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인지혁명/ 2. 지식의 나무(62쪽~66쪽)
"일명 벽돌책으로 불리는『사피엔스』, 구입한 지 2년 됐으나 쉽게 손에 안 잡혀 숙제로 남아있었다. 올해도 안 읽을 게 뻔하다. 읽어낼 무기가 필요하다. 찾은 것이 '통필사', 손필사가 필사의 정석이다만 자신 없다. 안나카레니나 통필사를 손글씨로 한 적 있는데 쉽지 않았다. 기간에 대한 약속은 없다. 하루 한 페이지든 두 페이지든 써 '완독'을 대신할 거다. 꼭! 2025.01.10.
제1부 인지혁명
1. 별로 중요치 않은 동물
2. 지식의 나무
3. 아담과 이브가 보낸 어느 날
4. 대홍수
2. 지식의 나무
푸조라는 신화
우리의 사촌인 침팬지는 수십 마리가 한 무리를 이뤄서 사는 것이 보통이다. 서로 관계가 되어 사냥을 같이하며 함께 어깨를 걸고 개코원숭이, 치타, 다른 침팬지들과 싸운다. 이들의 사회구조는 계층을 이루는 경향이 있다. 무리를 지배하는 개체는 거의 항상 수컷인데 '알파 수컷'이라 불린다. 다른 수컷과 암컷은 알파 수컷 앞에서 끙끙거리고 고개를 숙이면서 복종을 드러내는데, 왕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신하와 그리 다르지 않다.
알파 수컷은 자기 무리 내의 사회적 조화를 유지하려 애쓴다. 두 개체가 싸우면 개입해서 폭력을 중단시킨다. 덜 자애로운 측면도 있는데, 인기 있는 먹을거리를 독점하거나 서열이 낮은 수컷이 암컷들과 짝짓기를 할 수 없도록 막는다. 수컷 두 마리가 알과의 지위를 놓고 결정할 때는 각기 지지자들과 동맹을 맺고 싸운다. 그 지지자는 같은 무리 내의 암컷들과 수컷들이다.
동맹 구성원 간의 결속은 매일 이뤄지는 친밀한 접촉에 기반을 둔다. 껴안고 만지고 키스하고 털을 다듬어주고 서로 호의를 베푸는 행위 말이다. 선거에 출마한 정치인이 돌아다니면서 악수를 하고 아기에게 입을 맞추듯이, 최고의 지위를 원하는 침팬지들은 다른 침팬지를 껴안고 등을 두드리고 아기침팬지에게 입을 맞추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다. 알과 수컷이 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보통 육체적으로 더 강하기 때문에 아니라 더 크고 안정된 동맹을 이끌기 때문이다.
동맹은 알파 수컷의 지위를 향한 투쟁에서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거의 모든 일상 활동에서도 마찬가지다. 동맹의 구성원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먹을거리를 나눌 뿐 아니라 어려운 시기에는 서로를 돕는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결성하고 유지할 수 있는 집단의 크기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이런 집단이 가능하려면 모든 구성원이 서로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서로 만난 적도, 싸운 일도, 상대의 털을 골라준 적도 없는 두 침팬지는 상대가 믿을 수 있는 존재인지, 서로 도울 가치가 있는지, 둘 중 누구의 서열이 높은지 알지 못할 것이다.
자연상태에서 전형적인 침팬지 무리의 개체수는 20~50마리다. 집단 내 개체수가 늘어나면 사회적 질서가 불안정해지고 결국에는 불화가 생겨서 일부가 새로운 집단을 형성한다. 동물학자들의 관찰에 따르면, 1백 마리가 넘는 집단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서로 다른 무리들은 거의 협력하지 않으며, 영토와 먹을거리를 두고 경쟁하는 경향이 있다. 무리들 사이에서 지속적인 전쟁을 벌이는 경우도 학계에 보고되어 있다. 이 중에는 종족학살 사례도 하나 있는데, 한 무리가 이웃 무리의 거의 모든 구성원을 체계적으로 살해한 것이다.
아마도 이와 유사한 패턴이 원시 호모 사피엔스를 포함하는 초기 인류의 사회적 삶을 지배했을 것이다. 인간은 침팬지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본능 덕분에 친분을 맺고 위계질서를 형성하며 사냥이나 싸움을 함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침팬지와 마찬가지로 이들 원시인류의 사회성은 서로 친밀한 소규모 집단에만 적용되었다. 집단의 규모가 너무 커지면, 사회적 질서가 불안정해지고 무리가 쪼개졌다. 설령 특별히 비옥한 유역에 정착화여 원시 사피엔스 5백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 하더라도, 낯선 사람들끼리 이렇게 많이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누가 지도자가 되고 누가 어디서 사냥을 하고 누가 누구와 짝을 지어야 하는지에 대해 어떻게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겠는가?
인지혁명에 뒤이어 뒷담화이론이 등장한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더 크고 안정된 무리를 형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뒷담화에도 한계가 있었다. 과학적 연구 결과 뒷담화로 결속할 수 있는 집단의 '자연적'규모는 약 150명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150명이 넘는 사람들과 친밀하게 알고 지내며 효과적으로 뒷담화를 나눌 수 있는 보통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인간으로 이뤄진 조직의 결정적 임계치는 이 마법의 숫자 근처 어딘가에 있다. 이 임계치 아래에서는 공동체, 사업체, 사회적 네트워크, 군대 등 모든 조직이 친밀한 관계와 소문 퍼뜨리기를 주된 기반으로 삼아서 유지될 수 있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공식 서열, 직함, 법전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병사 30명을 거느린 소대, 심지어 1백 명을 거느린 중대도 공식적인 규율은 최소화한 채 친밀한 관계를 기반으로 잘 기능할 수 있다. 존경을 많이 받는 상사는 '중대의 왕'이 될 수 있으며, 임명된 장교보다도 더 큰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 작은 가족기업은 이사회나 CEO, 회계 부서 없이도 살아남고 번영할 수 있다. 하지만 150명이라는 임계치를 넘는 순간, 이런 방식으로는 일이 되지 않는다. 수천 명을 거느린 사단을 소대와 같은 방식으로 운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공 한 가족기업도 규모가 커지고 사람을 더 많이 고용하면 위기를 맞는다. 새롭게 탈바꿈하지 않으면 망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어떻게 해서 이 결정적 임계치를 넘어 마침내 수십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 수억 명을 지배하는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은 아마도 허구의 등장에 있었을 것이다. 서로 모르는 수많은 사람이 공통의 신화를 믿으면 성공적 협력이 가능하다. 인간의 대규모 협력은 모두가 공통의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 신화는 사람들의 집단적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현대국가, 중세교회, 고대도시, 원시부족 모두 그렇다. 교회는 공통의 종교적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잇다. 서로 만난 일 없는 가톨릭 신자 두 명은 함께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거나 병원을 설립하기 위한 기금을 함께 모을 수 있다. 둘 다 신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히였다고 믿기 때문이다.
국가는 공통의 국가적 신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서로 만난 적도 없는 세르비아인 두 사람은 상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다. 세르비아 민족, 세르비아 고향, 세르비아 국가의 존재를 함께 믿기 때문이다. 사업체계는 공통의 법적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잇다. 서로 본 적도 없는 변호사 두 사람은 일면식도 없는 다른 사람을 변호하기 위해 서로 힘을 합칠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법과 정의와 인권의 존재를 믿고, 수임료와 경비로 지급되는 돈을 믿기 대문이다. 하지만 이 중 어느 것도 사람들이 지어내어 서로 들려주는 이야기의 바깥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인류가 공유하는 상상 밖에서는 우주의 신도, 국가도 , 돈도, 인권도, 법도, 정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원시부족'들이 유령과 정령을 믿음으로써, 그리고 보름달이 뜰 때마다 불 주위에 모여 함께 춤을 춤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강화했다는 것을 쉽게 인정한다. 우리가 잘 깨닫지 못하는 것은 현대의 사회제도들이 정확히 그런 기반 위에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기업들의 세계를 예로 들어보자. 현대의 사업가와 법률가들은 사실상 강력한 마법사들이다. 이들과 원시 샤먼 간에 주된 차이는 현대 법률가들이 하는 이야기가 훨씬 더 이상하다는 점뿐이다. 푸조의 신화가 좋은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