷과 반짝이는 갑옷을 두른 왕과 귀족이 세운 제국을 무찔렀다. 상인들의 제국은 정복에 필요한 자금을 훨씬 더 영리하게 조달했다. 세금을 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투자를 하라고 하면 모두가 기꺼이 한다. 1484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프로투칼 왕을 찾아가, 동아시아를 향한 새 무역로를 개척할 테니 선단을 구성할 자금을 지원해 달라고 제안한다. 그런 탐사는 위험이 크고 비용이 많이 드는 사업이었다. 배를 건조하고 보급품을 사고 선원과 군인들의 급여를 주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다. 투자가 수익을 낸다는 보장도 없었다. 포르투갈 왕은 거절했다. 하지만 오늘날 사업의 첫걸음을 내딛는 사람들처럼, 콜럼버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다른 잠재적 투자자들에게 설명했다. 그의 설명회는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을 거쳐 포르투갈로 되돌아왔다. 그는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번에 그는 새로 통일된 스페인의 통치가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에게 운을 시험해 보았다.는 숙달된 로비스트들을 고용하여, 그들의 도움으로 이사벨라 여왕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모든 어린이가 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이바셀라는 대박을 터뜨렸다. 콜럼버스의 발견으로 스페인인들은 아메리카를 정복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금광과 은광을 개발하였으며 사탕수수와 담배를 재배할 대형 농장을 건설하여 스페인의 왕, 은행가, 상인을 상상도 하지 못한 만큼 부자가 되게 만들어주었다.

1백 년 뒤의 왕자들과 은행가들은 콜럼버스의 후계자들에게 전보다 훨씬 많은 신용대출을 기꺼이 해주고 싶어 했다. 이들은 아메리카에서 거둔 수확 덕분에 과거보다 더 많은 자본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은, 왕자들과 은행가들이 탐사의 잠재력에 대해 더 큰 신뢰를 갖고 있었으며 기꺼이 자신들의 돈으로 참여하고 싶어 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의 마법의 순환이었다. 신용대출은 새 발견을 할 자금을 공급했고, 발견은 식민지로 이어졌고, 식민지는 수익을 제공했으며, 수익은 신뢰를 만들어냈고, 신뢰는 더 많은 신용대출로 바뀌었다. 누르하치와 나디르 샤는 수천 킬로미터를 전진한 후에 연료가 떨어졌지만, 자본주의 사업가들은 정복을 거듭하면 할수록 재정적 탄력이 점점 더 붙었다.

하지만 탐사는 원래 불확실한 사업이었기 때문에, 신용시장은 계속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했다. 많은 원정대가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유럽에 돌아왔다. 영국인들은 북극을 통해 아시아로 가는 북서 항로를 개척하려 많은 자본을 퍼부었지만 성과를 얻지 못했다. 아예 돌아오지 못한 원정대도 많았다. 이들을 실은 배는 빙하에 부딪치거나, 열대폭풍으로 침몰하거나, 해적에게 희생당했다. 유럽인들은 잠재적 투자자의 숫자를 늘리고 자신들이 발생시키는 위험을 줄이기 위해 합자회사에 의지했다. 한 명의 투자자가 삐그덕거리는 배 한 대에 돈을 몽땅 투자하는 대신, 합자회사는 많은 투자자로부터 돈을 모았다. 투자자 개개인은 자기 자본에서 아주 작은 몫만 위험 부담을 지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하면 위험은 축소되지만 수익은 얼마든지 커질 수 있었다. 한 척의 배에 아주 소액만 투자해도 잘만 하면 백만장자가 될 수 있었다.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유럽에서는 복잡한 금융 시스템이 발달했다. 아주 짧은 기간 내에 많은 액수의 신용대출을 받아서 이를 민간 기업이나 정부에 맡기는 시스템이었다. 이 시스템은 왕국이나 제국에 비해 훨씬 더 효율적으로 탐사원정이나 정복사업에 자금을 댈 수 있었다. 새로 발견된 신용의 힘은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격렬한 싸움에서 잘 드러났다. 16세기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서, 광대한 세계 제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유럽의 많은 부분, 남북 아메리카의 큰 땅덩어리, 필리핀 제도,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연안을 따라 줄지어 건설된 기지들을 지배했다. 아메리카와 아시아의 보물을 가득 실은 선단들이 해마다 세비야와 카디스 항구로 돌아왔다.

한편 네덜란드는 바람이 많이 부는 늪지대로, 면적이 좁고 천연자원도 없었으며, 스페인 왕의 통치를 받는 작은 지방이었다. 1568년, 주로 개신교도인 네덜란드인들은 가톨릭을 믿는 스페인 군주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반란군이 무적의 풍차를 상대로 용감하게 싸우는 돈키호테처럼 보였다. 하지만 80년이 지나지 않아 네덜란드인들은 스페인에게서 독립을 쟁취했을 뿐 아니라, 스페인과 그 동맹국인 포르투갈의 자리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해양 항로의 주인으로서 네덜란드 세계 제국을 건설하고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로 등극한 것이다.

그 성공의 비결은 신용에 있었다. 네덜란드 소도시의 시민들은 지상에서 싸우는 데 취미가 없었으므로, 용병을 고용해 자기들 대신 스페인과 싸우게 했다. 그동안 자신들은 바다로 나가 점점 더 큰 선단을 꾸렸다. 용병을 쓰려면 돈이 많이 든다. 함포를 장착한 선단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네덜란드인들은 강력한 스페인 제국보다 더욱 쉽게 군사 원정대의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급성장하는 유럽 금융제도로부터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당시 스페인 왕은 부주의하게도 자신에 대한 금융제도의 신뢰를 갉아먹고 있었다. 금융업자들은 네덜란드에게 군대와 선단을 갖추기에 충분한 액수를 신용으로 대출해 주었다. 이 군대와 선단 덕분에 네덜란드는 세계 무역로를 장악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고, 그 이익으로 대출을 갚았으며, 그 덕분에 신용도는 더 높아졌다. 암스테르담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일 뿐 아니라 대륙의 금융 메카로 급성장했다.

네덜란드인들은 정확히 어떻게 금융제도의 신뢰를 얻었을까? 첫째, 이들은 기일에 맞춰 전액을 반드시 갚았다. 그래서 대부업자들에게 신용을 얻었다. 둘째, 사업제도가 독립되어 있는 데다 사적 권리, 그중에서도 사유재산권을 보호했다. 자본은 민간인들의 재산을 보호해주지 않는 독재국가에서 새어나와 법치와 사유재산권이 있는 국가로 흘러들어 갔다.

당신이 독일에서 금융업을 하는 건실한 가문의 아들이라고 상상해 보자. 아버지는 유럽의 주요 도시들에 지국을 열어 사업을 확장할 기회를 살피고 있다. 아버지는 당신을 암스테르담으로 동생을 마드리드로 보내면서 투자금으로 각각 금화 1만 개를 주었다. 동생은 스페인 왕에게 이자를 받고 자본금을 빌려준다. 스페인 왕은 프랑스 왕과 싸울 군사를 구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

당신은 네덜란드 상인에게 돈을 빌려주기로 한다. 상인은 맨해튼이라 불리는 황량한 섬 남단의 잡목투성이 땅에 투자하고 싶어 한다. 그는 허드슨 강이 교역의 주요 동맥으로 떠오르면서 그곳의 부동산 가치가 천정부지로 뛰어오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양쪽 모두 대출은 1년 내에 갚기로 되어 있다. 1년이 지나간다. 네덜란드 상인은 자신이 구매한 땅을 높은 가격에 팔아서 수익을 올리고, 약속한 이자와 함께 원금을 갚는다. 당신의 아버지는 만족해한다. 하지만 마드리드에 있는 당신의 동생은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은 잘 끝났지만, 스페인 왕은 이내 터키인들과의 분쟁에 말려들었다. 왕에게는 새 전쟁 자금이 필요하고, 한 푼도 아쉬운 상황이다. 빌린 돈을 갚는 것보다 전쟁 자금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동생은 왕궁으로 편지를 보내는 한편 법원에 끈이 있는 친구들을 동원해 보지만 아무 성과가 없다. 동생은 원래의 약정에 따른 이자뿐 아니라 원금도 잃었다. 당신의 아버지는 언짢아한다.

설상가상으로 스페인 왕은 동생에게 재무 담당관을 보내, 지난번과 동일한 액수의 대출을 받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한다. 동생은 빌려줄 돈이 없다. 그는 고향에 계신 아버지께 편지를 써서, 이번에는 왕이 반드시 자기 말대로 갚을 것이라고 설득한다. 아버지들은 막내에게 약한 법이라, 무거운 마음으로 승낙한다. 금화 1만 개가 또다시 스페인 재무성으로 사라지고,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한편 암스테르담에서는 전망이 밝아 보인다. 당신은 진취적인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점점 더 많은 대출을 해주고, 이들은 때가 되면 전액을 정확하게 갚는다.

하지만 당신의 운이 무한정 좋을 수는 없다. 당신의 통상적인 고객 중 한 명이 다음 시즌 파리에서 유행할 품목은 나막신일 것이라는 직감을 품는다. 그는 당신에게 프랑스 수도에 초대형 신발가게를 열기 위한 자금을 신용대출해 달라고 요구한다. 당신은 돈을 빌려주지만, 불행하게도 나막신은 프랑스 숙녀들에게 인기가 없는 것으로 밝혀지고, 언짢아진 상인은 대출 상환을 거부한다. 당신의 아버지는 격노애서 두 아들에게 변호사를 동원할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동생은 마드리드에서 스페인 왕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당신은 암스테르담에서 왕년의 나막신 명인을 상대로 소송을 낸다. 스페인 법원은 왕에게 영합하는 성향이다. 판사는 왕의 입맛에 맞추려 하는 데다, 왕의 뜻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을 경우 처벌을 받을까 봐 두려워한다.

한편 네덜란드의 법원은 정부와 별개이며, 시민이나 군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마드리드 법원은 당신 동생의 소송을 기각하지만, 암스테르담 법원은 당신에게 승소판결을 ㅐ리고 나막신 상인의 빚 상환을 강제하기 위해 그의 자산을 압류한다. 동생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스페인 왕은 군대에 지불활 돈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이다. 왕은 당신 아버지에게 자금이 더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왕은 동생이게 날조한 반역 혐의를 씌운다. 금화 2만 개를 달장 가져오지 않으면 동생을 지하감옥에 처넣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썩일 것이라고 협박한다. 당신의 아버지는 질려버렸다. 그는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몸값을 지불하지만, 앞으로 절대로 스페인에서 사업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아버지는 마드리드 지국을 폐쇄하고, 당신 동생을 로테르담으로 보낸다. 네덜란드에 두 개의 지국을 두는 것은 정말 좋은 아이디어로 보인다. 심지어 스페인 자본가들도 자기 나라에서 재산을 몰래 반출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그들도 자기 돈을 지키고 그 돈으로 더 많은 재산을 만들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깨달은 것이다. 법치가 지켜지고 사유재산권이 존중받는 지역, 예컨대 네덜란드에 돈을 투자하라는 편이 낫다. 스페인 왕이 투자자들의 신뢰를 잃는 동안 네덜란드 상인들이 신뢰를 쌓는 과정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네덜란드 제국을 세운 것은 네덜란드라는 국가가 아니라 상인들이었다. 스페인 왕은 계속해서 자신의 정복사업을 유지했지만,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세금을 올려서 원성을 샀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돈을 빌려서 정복사업의 자금을 댔지만, 한편으로 자기 회사의 주식을 팔아서 자금을 조달하는 경우가 점점 더 늘어났다. 주식 소유자는 회사가 내는 이익의 일부를 받을 권리를 갖게 된다. 이들은 네덜란드 제국의 대들보가 된 주식회사에 기꺼이 재산을 투자했다. 스페인 왕에게는 결코 투자하지 않을 것이며, 상대가 네덜란드 정부라도 돈을 빌려주기 전에 두 번 더 생각할 신중한 투자자인데도 말이다.

만일 당신이 앞으로 어떤 회사가 큰 수익을 내리라고 생각하는데 그 회사 주식이 이미 모두 팔렸다고 하자. 당신은 그 주식을 보유한 사람들에게서 일부를 살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원래 구매 가격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거꾸로 만일 당신이 어떠 주식을 샀는데 해당 회사가 곤경에 빠졌다면, 당신은 그 주식을 구매가보다 싸게 팔려고 내놓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주식 거래가 시작되었고, 결국 유럽의 주요 도시 대부분에 주식거래소가 설립되었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주식회사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 1602년 설립 인가를 받았다. 당시는 네덜란드가 스페인의 지배를 떨쳐버리는 투쟁을 하던 시기로, 스페인이 발사한 대포 소리가 암스테르담의 성벽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던 시절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주식을 팔아서 마련한 돈으로 선박을 건조했고, 그 배를 아시아로 보내서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의 재화를 실어 왔다.

회사는 경쟁자나 해적을 상대로 군사작전도 벌였는데, 그 경비도 동일한 방식으로 조달했다. 결국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돈은 인도네시아 정복을 뒷받침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의 군도로, 수만 개의 섬은 17세기 초에 수백 개의 왕국, 공국, 술탄의 영지, 부족이 지배하고 있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인들이 인도네시아에 처음 도착한 것은 1603년으로 당시 이들에게는 상업적인 목적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인들은 상업적인 이익을 보호하고 주식 소유자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유럽인 경쟁자들과 싸웠으며, 관세를 높게 물리는 현지의 통치자들과도 싸웠다. 동인도회사는 상선에 대포를 장착하고 일본인, 인도인, 인도네시아인 용병을 고용했다. 요새를 건설하고, 제대로 된 전투와 포위 공격을 수행했다.

이런 사업은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좀 이상해 보이지만, 근대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에는 민간회사가 병사뿐 아니라 장군과 제독을 고용하고, 대포와 함선을 구매하고, 심지어 체제를 갖춘 기성품 군대도 고용했다. 국제사회는 이를 당연시하여, 민간회사가 제국을 건설해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다. 섬들은 하나하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수중에 떨어졌고, 인도네시아 대부분이 이 회사의 식민지가 되었다. 회사는 인도네시아를 2백 년 가까이 통치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1800년이 되어서야 인도네시아의 통치를 떠맡아 국영 식민지로 만들었고 이 체제는 150년간 지속되었다.

오늘날 일부에선 21세기의 기업이 너무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경고한다. 근대 초기 역사를 보면, 기업이 이익을 무한히 추구하게 놔둘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인도양에서 활약한 반면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대서양에서 부지런히 움직였다. 허드슨 강에서 이루어지는 교역이 중요했기 때문에, 회사는 이를 장악하기 위해 강 입구 섬에 뉴암스테르담이란 정착지를 건설했다. 식민지는 거듭해서 원주민들의 위협을 받고 되풀이해서 영국인의 공격을 받은 끝에, 결국 16664년 영국의 수중에 들어갔다. 영국은 섬의 이름을 뉴욕으로 바꿨다.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식민지를 원주민과 영국인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세웠던 성벽의 잔해 위에 깐 포장도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 즉 월스트리트 Wall Street가 되었다.


17세기가 끝나가면서 네덜란드는 뉴욕을 잃었고, 금융 및 제국의 심장이라는 유럽 내에서의 지위도 내놓았다. 여기에는 현상에 안주한 자세도 한몫했고, 대륙전쟁을 치르느라 경비를 너무 많이 지출한 탓도 있었다. 네덜란드가 빠져나간 공백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 것은 프랑스와 영국이었다. 처음에는 프랑스가 훨씬 유리해 보였다. 프랑스는 덩치가 더 크고 자금과 인구도 더 많았으며 경험 많은 군대를 더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금융제도의 신뢰를 얻는 데 성공한 데 비해, 프랑스는 스스로 신용할 수 없는 대상임을 드러냈다. 프랑스 왕의 행태는 18세기 유럽 최대의 금융 버블이라 불리는 미시시피 버블 과정에서 특히 악명을 펼쳤다.

이 이야기도 제국을 세운 주식회사와 함께 시작된다. 1717년 프랑스에서 사업승인을 받은 미시시피 사는 미시시피 하류의 연안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고 뉴올리언스 시를 건설했다. 야심찬 계획을 실현할 자금을 모으고자, 프랑스 루이 15세의 궁정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던 회사는 파리 주식시장에서 주식을 팔았다. 회사 사장이던 존 로는 프랑스 중앙은행 총재이기도 했다. 게다가 왕은 그를 오늘날의 재정부장관과 비슷한 정부 금융 총책 자리에 임명했었다.

1717년 미시시피 하류의 연안 지대는 늪지와 악어를 제외하면 그다지 매력이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미시시피 사는 여기에 엄청난 부와 무한한 기회가 있다고 떠벌렸다. 프랑스의 귀족, 사업가, 도시 부르주아 중 둔한 사람들이 이런 환상에 속았고, 회사 주식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애초에 주식은 한 주에 50리브르(프랑스의 옛 화폐단위 - 옮긴이)에 발행되었다. 1719년 8월 1일에는 2,750리브르에 거래되었다. 8월 30일에는 4,100리브르, 9월 4일에는 5천 리브르가 되었다.

12월 2일이 되자 주식은 한 주당 1만 리브르를 돌파했다. 황홀감이 파리의 거리를 휩쓸었다. 사람들은 가진 것을 모두 팔고 대규모 대출을 받아 미시시피 사의 주식을 샀다. 부자가 되는 손쉬운 방법을 발견했다는 것이 모든 사람의 생각이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공황이 시작되었다. 일부 투자자들은 주식 가격이 완전히 비현실적이며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들은 가격이 정점을 찍을 때 파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매도 물량이 늘어나자 가격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투자자들은 가격이 떨어지는 것을 보자 빨리 손을 털고 싶었고, 가격은 더욱더 떨어져서 눈사태처럼 무너져버렸다.

프랑스 중앙은행은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 총재인 존 로의 지시에 따라 미시시피 주식을 구매했지만, 영원히 매수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결국에는 자금이 떨어졌다. 일이 이렇게 되자 정부 재정 총책임자이기도 했던 존 로는 돈을 더 찍어내도록 인가했다. 중앙은행이 주식을 더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프랑스의 재정 시스템 전체가 거품 속으로 들어갔다. 더군다나 그런 금융상의 마법으로도 곤경을 면할 수 없었다. 미시시피 사의 주식값은 1만 리브르에서 1천 리브르로 떨어졌고, 그다음엔 완전히 붕괴하여 한 푼어치의 가치도 없게 되었다. 이즈음 프랑스 중앙은행과 왕국 재무성은 돈은 한 푼도 없으면서 무가치한 주식만 엄청나게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큰손 투기꾼들은 제때 주식을 판 덕분에 대체로 큰 손실 없이 벗어났지만, 개미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미시시피 버블은 역사상 가장 극적인 금융붕괴 사태였고, 프랑스의 금융 시스템은 결코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미시시피 사가 어떤 식으로 정치적 연줄을 이용해서 주가를 조작하고 매수 광풍에 불을 질렀는지 백일하에 드러났기 때문에, 대중은 프랑스 은행 시스템과 프랑스 왕의 현명함에 대해 불신했다. 루이 15 세는 신용대출을 받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다. 이것은 해외의 프랑스 제국이 영국의 손에 떨어진 주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영국인들은 자금을 저리로 쉽게 빌릴 수 있었던 데 비해, 프랑스인들은 융자를 받기도 어려웠고 높은 이자를 지불해야 했다. 프랑스 왕은 점점 불어나는 빚을 갚기 위해서 점점 더 많은 돈을 더욱더 높은 이자율로 빌려야 했다. 그가 죽자 왕위에 오른(1774년) 손자 루이 16세는 1780년대에 이르러 자신이 파산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간 예산의 절반이 대출금에 대한 이자 지불금으로 묶여 있었던 것이다. 1789년 그는 마지못해 삼부회사(사제, 귀족, 제3신분으로 이뤄진 신분제 의회 - 옮긴이)를 소집한다. 위기의 해법을 찾기 위해 150년 동안 열린 적이 없던 의회를 소집한 것이다. 그리하여 프랑스혁명이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해외 제국이 무너지는 동안 대영제국은 급속히 팽창했다. 이전의 네덜란드 제국처럼 대영제국은 대체로 민간 주식회사들에 의해 설립, 운영되고 있었고, 이들 회사는 런던 주식거래소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북미 최초의 영국인 정착지는 런던 사, 플라이마우스 사, 도체스터 사, 메사추세츠 사 같은 17세기 초 주식회사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인도 아대륙을 정복한 것도 영국 정부가 아니라 동인도회사의 용병들이었다. 이 회사의 실적은 심지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넘어섰다. 런던 레든홀 스트리트에 있는 본부를 기반으로 한 회사는 막강한 인도 제국을 약 1백 년 동안 지배했다. 막대한 군대를 유지했는데, 군인이 많을 때는 35만 명에 이르러 영국 왕이 보유한 군대를 크게 상회했다. 영국 왕은 1858년에 이르러서야 인도를 국유화했고, 동인도회사의 민영 군대도 이때 국유화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가게 주인들의 나라라며 비웃었지만, 결국 그 가게 주인들에게 패배했다. 가게 주인들이 세운 제국은 역사상 최대의 제국이었다.



그 성공의 비결은 신용에 있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가신용등급은 대체적으로 높은 수준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마냥 유지되는 것은 아니기에 사회적 문제, 외교무역 등 대외적 활동의 안정적 관리가 따라야 할 것이다. 확실한 경제적 개념으로 안정적 생활을 유지하는 개인의 신용등급 관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