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필사 64

제4부 과학혁명/ 17. 산업의 바퀴(495~506쪽)

by 명희

"일명 벽돌책으로 불리는『사피엔스』, 구입한 지 2년 됐으나 쉽게 손에 안 잡혀 숙제로 남아있었다. 올해도 안 읽을 게 뻔하다. 읽어낼 무기가 필요하다. 찾은 것이 '통필사', 손필사가 필사의 정석이다만 자신 없다. 안나카레니나 통필사를 손글씨로 한 적 있는데 쉽지 않았다. 기간에 대한 약속은 없다. 하루 한 페이지든 두 페이지든 써 '완독'을 대신할 거다. -2025.01.10.-




제4부 과학혁명

14. 무지의 발견

15. 과학과 제국의 결혼

16. 자본주의의 교리

17. 산업의 바퀴

18. 끝없는 혁명

19.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20.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


[필사와 단상]

17. 산업의 바퀴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의 삶

산업혁명은 값싸고 풍부한 에너지와 값싸고 풍부한 원자재라는 전대미문의 조합을 내놓았다. 그 결과 생산성이 폴발적으로 증가했다. 그 성장은 농업에서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느껴졌다. 우리는 산업혁명이라고 하면 보통 도시의 연기 나는 굴뚝을 생각하거나 지구의 내장 속에서 땀에 절은 채 착취당하는 석탄 광부들의 처지를 생각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산업혁명은 무엇보다 제2차 농업혁명이었다.

지난 2백 년간 산업적 생산기법이 농업의 주류가 되었다. 트랙터 같은 기계들이 과거 근육의 힘으로 수행되었거나 아예 수행되지 않던 일들을 떠맡기 시작했다. 농경지와 가축의 생산성은 인공비료, 산업적 살충제, 호르몬과 약물이라는 무기고 덕분에 크게 높아졌다. 농산물은 냉장고, 선박, 항공기 덕에 몇 개월씩 저장되었다가 신속하고 값싸게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옮겨졌다. 유럽인들은 신선한 아르헨티나 쇠고기와 일본 스시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동식물까지 기계화되었다. 호모 사피엔스가 인간 중심 종교에 의해 신성한 지위로 격상될 무렵, 농장 동물들은 더 이상 고통과 비참함을 느낄 수 있는 생명체로 간주되지 않았고 기계 취급을 받게 되었다. 오늘날 동물은 공장 비슷한 시설에서 대량 생산되며, 몸체의 형태도 산업 수요에 맞게 형성된다. 거대한 생산라인의 톱니로서 전 생애를 보내며, 그 수명과 삶의 질은 해당 기업의 이익과 손해에 따라 결정된다. 산업이 동물들이 제법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도록 신경 쓰는 경우에도 그들의 사회적, 심리적 욕구는 본질적 흥미가 없다(생산량에 직접 영향이 있는 경우는 예외다).

예컨대 산란용 닭에게는 복잡한 형태적 욕구와 충동의 세계가 있다. 닭은 자기가 사는 곳을 정찰하고, 사회적 위계를 결정하며, 둥지를 짓고, 스스로의 털을 고르겠다는 강한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양계산업에서는 암탉들을 비좁은 우리에 가두어 키우며, 한 우리에 네 마리를 밀어 넣는 일도 드물지 않다. 한 마리에게 주어지는 바닥 면적은 가로 25센티미터 세로 22센티미터 정도에 불과하다. 닭들은 모이는 충분히 받지만, 영역을 주장하거나 둥지를 짓는 등의 자연스러운 활동은 할 수 없다. 사실 우리가 너무 좁아서 날개를 피거나 똑바로 설 수조차 없다.

돼지는 포유동물 중 가장 지능과 탐구심이 뛰어난 축에 속한다. 이를 능가하는 동물은 유인원뿐이다. 하지만 산업화된 돼지 농장의 축사는 너무 비좁아서 돼지가 몸을 돌리 수조차 없다(걷거나 먹이를 구하러 다니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암퇘지는 출산 후 4주 동안 밤낮으로 이런 우리에 갇혀 있다. 그 후 새끼들은 살을 찌우는 비육이 되기 위해 어디론가 옮겨지고, 암퇘지는 다음번 새끼를 임신한다. 많은 젖소는 생애의 거의 대부분을 비좁은 울타리 속에서 자기가 싼 대소변 위에서 서고 앉고 잠을 자며 보낸다. 기계장치가 이들에게 사료와 호르몬, 약품을 공급하며, 또 다른 장치가 몇 시간마다 계속 우유를 짜낸다. 그 기계들 사이에 낀 암소는 원자재를 받아들이는 입과 상품을 생산하는 젖통 이상의 취급을 받지 못한다. 복잡한 감성 세계를 지닌 살아 있는 동물을 마치 기계처럼 대하는 것은 그들에게 육체적 불편뿐 아니라 그에 못지않은 스트레스와 심리적 좌절을 안겨준다.

대서양 노예무역이 아프리카인을 향한 증오의 결과가 아니었던 것처럼, 현대의 동물산업도 악의를 기반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그 연료는 무관심이다. 달걀과 우유와 고기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짬을 내어 자기가 살이나 그 산물을 먹고사는 닭과 염소, 돼지를 생각하는 일이 드물다. 실제로 생각해 본 사람들은 종종 그런 동물은 실제로 기계와 다를 것이 거의 없어 감정이나 느낌이 없고 고통을 느낄 능력도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얄궂게도 우리의 우유 기계나 달걀 기계를 빚어내는 배로 그 과학분야는 최근 포유류와 조류가 복잡한 감각과 감정적 기질을 지녔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을 증명해 냈다. 육체적 통증을 느끼는 것은 물로, 정서적 고통도 느낀다는 것이다.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가축의 정서적, 사회적 욕구는 그것이 생존과 번식에 핵심적이던 시절에 야생에서 진화한 것이다. 예컨대 야생 암소는 다른 암소나 황소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 방법을 알아야만 했다. 그러지 못하면 생존도 번식도 할 수 없었다. 필수 기술을 학습하기 위해서, 진화는 송아지에게 다른 모든 사회적 포유류의 새끼와 마찬가지로 놀이를 하려는 강한 본능을 심어두었다(놀이는 포유동물이 사회적 행위를 학습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어미와 유대감을 형성하려는 더 강력한 욕구도 심어두었다. 어미의 젖과 보살핌은 생존에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농부가 어린 암송아지를 어미에게서 떼어내 좁은 우리에 가두고, 물과 사료를 주고, 병에 걸리지 않도록 예방접종을 하고, 충분히 자랐을 때 황소의 정자로 인공수정을 시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객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송아지는 더 이상 생존이나 번식을 위해 어미나 놀이친구와의 유대가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송아지 입장에서는 여전히 어미와 유대를 맺고 다른 송아지와 졸겠다는 강력한 욕구를 느낀다. 만일 이런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송아지는 크게 고통스러워한다. 진화심리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기본 교훈은 야생에서 형성된 욕구는 설사 더 이상 생존과 번식에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할지라도 계속 주관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이다.

산업화된 농업의 비극은 동물의 주관적 욕구는 무시하면서 객관적 욕구만 잘 챙긴다는 점이다. 이 이론이 옳다는 사실은 적어도 1950년대 이래 알려져 있다. 미국 심리학자 해리 할로가 원숭이의 발달을 연구한 덕분이었다. 할로는 갓 태어난 원숭이들을 출생 몇 시간 만에 어미와 떼어놓았다. 새끼들은 우리에 가둬진 채 인형 어미의 젖을 먹었다. 할로는 두 종류의 인형을 배치했는데, 하나는 철사로 만들어졌고 새끼들이 빨아먹을 수 있는 우유병이 달려 있었다. 또 하나는 나무로 제작해 겉에 천을 씌운 것으로 진짜 어미 원숭이를 닮았지만 개끼들에게 물질적인 자양분은 전혀 줄 수 없었다. 새끼들은 아무것도 주지 않는 천 엄마보다 영양을 공급하는 철사 엄마에게 매달일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새끼 원숭이들은 천으로 된 엄마를 훨씬 더 좋아했고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두 엄마가 가까이 놓여 있으며 심지어 철사 엄마에게서 우유를 빨기 위해 목을 뻗으면서도 천 엄마에게 매달려 있었다. 할로는 새끼들이 추워서 그러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는 철사 엄마의 내부에 전구를 장착해서 열을 내게 했다. 그러나 아주 어린 새끼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새끼는 계속해서 천 엄마를 좋아했다.

후속 연구 결과, 할로가 고아로 만든 새끼들은 필요한 모든 영양을 제공받았음에도 성장한 후 정서장애가 생겼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 원숭이들은 원숭이 사회에 결코 적응하지 못했고, 다른 원숭이와 소통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높은 수준의 불안과 공격성에 시달렸다. 결론은 뚜렷했다. 원숭이는 물질적 필요를 넘어서는 심리적 필요와 욕구를 지니고 있음이 틀림없고, 만일 이런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매우 큰 고통을 받는다. 할로의 새끼 원숭이들이 젖도 안 주는 천 엄마의 품에서 지내는 것을 더 좋아한 것은 이들이 젖만이 아니라 감정적인 유대도 찾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후 몇십 년 동안 수없이 많은 후속연구가 이루어져, 이 결론은 원숭이뿐 아니라 여타 포유류와 조류에까지 적용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오늘날 수백만 마리의 가축이 할로의 원숭이와 동일한 환경에 처해 있다. 농부들은 일상적으로 송아지를 비롯해 온갖 새끼들을 어미에게서 떼어내 고립 상태에서 사육한다.

오늘날 농장에서 기계화된 조립 라인의 일부로 키워지는 가축의 숫자는 모두 수백억 마리에 이르며, 해마다 이 중 약 500억 마리가 도축된다. 이 같은 산업적 사육방법은 농업 생산량과 인류의 식재료 양을 급증시켰다. 기계화된 농작물 재배법과 산업적 가축사육법은 현대의 사회경제 질서의 기반이다. 농업이 산업화되기 전에 들판과 농장에서 생산된 식량의 대부분은 농부와 가축을 먹이느라 낭비되었고, 생산량 중 아주 낮은 비율만이 장인과 교사, 사제와 관료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그 결과 거의 모든 사회에서 농부가 차지하는 비율은 90퍼센트를 넘었다. 농업이 산업화되자, 적은 수의 농부로도 많은 사무원과 공장 노동자를 먹여 살리기에 충분하게 되었다.

오늘날 미국에서 농업으로 먹고사는 인구는 2퍼센트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2퍼센트가 미국 인구 전체를 먹이고 남은 것은 수출할 만큼 생산하고 있다. 농업의 산업화가 없었더라면 도시의 산업혁명은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공장과 사무실에서 일할 사람이 부족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장과 사무실은 농업에서 풀려난 수십억 명의 손과 두뇌를 흡수해서 전대미문의 생산물을 봇물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오늘날 인류는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양의 철강과 의류를 만들고 구조물을 세운다, 더불어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무수한 제품을 만들어낸다. 전구, 휴대전화, 카메라, 식기세척기......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공급이 수요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문제가 생겼다. 누가 이 모든 물건을 구매할 것인가?



쇼핑의 시대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생산량을 늘려야만 한다. 상어가 계속 헤엄치지 않으면 질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만드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누군가 제품을 사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조업자와 투자자는 함께 파산할 것이다. 이런 파국을 막으면서 업계에서 생산하는 신제품이 무엇이든 사람들이 항상 구매하게 하기 위해서 새로운 종류의 윤리가 등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소비지상주의다.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핍 속에서 살았다. 그러므로 검약이 표어였다. 청교도와 스파르타인의 금욕 윤리는 가장 유명한 두 사례였다. 훌륭한 사람은 사치품을 멀리했고, 음식을 바라지 않았으며, 바지가 찢어지면 새로 사는 것이 아니라 꿰매 입었다. 오로지 왕과 귀족들만이 그런 가치관을 공개적으로 포기하고 자신들의 부를 눈에 띄게 뽐낼 수 있었다.

소비지상주의는 점점 더 많은 재와와 용역을 소비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본다. 사람들로 하여금 제 자신에게 잔치를 베풀어 실컷 먹게 하고, 자신을 망치고, 나아가 스스로 죽이게끔 한다. 검약은 치료가 필요한 질병이라고 말한다. 소비지상주의 윤리가 실제로 작동 중이라는 사실을 알려면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시리얼 상자의 뒷면을 읽어보면 된다. 내가 좋아하는 아침용 시리얼은 이스라엘 회사 텔마의 것인데 그 상자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당신은 가장 맛있는 것을 잔뜩 먹어야 합니다. 가끔은 에너지만 약간 보충하면 됩니다. 과체중에 주의해야 할 때도 있지요. 하지만 뭔가 먹어야만 할 때도 있습니다. ....바로 지금처럼! 텔마는 바로 당신을 위해 다양하고도 맛있는 시리얼을 제공합니다. 후회 없이 마음껏 드세요."

이 상자에는 '헬스 트리츠'라는 또 다른 시리얼 브랜드를 자랑스럽게 광고하는 말도 적혀 있다.

"헬스 트리츠는 다량의 곡물, 견과를 제공합니다. 맛과 즐거움, 건강이 결합된 경험을 선사하죠. 낮에 즐기는 파티, 건강한 생활방식에 맞는 스낵, 더욱 놀라운 맛을 지닌 진짜 선물."


이런 글들은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 동안 사람들을 유혹하기보다 배척받기가 더 쉬웠다. 사람들은 여기에 이기적이고, 퇴폐적이고, 도덕적으로 부패했다는 낙인을 찍었을 것이다. 소비지상주의는 대중심리학(Just do it!)의 도움을 받아, 사람들에게 탐닉은 당신에게 좋은 것이며 검약은 스스로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설득하려 무진장 애썼다.

설득은 먹혔다. 이제 우리는 모두가 훌륭한 소비자다. 우리는 실제로 필요하지 않은 상품들을 무수히 사들인다. 어제까지만 해도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것들을 말이다. 제조업자들은 일부러 수명이 짧은 상품들을 고안하고, 이미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제품을 불필요하게 갱신하는 새 모델을 발명한다. 이것은 유행을 따르려면 반드시 사야 하는 물건이다 쇼핑은 인기 있는 소일거리가 되었으며, 소비재는 가족, 배우자, 친구 관계의 핵심 매개물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같은 종교 휴일은 쇼핑 축제가 되었다. 미국의 경우 심지어 현충일도 마찬가지다. 원래는 순국선열을 추모하는 경건한 날이었지만 이제는 특별 세일을 하는 기회가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쇼핑을 하러 가는데, 어쩌면 자유를 수호했던 사람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소비지상주의 윤리가 꽃피었다는 사실은 식품 시장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전통 농업사회는 굶주림이라는 무시무시한 그늘 속에서 살았다. 오늘날의 풍요사회에서 건강에 가장 심각한 문제는 비만인데, 그 폐해는 가난한 사람이(이들은 햄버거와 피자를 잔득 먹는다) 부자들보다(이들은 유기농 샐러드와 과일 스무디를 먹는다) 훨씬 더 심각하게 입는다. 미국 사람들이 해마다 다이어트를 위해 소비하는 돈은 나머지 세상의 배고픈 사람 모두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액수다. 하지만 소비지상주의의 이중 승리다. 사람들은 너무 많이 먹고(적게 먹으면 경제가 위축될 테니) 다이어트 제품을 산다. 경제성장에 이중으로 기여하는 것이다.


소비지상주의 윤리와 사업가의 자본주의 윤리를 어떻게 일치시킬 수 있을까? 후자에 따르면 이윤은 낭비되어서는 안 되고 생산을 위해 재투자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답은 간단하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오늘날 엘리트와 대중 사이에는 노동의 분업이 존재한다. 중세 유럽의 귀족들은 값비싼 사치품에 돈을 흥청망청 썼지만, 농부들은 한 푼 한 푼을 아끼면서 검소하게 살았다. 오늘날은 상황이 역전되었다. 부자는 자신과 투자물을 극히 조심스럽게 관리하는 데 반해, 그만큼 잘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빚을 내서 정말로 필요하지도 않은 자동차와 TV를 산다. 자본주의 윤리와 소비지상주의 윤리는 동전의 양면이다. 이 동전에는 두 계율이 새겨져 있다. 부자의 지상 계율은 "투자하라!"이고, 나머지 사람들 모두의 계율은 "구매하라!"이다.

자본주의-소비지상주의 윤리는 다른 면에서도 혁명적이다. 이전 시기의 윤리 체계들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매우 힘든 거래를 제시했다. 사람들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그러려면 동정심과 관용을 키우고, 탐욕과 분노를 극복하며, 이기심을 억제해야만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너무 어려운 조건이었다. 윤리의 역사는 아무도 그에 맞춰 살 수 없는 훌륭한 이상들로 점철된 슬픔 이야기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예수를 모방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불교도는 부처를 따르는 데 실패했으며, 대부분의 유생들은 공자를 울화통 터지게 했을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본주의-소비지상주의 이념을 성공적으로 준수하며 살아간다. 새로운 윤리가 천국을 약속하는 대신 내놓은 조건은 부자는 계속 탐욕스러움을 유지한 채 더 많은 돈을 버는 데 시간을 소비할 것, 그리고 대중은 갈망과 열정의 고삐를 풀어놓고 점점 더 많은 것을 구매할 것이다.

이것은 그 신자들이 요청받은 그대로를 실제로 행하는 역사상 최초의 종교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대가로 정말 천국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야 TV에서 이미 보지 않았는가.


"호모 사피엔스가 인간 중심 종교에 의해 신성한 지위로 격상될 무렵, 농장 동물들은 더 이상 고통과 비참함을 느낄 수 있는 생명체로 간주되지 않았고 기계 취급을 받게 되었다."


KakaoTalk_20251201_103415152.jpg 책 497쪽에 있는 그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