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과학혁명/ 20.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584~끝 600쪽)
"일명 벽돌책으로 불리는『사피엔스』, 구입한 지 2년 됐으나 쉽게 손에 안 잡혀 숙제로 남아있었다. 올해도 안 읽을 게 뻔하다. 읽어낼 무기가 필요하다. 찾은 것이 '통필사', 손필사가 필사의 정석이다만 자신 없다. 안나카레니나 통필사를 손글씨로 한 적 있는데 쉽지 않았다. 기간에 대한 약속은 없다. 하루 한 페이지든 두 페이지든 써 '완독'을 대신할 거다. -2025.01.10.-
14. 무지의 발견
15. 과학과 제국의 결혼
16. 자본주의의 교리
17. 산업의 바퀴
18. 끝없는 혁명
19.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20.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
[필사와 단상]
20.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
생체공학적 생명체
생명의 법칙을 바꿀 수 있는 또 다른 기술이 있다. 사이보그 공학이다. 사이보그는 생물과 무생물을 부분적으로 합친 존재로, 생체공학적 의수를 지닌 인간이 그런 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거의 모두가 생체공학적 존재다. 타고난 감각과 기능을 안경, 심장박동기, 의료보장구 그리고 컴퓨터와 휴대전화(우리의 뇌가 지고 있는 자료 저장 및 처리의 부담 일부를 맡아준다)로 보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진정한 사이보그가 되려는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걸치고 있다. 이 선을 넘으면, 우리는 신체에서 떼어낼 수 없으며 우리의 능력, 욕구, 성격, 정체성이 달라지게 하는 무기물적 속성을 갖게 될 것이다.
미국의 군사연구기관인 국방고등연구기획청은 곤충 사이보그를 개발 중이다. 파리나 바퀴벌레의 몸에 전자칩, 탐지기, 연산장치를 심는다는 아이디어다. 그러면 멀리 있는 인간이나 인공지능이 해당 곤충의 움직임을 조절해 정보를 수집, 전송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런 파리는 적 사령부 벽에 앉아서 가장 은밀한 대화를 도청할 것이고, 거미에게 잡히지만 않는다면 적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정확하게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2006년 미 해군잠수전세터는 사이보그 상어를 개발하겠다는 의도를 발표했다. "물고기의 신경에 장치를 삽입해 그 행동을 조절한다는 목표 아래 그 같은 장치를 개발 중"이라고 했다. 개발자들의 목표는 인간의 탐지기를 능가하는 상어의 자기장 탐지 능력을 활용해 물속의 잠수함이나 기뢰가 생성하는 자기장을 식별하는 것이다.
사피엔스 역시 사이보그로 변하는 중이다. 최첨단 보청기는 '바이오닉 귀'라고도 불린다. 귀에 이식된 이 장치는 귀의 바깥에 장치된 마이크로폰을 통해 소리를 흡수한다. 장치는 소리를 걸러서 인간의 목소리를 식별하고, 이를 전기신호로 번역한다. 신호는 중추청각신경으로 다시 뇌로 전달된다.
미 정부가 후원하는 독일 회사인 '망막 임플란트는 시각장애인이 부분적으로라도 볼 수 있도록 망막에 삽입하는 장치를 개발 중이다. 환자의 눈에 작은 마이크로칩을 삽입하는 게 핵심이다. 광세포는 눈에 비치는 빛을 흡수해 이를 전기에너지로 바꾸고, 이것이 망막의 손상되지 않은 신경세포를 자극한다. 이 세포들이 내보낸 신경신호는 뇌를 자극하고, 뇌는 신호를 번역해 무엇이 보이는지를 파악한다. 현재 이 기술은 환자들이 방향을 정하고 문자를 식별하며 심지어 얼굴을 인식하게 해 줄 정도로 발전했다.
미국의 전기기술자인 제시 설리반은 2001년 사고를 당해 두 팔을 완전히 잃었다. 오늘날 그는 '시카고 재활연구소'의 도움 덕분에 두 개의 생체공학 팔을 사용한다. 새 팔의 특징은 생각만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제시의 뇌에서 나온 신경신호는 초소형 컴퓨터에 의해 전기적 명령으로 해석되고, 이 명령이 팔을 움직인다 제시는 오른팔을 움직이고 싶으면 보통사람이 무의식적으로 하는 일을 의식적으로 해야 한다. 이 팔이 수행할 수 있는 일은 생물적 팔에 비해 크게 제한적이지만, 그래도 단순한 일상적 기능은 가능하다. 이와 유사한 생체공학 팔이 오토바이 사고로 팔을 잃은 미국 군인인 클로디아 미첼에게 최근 적용되었다. 이렇게 팔을 움직이는 것을 넘어서서 거꾸로 신호를 뇌로 보내 촉감까지도 느낄 수 있는 날이 언젠가 올 것으로 과학자들은 믿고 있다.
현재로서 이런 생체공학 팔은 생물학적 원본에 못 미치지만, 앞으로 발전 가능성은 무한하다. 예컨대 원본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지니도록 만들 수 있다. 그 앞에서는 권투 챔피언도 자신이 약하다고 느낄 것이다. 게다가 몇 년마다 교체할 수도 있으며 몸에서 분리해 원격 조정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듀크 대학교의 과학자들은 최근 붉은털원숭이의 뇌에 전극을 심어 이 가능성을 입증했다. 전극을 이용해 뇌의 신호를 수집한 뒤 외부장치에 전송한 것이다. 이 원숭이들은 분리되어 있는 생체 팔다리를 생각만으로 제어하는 훈련을 받았다. 오로라라는 원숭이는 진짜 팔 두 개를 움직이는 동시에 분리 상태의 생체공학 팔을 생각으로 움직이는 법을 학습했다. 오로라는 힌두교의 일부 여신처럼 세 팔을 가졌으며, 이 팔들은 서로 다른 방이나 심지어 다른 도시에 위치할 수도 있다. 노스캐롤라니아의 실험실에 앉아서 한 팔로는 등을 다른 팔로는 머리를 긁으면서 뉴욕에서 세 번째 팔로 바나나를 훔칠 수도 있는 것이다(먼 곳에서 훔친 바나나를 여기서 먹는다는 것은 아직 꿈으로 남아 있지만 말이다). 또 다른 붉은털원숭이 아이도야는 2008년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노스캘로라이나의 의자에 앉아서 일본 교토에 있는 생체공학 다리 한 쌍을 생각으로 제어했던 것이다. 두 다리는 아이도야보다 스무 배 무거웠다.
감금증후군이란 병이 있다. 인지능력은 정상인데 신체를 거의 혹은 전혀 움직일 수 없는 희귀 질환이다. 현재까지 환자가 외부세계와 소통하는 방법은 눈을 조금 움직이는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몇몇 환자는 자기 뇌에 전극을 심어 뇌의 정보를 수집하게 만들었다. 이 신호를 단순히 동작만이 아니라 단어로 해석하려는 연구가 현재 진행 중이다. 실험이 성공한다면, 마침내 환자는 외부세계에 직접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이 기술을 이용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현재 진행되는 프로젝트 중에 가장 혁명적인 것은 뇌와 컴퓨터를 직접 연결하는 방법을 고안하는 시도다. 컴퓨터가 인간 외의 전기 신호를 읽어내는 동시에 뇌가 읽을 수 있는 신호를 내보내는 것이 목표다. 이런 인터페이스가 뇌와 컴퓨터를 직접 연결한다면, 혹은 여려 개의 뇌를 직접 연결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해서 일종의 뇌 인터넷을 만들어낸다면?
만일 뇌가 집단적인 기억은행에 직접 접속할 수 있게 된다면 인간의 기억, 의식, 정체성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런 상황이 되면 가령 한 사이보그가 다른 사이보그의 기억을 검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마치 자신의 것인 듯 기억하게 된다. 이것은 남의 기억을 듣거나 자서전을 통해 읽거나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마음이 집단으로 연결되면 자아나 성정체성 같은 개념은 어떻게 될까? 어떻게 스스로를 알고 자신의 꿈을 좇을까? 그 꿈이 자신의 마음속이 아니라 모종의 집단 꿈저장소에 존재한다면 말이다.
또 다른 삶
생명의 법칙을 바꾸는 제3의 방법은 완전히 무생물적 존재를 제작하는 것이다. 대표적 예는 독립적인 진화를 겪을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최근 머신러닝이 발전한 덕분에 이러한 컴퓨터 프로그램이 스스로 진화하는 것이 이미 가능해졌다. 이런 프로그램은 비록 처음에야 인간 엔지니어에 의해 코딩되었다고 하더라도, 이후부터는 스스로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고, 스스로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자신을 창조한 인간을 뛰어넘는 통찰력을 갖출 수 있다. 즉, 프로그램이 당초 제작자가 상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자유롭게 진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컴퓨터 프로그램은 스스로 체스를 하고, 자동차를 운전하기도 하고, 질병을 진단하고, 주식 시장에 돈을 투자하는 법을 배울 수도 있다. 모든 분야에서 점차 인류를 능가하겠지만, 반드시 서로 경쟁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형태의 진화의 압력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수천 개의 컴퓨터 프로그램이 주식시장에 투자를 하고, 각기 다른 전략을 쓰면서 일부 프로그램은 파산하고 일부는 또 억만장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인류는 경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놀라운 기술을 발전시킬 것이다. 마치 사피엔스가 침팬지에게 월스트리트를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로 컴퓨터 역시 사피엔스에게 투자전략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중 다수는 결국 그런 프로그램들을 위해 일하게 될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돈을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 뿐만 아니라, 특정 직업에 누구를 고용할 것인가, 누구에게 주택 융자를 해줄 것인가, 누구를 감옥에 보낼 것인가를 결정할 것이다.
이것들은 살아 있는 피조물일가? 이 답은 '살아 있는 피조물'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렸다. 이 컴퓨터 프로그램이 유기체 진화의 법칙과 한계와는 전혀 무관한 새로운 진화과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 다른 가능성을 상상해 보자. 당신이 뇌를 휴대용 하드드라이브에 백업해서 노트북 컴퓨터에서 실행한다고 가정하자. 당신의 노트북은 사피엔스처럼 생각하고 느낄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일까, 아니면 다른 누구일까?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완전히 새로운 디지털 마음을 창조한다면 어떨까? 컴퓨터 코드로만 구성된 그 마음이 자아의식, 의식, 기억을 다 갖추고 있다면, 이 프로그램을 컴퓨터에서 실행하면 그것은 인격체일까? 그것을 지우면 살인죄로 기소될까?
머지않아 우리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지도 모른다. 2005년 시작된 '블루브레인 프로젝트'는 인간의 뇌 전부를 컴퓨터 아나에서 재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컴퓨터 내의 전자회로가 뇌의 신경망을 고스란히 모방하게끔 하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에 따르면, 자금 모금이 적절히 이루어질 경우 10~20년 내에 우리는 인간과 흡사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인공두뇌를 컴퓨터 내부에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성공한다면, 이것은 생명이 유기화합물이라는 작은 세계 속에서 40억 년간 배회한 끝에 마침내 비유기물의 영역으로 뛰어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가 꿈조차 꿀 수 없던 방식으로 스스로의 형태를 만들어나갈 태세를 갖추고서, 인간의 마음이 오늘날의 디지털 컴퓨터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하리라는 데 대해 모든 학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능성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만일 작동방식이 다르다면, 오늘날의 컴퓨터는 뇌를 흉내 내지 못할 것이다). 2013년 유럽연합은 이 프로젝트에 10억 유로의 보조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특이점
현재로서 이런 새로운 가능성 중에서 실현된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2014년의 세상은 이미 문화가 생물학적 족쇄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중이다. 우리는 외부 세계는 물론, 우리의 신체와 마음까지 조작할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이 능력은 위험한 속도로 발달하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영역의 활동이 전통적인 방식에 안주하지 못하고 재검토의 대상이 되고 있다. 법률가는 프라이버시와 정체성 이슈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으며, 정부는 의료 및 평등 문제를 다시 생각해야 할 필요에 직면하고 있다. 체육단체와 교육기관은 페어플레이와 성취를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다. 연금기관과 노동시장은 60세가 30세처럼 활동할 수 있는 세상에 다시 적응해야 한다. 이들 모두는 생명공학, 사이보그, 비유기적 생명체 등의 난제를 처리해야 한다. 인간 유전체 지도를 처음 만드는 데는 15년의 세월과 30억 달러의 자금이 소요되었지만, 오늘날에는 몇백 달러만 들이면 몇 주일 만에 한 사람의 DNA 지도를 만들 수 있다.
맞춤 의학의 시대, 환자의 DNA에 맞춤 치료를 하는 의학의 시대는 이미 도래했다. 머지않아 당신의 주치의는 좀 더 자신 있게 당신이 간암에 걸릴 위험이 크지만 심근경색 위험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92퍼센트의 사람들에게 효과가 있는 유명한 약이 당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이 당신에게는 꼭 맞는 효과를 낸다는 것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거의 완벽한 의료의 시대로 가는 길이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다.
하지만 의학지식의 진보에 따라 새로운 윤리적 난제가 대두될 것이다. 윤리학자와 법률전문가들은 벌써 DNA 프라이버시라는 난제를 붙들고 씨름하고 있다. 보험회사가 우리의 DNA 검사자료를 요구한 뒤 그 속에서 무모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유전적 성향을 발견할 경우, 보험료를 인상할 수 있을까? 우리는 취업하고 싶은 회사로부터 이력서가 아니라 DAN 자료를 전송해 달라는 요구를 받게 될까? 고용주가 사람을 채용할 때 DNA가 더 나아 보인다는 이유로 선택해도 될까? 그런 경우 우리는 '유전적 차별'을 이유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을까? 새로운 피조물이나 장기를 개발한 회사는 그 DNA 염기서열에 특허등록을 할 수 있을까? 특정한 닭을 소유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특정한 종 전체도 소유할 수 있을까?
이 같은 딜레마는 불멸이라는 문제가 갖는 윤리적, 사회적, 정치적 함의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다. 우리가 초인간을 창조해 낼 가능성이 지니는 함의에 비해서도 그렇다. 세계인권선언, 전 세계 정부들의 의료 프로그램, 국민 건강보험 프로그램, 세계 각국의 헌법은 인간사회는 그 구성원 모두에게 공평한 의학적 치료를 제공하며 상당한 수준의 건강을 유지하게 해 줄 의무가 있다는 데 동의한다. 의료가 주로 질병 예방과 환자 치료의 문제이던 시절에는 이 규정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의학이 몰두하는 주제가 인간 능력의 강화에 있는 시대가 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모든 인간에게 강화된 능력을 부여받을 자격이 있을까, 아니면 초인간 엘리트 족속이 새로 생겨날까?
현대는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인간이 기본적으로 평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한 시대이며,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역사상 유례없는 불평등을 창조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역사를 통틀어 언제나 상류계급은 자신들이 하류계급보다 똑똑하고 강건하며 전반적으로 우수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들은 언제나 스스로를 속였다. 사실 가난한 농부에게서 태어난 아기의 지능은 황태자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의학적 능력의 도움을 받는다면, 상류계층의 허세가 머지않아 객관적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이것은 과학소설이 아니다. 대부분의 과학소설 줄거리는 우리와 똑같은 사피엔스가 빛의 속도로 달리는 우주선이나 레이저 총 같은 우월한 기술을 지닌 세상을 그리고 있다. 거기서 핵심이 되는 윤리적, 지적 딜레마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가져간 것들이다. 이런 소설은 미래를 배경으로 현재 우리의 정서적, 사회적 긴장관계를 재생산하는 데 불과하다.
하지만 미래 기술의 진정한 잠재력은 호모 사피엔스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단순히 수송 수단과 무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과 욕망까지 말이다. 영원히 젊은 사이보그에 비하면 우주선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 사이보그가 번식도 하지 않고, 성별도 없으며 다른 존재들과 생각을 직접 공유할 수 있다면 더욱 그렇다. 집중하고 기억하는 능력은 인간의 수천 배에 이르며, 화를 내거나 슬퍼하지 않는 대신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감정과 욕망을 가지고 있다면 말할 것도 없다. 과학 소설이 이런 미래를 그리는 경우는 드문데, 왜냐하면 정의상 정확한 묘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해 불능인 것이다. 어떤 슈퍼사이보그의 삶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네안데르탈인 관객을 위해 연극 <햄릿>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아마도 우리와 미래의 주인공들의 차이는 우리와 네안데르탈인의 차이보다 더욱 클 것이다. 적어도 우리와 네안데르탈인은 같은 인간이지만, 우리의 후계자들은 신 비슷한 존재일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빅뱅을 특이점으로 정의한다. 그것은 알려진 모든 자연법칙이 존재하지 않는 지점이다.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빅뱅 '이전에' 무엇이 존재했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새로운 특이점에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 세계에 의미를 부였던 모든 개념 - 나, 너, 남자, 여자, 사랑, 미움 -이 완전히 무관해지는 지점 말이다. 그 지점을 넘어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게 무엇이든 우리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
프랑켄슈타인의 예언
1818년 메리 셸리는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출판했다. 우월한 존재를 창조하려 시도한 과학자가 결국 괴물을 만들어낸다는 이야기다. 지난 2세기 동안 이 이야기는 수없이 많은 버전으로 되풀이되어, 새로운 과학적 신화의 골자가 되었다. 얼핏 보기에 프랑케슈타인 이야기는 경고 같다. 우리가 신의 행세를 하려 들고 생명을 조작하면 심한 벌을 받게 되리라는 경고 말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더욱 깊은 의미가 있다.
프랑케슈타인 신화는 호모 사피엔스로 하여금 종말의 날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만든다. 핵 재앙이나 생태적 재앙이 우리를 먼저 파괴해 버리지 않는 한, 지금과 같은 속도로 기술이 발달한다면 호모 사피엔스가 완전히 다른 존재로 대체되는 시대가 곧 올 것이다. 그 존재는 체격뿐 아니라 인지나 감정 면에서 우리와 매우 다를 것이다.
이런 생각은 대부분의 사피엔스를 극단적으로 불안하게 만든다. 우리는 미래에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 빠른 우주선을 타고 이 행성에서 저 행성으로 여행하리라고 믿고 싶다.
미래에는 우리와 동일한 감정과 정체성을 지닌 존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의 자리는 우리보다 능력이 훨씬 더 뛰어난 외계 생명체가 차지할 것이란 가능성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끔찍한 괴물뿐이며, 세상을 구하려면 그 괴물을 파괴해야만 한다는 판타지 속에서 위안을 찾는다. 우리가 그런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까닭은 그런 이야기가 우리가 모든 존재 중 가장 우수하며 우리보다 우수한 존재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개선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실패하게 마련인데, 왜냐하면 설사 신체가 개선될 수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정신은 손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 과학자들이 신체뿐 아니라 정신도 조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면 힘든 시간을 거쳐야 할 것이다. 미래의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우리보다 진실로 우월한 존재를, 우리가 네안데르탈인을 바라보듯이 우리를 무시하면서 바라볼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오늘날의 프랑켄슈타인 박사들이 이런 예언을 정말로 실현하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미래는 알 수 없다. 만일 지난 몇 페이지에서 나왔던 예측들이 모두 실현된다면, 놀라운 일일 것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한 모퉁이만 돌면 금방 일어날 것 같아 보이는 일도 미처 예상치 못한 장애로 실현 불가능해질 수 있다는 점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 결과 예상 밖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1940년대에 원자력의 시대가 갑자기 도래했을 때, 2000년쯤에는 원자력을 활용하는 다양한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는 예상이 만발했었다.
스푸트니크 위성과 아폴로 11호 우주선이 세계의 상상력에 불을 지폈을 당시, 사람들은 앞다투어 20세기말이 되면 우리의 화성과 명왕성에 건설한 우주 식민지에 살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이런 예측 중에서 실현된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한편 인터넷의 존재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디지털 존재들이 제기하는 소송에 대비하기 위해 책임보험에 가입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앞에 서술한 환상 혹은 악몽은 그저 상상력을 일깨우기 위한 자극제일 뿐이다.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은, 역사의 다음 단계에는 기술적, 유기적 영역뿐 아니라 인간의 의학과 정체성에도 근본적인 변형이 일어나리라는 생각이다. 또한 이러한 변형은 너무나 근본적이어서 사람들은 '인간적'이라는 용어 자체에 의문을 품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앞으로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2050년이 되면 일부 사람들이 이미 죽지 않는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보다 온건한 사람들은 다음 세기 혹은 다음 천 년에 대해서 말한다. 하지만 7만 년에 걸친 사피엔스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몇 세기 정도는 별것 아니다.
만일 사피엔스의 역사가 정말 막을 내릴 참이라면, 우리는 그 마지막 세대로서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의 질문에 답하는 데 남은 시간의 일부를 바쳐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인간 강화' 문제라고도 불리는 이 질문에 비하면 오늘날 정치인이나 철학자, 학자, 보통사람들이 몰두하고 있는 논쟁은 사소한 것이다. 어쨌든 오늘날의 종교, 이데올로기, 국가, 계급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은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과 함께 사라질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후손들의 의식이 작동하는 차원이 정말로 우리와 완전히 다르다면(혹은 우리의 의식을 넘어서서 우리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차원이 될 가능성이 상당하지만), 그들이 기독교나 이슬람교에 관심을 갖는다거나, 사회조직이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라거나, 성별이 남성과 여성으로 갈린다거나 하는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낮다.
그럼에도 역사상의 위대한 논쟁들은 중요하다. 적어도 이 신들의 첫 세대만큼은 인간 설계자들의 문화적 아이디어에 따라 그 모습이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이미지에 따라 창조될까? 자본주의? 이슬람? 페미니즘? 이 질문에 대한 답에 따라, 그들이 가는 길은 방향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편을 선호한다. 심지어 생명윤리 분야조차 "무엇이 금지된 행위인가?" 하는 다른 질문에 마음을 쏟고 싶어 한다. 살아 있는 사람을 상대로 유전적 실험을 하는 것은 허용되는가? 낙태된 태아에 대해서는? 줄기세포에 대해서는? 양을 복제하는 것은 윤리적인가? 침팬지는? 사람은? 이런 질문들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이대로 브레이크를 밟고 호모 사피엔스를 다른 종류의 존재로 업그레이드하는 과학 프로젝트들을 중단하리라고 생각한다면 순진한 착각이다.
이런 프로젝트들은 불멸을 향한 탐구 - 길가메시 프로젝트 -와 떼려야 뗄 수 없기 깊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에게 왜 유전체를 연구하는지, 왜 뇌를 컴퓨터에 연결하려고 시도하는지, 왜 컴퓨터 안에 마음을 창조하려고 노력하는지 물어보라. 당신이 듣게 될 표준적 답변은 십중팔구 다음과 같을 것이다. 병을 고치고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이것이 표준적인 정당화다. 아무도 여기에는 토를 달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은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것보다는 컴퓨터 속에 마음을 창조하는 것이 훨씬 더 극적인 함의를 가지지만 말이다.
길가메시 프로젝트가 과학의 주력상품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길가메시 프로젝트는 과학이 하는 모든 일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한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길가메시의 어깨에 목말을 타고 있다. 길가메시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프랑켄슈타인을 막는 것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이들이 가고 있는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스스로의 욕망 자체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일 것이다. 이 질문이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신이 된 동물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의 한구석에서 자기 앞가림에만 신경을 쓰는 별 중요치 않은 동물이었다. 이후 몇만 년에 걸쳐, 이 종은 지구 전체의 주인이자 생태계 파괴자가 되었다. 오늘날 이들은 신이 되려는 참이다. 영원한 젊음을 얻고 창조와 파괴라는 신의 권능을 가질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불행히도 지구상에 지속되어 온 사피엔스 체제가 이룩한 것 중에서 자랑스러운 업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는 주위 환경을 굴복시키고, 식량생산을 늘리고, 도시를 세우고, 제국을 건설하고, 널리 퍼진 교역망을 구축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의 고통의 총량을 줄였을까? 인간의 역량은 크게 늘어났지만, 개별 사피엔스의 복지를 개선시키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다른 동물들에게는 큰 불행을 야기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지난 몇십 년간 우리는 인간의 조건에 대해서는 마침내 약간의 실질적인 진보를 이룩했다. 기근과 전염병과 전쟁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다른 동물들의 상황은 과거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악화되고 있다. 대다수 인간의 상황이 개선되고 있지만, 이는 극히 최근의 일이며 확신하기에는 상황이 지나치게 불안정하다.
더구나 인간의 능력이 놀라울 정도로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스로의 목표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으며 예나 지금이나 불만족스러워하기는 마찬가지인 듯하다. 우리의 기술은 카누에서 갤리선과 증기선을 거쳐 우주왕복선으로 발전해 왔지만, 우리가 어기로 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과거 어느 때보다 강력한 힘을 떨치고 있지만, 이 힘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생각이 거의 없다. 이보다 더욱 나쁜 것은 인류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무책임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친구라고는 물리법칙밖에 없는 상태로 스스로를 신으로 만들면서 아무에게도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의 친구인 동물들과 주위 생태계를 황폐하게 만든다. 오로지 자신의 안락함과 즐거움 이외에는 추구하는 것이 거의 없지만, 그럼에도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
금년 1월에 호기롭게 시작한 필사!
'해는 넘기지 말자'고 막판에 달려 달려 '사피엔스 통필사'가 완성됐다.
아무리 600쪽 분량이라고 해도 타이핑 필사에 무려 1년이나 걸리다니...
'사는 게 우선이었다'라고 때깔 좋게 포장하려는데,
내 안의 거짓말 탐지기가 요란하게 울려 고백할 수밖에 없다. '게을러서'라고 ^^
그동안 방문해 라이킷 해주시고, 고운 댓글 달아주신 많은 분들 고맙습니다.
마지막에 알맹이만 뽑아 말해주는 친절한 '후기'가 있어 이것으로 저의 마무리 단상을 대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