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필사 8

제1부 인지혁명/ 2. 지식의 나무(66쪽~72쪽)

by 명희

"일명 벽돌책으로 불리는『사피엔스』, 구입한 지 2년 됐으나 쉽게 손에 안 잡혀 숙제로 남아있었다. 올해도 안 읽을 게 뻔하다. 읽어낼 무기가 필요하다. 찾은 것이 '통필사', 손필사가 필사의 정석이다만 자신 없다. 안나카레니나 통필사를 손글씨로 한 적 있는데 쉽지 않았다. 기간에 대한 약속은 없다. 하루 한 페이지든 두 페이지든 써 '완독'을 대신할 거다. 꼭! 2025.01.10.




제1부 인지혁명

1. 별로 중요치 않은 동물

2. 지식의 나무

3. 아담과 이브가 보낸 어느 날

4. 대홍수


[필사와 단상]

2. 지식의 나무

푸조라는 신화

오늘날 파리에서 시드니에 이르는 도시의 자동차, 트럭, 오토바이에는 소타델의 사자-남자 비슷한 아이콘이 붙어있다. 유럽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자동차 회사인 푸조에서 만든, 차들의 후드에 붙어있는 장식품이다. 푸조는 슈타텔에서 320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발렌티니 마을의 조그만 가족기업으로 시작했다. 오늘날 이 기업은 세계 곳곳에서 20만 명을 고용하고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서로 전혀 모른다. 그런데 그 낯선 사람들끼리 효율적으로 협력한 덕분에 2008년 푸조는 150만 대가 넘는 자동차를 생산해 550억 유로의 수입을 올렸다.

'푸조 SA(이 회사의 공식 명칭)가 존재한다고 말할 때, 이것은 무슨 뜻일까? 푸조 차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이 곧 회사는 아니다. 설사 세계에 있는 모든 푸조 차들이 폐차로 버려져서 고철로 팔린다 해도 푸조 SA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새로운 차를 생산하고 연례 실적 보고서를 발표할 것이다. 이 회사는 공장과 설비, 전시장을 소유하고 있고 정비공, 회계사, 비서를 고용하고 있지만, 이 모두를 협찬한다고 해서 곧 푸조가 되는 것도 아니다.

혹 재앙이 닥쳐서 푸조의 임직원 전원이 사망하고 조립 라인과 중역 사무실이 모두 파괴될 수 있겠지만, 그럴 때에도 회사는 돈을 빌리고 새 직원을 고용하고 공장을 새로 짓고 기계설비를 새로 구입할 수 있다. 푸조에는 경영자와 주주가 있지만, 이들이 곧 회사인 것도 아니다. 경영자가 모두 해고되고 주식이 모두 팔릴지라도 회사 자체는 그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푸조 SA가 불사신이라거나 불멸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만일 판사가 해산판결을 내린다면, 공장도 그대로 서 있고 노동자와 회계사, 경영자와 주주는 계속 살아 있더라도 푸조 SA는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다. 한마디로 푸조 SA는 물질세계와 본질적인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게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푸조는 우리의 집단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변호사들은 이를 '법적인 허구'라 부른다. 이것은 손으로 가리킬 수 없다. 물리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적 실체로서는 존재한다. 당신이나 나와 마찬가지로 이 회사는 그것이 운영되는 국가의 법에 제약된다. 은행계좌를 열고 자산을 소유할 수 있다. 세금을 내고, 소송의 대상이 되며, 심지어 회사를 소유하거나 거기서 일하는 사람과 별개로 기소당할 수도 있다. 푸조는 '유한(책임) 회사'라는 특별한 법적 허구의 산물이다. 이런 회사의 이면에는 인류의 가장 독창적인 발명으로 꼽히는 개념이 존재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막대한 세월을 그런 개념 없이 살았다. 역사시대 거의 내내 피와 살을 지닌 사람만이, 두 다리로 서며 큰 뇌를 가진 존재만이 자산을 소유할 수 있었다. 만일 13세기 프랑스에서 장이라는 사람이 마차를 만드는 작업장을 열었다면, 그 자신이 바로 그 사업이었다. 그가 만든 마차가 일주일 만에 부서진다면, 불만스러운 구매자는 장 개인에게 소송을 걸었을 것이다. 그가 작업장을 세우기 위해서 금화 1천 개를 빌렸는데 사업이 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개인 자산이 집과 가축과 땅을 팔아서 대출을 갚아야 했을 것이다. 심지어 자기 아이들을 노예로 팔아야 할지도 모른다.

빚을 갚지 못하면, 국가가 그를 감옥에 집어넣거나 채권자들이 그를 노예로 만들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작업장에서 비롯한 모든 의무에 대해 1백 퍼센트 책임을 져야 했다. 만일 당신이 그 시대에 살았다면, 이런 이야기를 드고는 개인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으리라. 실제로 이런 법적 상황 탓에 기업가 정신이 위축되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서 경제적 위험을 떠안는 데 겁을 냈다. 집안이 완전히 거덜 날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이는 사업은 드물었다. 사람들이 '유한회사'를 집단적으로 상상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런 회사는 회사를 설립하거나 돈을 투자하거나 경영을 맡은 사람과 법적으로 독립되어 있다. 지난 수세기 동안 이런 회사들이 경제계의 주된 행위자였고, 우리는 그 존재에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이들이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곧잘 잊는다. 미국에서 유한회사를 일컫는 기술적 용어는 'corporation(법인, 기업)'인데, 이는 아이러니다. 그 어원인 라틴어 'corpus'는 '몸'이라는 뜻인데 법인에 딱 하나 없는 것이 바로 몸이기 때문이다. 실제 몸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미국법은 이들 기업을 마치 뼈와 살을 가진 인간처럼 법인으로 취급한다.

1986년 아르망 푸조가 자동차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했을 때 프랑스의 사법제도도 그랬다. 부모에게 스프링, 톱, 자전거를 만드는 금속 가공 작업장을 물려받은 아르망 푸조는 자동차 사업을 시작하면서 유한회사를 설립했다. 회사명은 그의 이름을 땄지만 그에게서 독립되어 있었다. 소비자는 차가 고장 나면 푸조 사에게는 소송을 걸 수 있었지만 아르망 푸조에게는 아니었다.

회사가 수백만 프랑을 빌린 뒤 파산한다 해도 아르망 푸조는 채권자에게 한 푼도 갚을 필요가 없었다. 어쨌든 대출은 호모 사피엔스 아르망 푸조가 아니라 푸조 사가 받은 것이었다. 아르망 푸조는 1915년 사망했지만, 푸조 사는 아직도 잘만 살아 있다.

인간 아르망 푸조는 정확히 어떻게 회사를 창조했을까?

그 방식은 역사를 통틀어 사제와 마술가가 신과 악마를 창조해 낸 방식과 매우 비슷했다. 오늘날 수천 명의 프랑스 신부들이 일요일마다 교구 성당에서 여전히 성체(예수의 몸, 축성된 빵의 형상을 띤다 - 옮긴이)를 창조해 내는 것과도 대단히 유산하다. 그 모두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믿게 만드는 것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활동들이다. 프랑스 신부의 경우에는 가톨릭 교회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핵심이다. 신성한 복장을 한 가톨릭 신부가 적절한 순간에 엄숙하게 말을 하면, 평범한 빵과 포도주가 신의 살과 피로 바뀐다. 신부가 라틴어로 'Hoc est corpus meum(이것은 내 몸이다)'이라고 야릇한 주문을 외우면, 빵은 그리스도의 살로 전환된다. 신부가 모든 절차를 정성스럽게 준수하는 것을 본 프랑스의 경건한 가톨릭 신자 수백만 명은 축성을 받은 빵과 포도주에 정말 하느님이 임한 것처럼 행동한다.

푸조 SA의 경우에는, 프랑스 의회가 제정한 프랑스 법조문이 핵심적인 이야기이다. 프랑스 의원들에 따르면, 자격 있는 변호사가 적절한 전례와 성찬식을 모두 따른 뒤 모든 필수 주문과 맹세을 멋지게 장식된 종이에 써넣고 문서의 맨 아래에 멋지게 서명을 날인하면, 그러고서 야릇한 주문을 외우면, 짠! 새로운 회사가 하나 탄생한다. 1896년에 아르망 푸조는 회사를 세우고 싶었기에 변호사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이 모든 성스러운 절차를 따르도록 했다. 일단 변화사가 올바른 의식을 모두 행하고 필요한 주문과 맹세를 마쳤다고 선언하면, 수백만 명의 강직한 프랑스 시민은 마치 푸조 사가 정말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효과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물론 쉽지 않다. 이야기를 하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남들이 그 이야기를 믿게 만드는 게 어렵다. 역사의 많은 부분은 이 질문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어떻게 한 사람이 수백만 명에게 신이나 국가에 대한 특정한 이야기, 혹은 유한회사를 믿게 만드는가? 그러나 일단 성공하면, 사피엔스는 막강한 힘을 갖게 된다. 서로 모르는 사람 수백 명이 힘을 모아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매진할 수 있게 되기 대문이다. 우리가 강이나 나무, 사자처럼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고 치자, 그랬다면 국가나 교회, 법체계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이야기의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푸조 같은 허구는 이 네트워크 내에서 존재할 뿐 아니라 막강한 힘을 축척한다. 이런 이야기의 네트워크를 통해 사람들이 창조한 것을 학계에서는 '픽션' '사회적 구성물' '가상의 실재'라고 부른다.

가상의 실재란 거짓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거짓말이란 거기 사자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강가에 사자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거짓말에는 전혀 특별한 점이 없다. 녹색원숭이와 침팬지도 거짓말을 할 줄 안다. 예컨대 사자가 근처에 없는데도 녹색원숭이가 "주의해! 사자야!"라고 외치는 것을 관찰할 일이 있다. 거거짓말쟁이는 이런 경보를 통해 방금 바나나를 발견한 동료 원숭이를 쫓아내고 대신 과일을 가로챈다.

거짓말과 달리 가상의 실재는 모든 사람이 믿는 것을 말한다. 이런 공통의 믿음이 지속되는 한, 가상의 실재는 현실세계에서 힘을 발휘한다. 슈타델 동굴의 조각가는 사자 - 남자 수호령의 존재를 진지하게 믿었을지 모른다. 마법사 중 일부는 사기꾼이지만, 대다수는 여러 신과 악마의 존재를 진지하게 믿었다. 대부분의 백만장자는 돈과 유한회사의 존재를 신봉한다.

대부분의 인권 운동가들은 인권이 존재한다고 진지하게 믿는다. 2011년 유엔이 리비아 정부에 시민의 인권을 존중하라고 요구했을 때 거짓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령 유엔도 리비아도 인권도 우리의 풍부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일지라도 말이다. 인지혁명 이후, 사피엔스는 이중의 실재 속에서 살게 되었다. 한쪽에는 강, 나무, 사자라는 객관적 실재가 있다. 다른 한쪽에는 신, 국가, 법인이라는 가상의 실재가 존재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상의 실재는 점점 더 강력해졌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강과 나무와 사자의 생존이 미국이나 구글 같은 가상의 실재들의 자비에 좌우될 지경이다.









얼마 전 정혜진(변호사)이 쓴 『이름이 법이 될 때』를 읽었다.

'법이 되어 곁에 남은 사람들을 위한 변론'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태완이법, 구하라법, 민식이법, 김용균법 등을 담았다.

"유일한 고유명사로 태어나 비극적인 일로 죽거나 희생된 뒤 모두가 기억하는 보통명사가 된 사람들(책표지 뒷면에)."


우리가, 사회가 지키지 못해 죽은 자가 된 사람들, 고귀한 생명, 고귀한 그 이름 고유명사가 슬픔 가득한 보통명사로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 이름이 법이 된 그들, 유발 하라리가 말해준 '법적인 허구'로 화려하게 존재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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