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농업혁명/ 8. 역사에 정의는 없다(214~217쪽)
"일명 벽돌책으로 불리는『사피엔스』, 구입한 지 2년 됐으나 쉽게 손에 안 잡혀 숙제로 남아있었다. 올해도 안 읽을 게 뻔하다. 읽어낼 무기가 필요하다. 찾은 것이 '통필사', 손필사가 필사의 정석이다만 자신 없다. 안나카레니나 통필사를 손글씨로 한 적 있는데 쉽지 않았다. 기간에 대한 약속은 없다. 하루 한 페이지든 두 페이지든 써 '완독'을 대신할 거다. -2025.01.10.-
제2부 농업혁명
5. 역사상 최대의 사기 132
6. 피라미드 건설하기 160
7. 메모리 과부하 190
8. 역사에 정의는 없다 208
[필사와 단상]
8. 역사에 정의는 없다
모든 사회는 상상의 위계질서를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그 위계질서가 반드시 동일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올까?
왜 인도의 전통 사회는 카스트에 따라, 오토만 사회는 종교에 따라, 미국 사회는 인종에 따라 사람의 등급을 나눌까? 대부분의 경우 각각의 위계질서는 일련의 우여한 역사적 상황에서 비롯되었고,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여러 집단들이 저마다 이해관계를 갖게 됨에 따라 영속성을 얻고 세련되어졌다.
예컨대 많은 학자의 추측에 따르면,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가 형성된 것은 약 3천 년 전 인도아리아 사람들이 인도 아대륙을 침략해 현지인들을 복속시켰을 때였다. 침략자들은 계층화된 사회를 건설하여, 자신들이 윗자리(사제와 전사)를 차지하고 현지인은 하인과 노예로 삼았다.
수가 적었던 침략자들은 특권적 지위와 고유의 정체성을 잃을까 봐 두려웠다. 그런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그들은 사람들을 카스트로 구분했고, 각 카스트는 특정한 직업을 갖거나 사회에서 특정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카스트마다 법적 지위, 특권, 임무가 각각 달랐다. 카스트를 뒤섞는 사회적 상호작용이나 결혼, 심지어 식사를 함께하는 행위는 금지되었다. 이런 구별은 단순히 법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 신화와 관습의 고유한 일부분이 되었다. 지배자들은 카스트 제도가 우연한 역사적 발전이 아니라 영원한 우주적 실재를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청결과 불결의 개념은 힌두교의 핵심요소로서, 사회적 피라미드를 지탱하는 데 이용되었다. 경건한 힌두교는 다른 카스트 사람들과 접촉하면 개인적으로 오염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그렇게 될 수 있으므로 그런 행위는 혐오해야 한다고 배웠다.
이런 아이디어는 힌두교에 특유한 방식이 아니다. 역사를 통틀어 거의 모든 사회에서 오염과 청결 개념은 사회 정치적 구분을 강제하는 데 주된 역할을 했으며, 수많은 지배계급이 특권을 유지하는 데 이를 활용했다. 그런데 오염에 대한 두려움은 사제와 대공들이 짜 맞춘 완전한 사기는 아니었다. 그것은 생물학적 생존 메커니즘에 기원을 두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인간은 병자나 시체처럼 질병을 옮길 가능성이 있는 존재를 본능적으로 혐오한다. 따라서 어떤 집단이든 격리하고 싶다면 그들이 오염의 원천이라고 모든 사람에게 믿게 만드는 것이 최선의 방업이다. 여성, 유대인, 집시, 게이, 흑인 등 어떤 집단이든 말이다.
힌두교의 계급제도와 여기에 수반되는 청결의 법칙은 인도 문화에 깊이 새겨졌다. 인도아리아인의 침략이 잊힌 지 오랜 뒤에도 인도 사람들은 카스트 제도를 계속 믿었고, 카스트를 뒤섞는 데서 오는 오염을 혐오했다. 카스트라고 해서 변화를 겪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큰 카스트는 그보다 하위의 카스트로 분화했다. 원래 네 개였던 카스트는 마침내 자티(문자 그대로 '출생')라 불리는 3천 개의 각기 다른 집단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확산으로 시스템의 근본원리가 바뀐 것은 없다. 모든 사람은 특정 계급으로 태어나고, 그에 따른 규칙을 조금이라도 위반하면 해당 개인과 사회 전체를 오염시킨다. 한 사람의 자티는 그의 작업, 먹을 수 있는 음식, 사는 곳, 결혼할 수 있는 상대를 결정한다. 결혼은 자신과 같은 카스트 사람하고만 할 수 있는 게 보통이고, 그들이 낳은 아이는 부모의 지위를 상속받는다.
새로운 직업이 출현하거나 새로운 집단이 대두되면, 반드시 어떤 종류의 카스트로 인식되어야만 힌두교 사회에서 정당한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하나의 카스트로 인정받는 데 실패한 집단들은 말 그대로 버림받았다. 극도로 계층화된 사회에서 이들은 가장 낮은 지위조차 가지지 못했다. 불가촉천민이라고 불린 이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격리되어 살아야 했으며, 쓰레기 더미를 뒤져서 찌꺼기를 걸러내는 등 굴욕적이고 구역질 나는 방식으로 근근이 먹고살아야 했다. 심지어 최하위 카스트의 사람들도 이들과 섞이거나 식사를 함께하거나 몸이 닿는 것을 피했다. 결혼은 말할 것도 없다. 현대 인도에서도 결혼과 직업은 카스트 제도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인도의 민주정부가 그런 차별을 철폐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며 카스트를 섞어도 오염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힌두교도들을 설득해 왔지만 모두 허사였다.
모든 사회는 상상의 위계질서를 기반으로 한다.
정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수십 수백 명의 의식이 동일화 돼, 차별도 정당화되는 상상 속의 질서, 가상의 질서가 무섭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옛말이다. 가족 구성원이 모두 명문대 출신, 세습되는 富 등, 태생의 차별로 형성된 위계질서가 사회의 중심이 되고 있다.
법적 제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처럼, 우리 사회 곳곳에도 악순환의 고리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