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인류의 통합/ 10. 돈의 향기(265~270쪽)
"일명 벽돌책으로 불리는『사피엔스』, 구입한 지 2년 됐으나 쉽게 손에 안 잡혀 숙제로 남아있었다. 올해도 안 읽을 게 뻔하다. 읽어낼 무기가 필요하다. 찾은 것이 '통필사', 손필사가 필사의 정석이다만 자신 없다. 안나카레니나 통필사를 손글씨로 한 적 있는데 쉽지 않았다. 기간에 대한 약속은 없다. 하루 한 페이지든 두 페이지든 써 '완독'을 대신할 거다. -2025.01.10.-
9. 역사의 화살
10. 돈의 향기
11. 제국의 비전
12. 종교의 법칙
13. 성공의 비결
[필사와 단상]
10. 돈의 향기
화폐는 여러 곳에서 여러 차례 만들어졌다. 화폐가 발달하는 데는 기술적인 돌파구가 필요하지 않았다. 이것은 순수한 정신적 혁명이었다. 여기에 얽혀 있는 것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새로운 상호 주관적 실체였다.
화폐는 주화와 지폐가 아니다. 화폐는 재화와 용역의 가치를 체계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끔 사람들이 기꺼이 사용하려고 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그 목적은 재화와 용역을 교환하는 데 있다. 돈이 있으면 각기 다른 물품(사과, 신발, 이혼)의 가치를 쉽고 빠르게 비교할 수 있고, 하나를 다른 것과 쉽게 교환할 수 있으며, 부를 편리하게 쌓아둘 수 있다. 화폐의 유형은 매우 다양했다. 가장 친숙한 것이 주화, 즉 무언가가 새겨진 표준화된 금속 조각이다. 하지만 주화가 발명되기 훨씬 전부터 화폐는 사용되었다. 금속이 아닌 다른 물건을 사용해서 번영한 문화는 많았다. 조가비, 가축, 가죽, 소금, 곡식, 구슬, 천, 약속어음..... 별보배고등 껍데기는 아프리카, 남아아시아, 동아시아, 오세아니아 전역에서 약 4천 년간 화폐로 쓰였다. 20세기 초 영국령 우간다에서는 별보배고등 껍데기로 세금을 납부하는 것도 가능했다.
현대의 교도소나 전쟁포로수용소에서는 담배가 돈의 역할을 한 적이 종종 있었다. 심지어 담배를 피우지 않는 수인들도 담배를 지불수단으로 기꺼이 받아들였다. 다른 모든 재화와 용역의 가치를 담배로 걔산하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한 사람은 수용소에서 사용된 담배 화폐를 이렇게 묘사했다.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화폐가 있었고 누구도 그 가치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것은 담배였다. 모든 물품의 가격은 담배로 제시되었다. '평상'시, 그러니까 가스실에 입장할 후보들이 정기적으로 계속 들어오는 기간에는 빵 한 덩이는 담배 열두 개비 값이었다. 3백 그램짜리 마가린 덩어리는 30개비, 시계는 80~2백 개비, 알코올 1리터는 4백 개비였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주화와 지폐(은행권)는 화폐의 유형으로서는 드문 것이다. 세계 전체의 화폐 총량은 약 60조 달러지만 주화와 지폐의 총액은 6조 달러 미만이다. 돈의 90퍼센트 이상, 우리 계좌에 나타나는 50조 달러 이상의 액수는 컴퓨터 파일에 들어 있는 전자데이터를 다른 파일로 옮기는 방식으로 이뤄지지, 실제로 돈을 주고받지는 않는다. 가령 집을 살 때 가방에 가득 찬 지폐로 지불되는 것은 범죄자밖에 없다. 사람들이 전자 데이터를 받은 대가로 재화와 용역을 기꺼이 거래하려 하는 한, 그것은 반짝이는 주화나 빳빳한 지폐보다 낫다. 더 가볍고 부피가 더 작고 기록하기도 더 쉽다.
복잡한 상업 체계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모종의 화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화폐 경제하의 제화공은 다양한 종류의 구두에 매겨지는 가격만 알면 족하지, 신발과 사고, 신발과 염소의 교환율을 암기할 필요가 없다. 사과 재배 전문가도 돈만 있으면 사과를 좋아하는 제화공을 찾을 필요가 없는데, 돈은 모든 사람이 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돈의 가장 기본적 속성일 것이다. 사람들이 항상 돈을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 역시 항상 돈을 원하기 때문이고, 그것은 곧 당신이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모든 것과 돈을 교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제화공은 당신에게서 돈을 받으며 언제나 만족할 텐데, 그가 실제로 원하는 것이 사과든 염소든 이혼이든 무엇이든 돈을 주고 그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돈은 거의 모든 것을 다른 거의 모든 것으로 바꿀 수 있게 해주는 보편적인 교환수단이다. 전역군인이 자신의 군인수당으로 대학수업료를 낸다면 체력이 지력으로 바뀐 경우다. 공작이 자신의 신하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재산을 판다면 땅이 충성심으로 바뀐 경우다. 의사가 진료비를 받아 변호사를 고용하거나 판사에게 뇌물을 준다면 건강이 재판으로 바뀐 경우다. 심지어 성관계를 구원으로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15세기에 창녀들이 남자와 자는 대가로 받은 돈으로 가톨릭 교회의 면죄부를 사곤 했으니 말이다.
이상적인 형태의 돈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게 해 줄 뿐 아니라 부를 축적할 수 있게도 해준다. 세상에는 저장이 되지 않는 귀중한 것이 많은데, 가령 시간이나 미모가 그렇다. 어떤 것은 짧은 시간만 저장이 가능하다. 딸기가 그렇다. 내구성이 더 좋은 것들도 있지만, 공간을 많이 차지하고 비싼 시설이 필요하며 손이 많이 간다. 예컨대 곡물은 몇 년씩 저장할 수 있지만 그러려면 커다란 창고를 지어야 하고 쥐와 곰팡이, 물, 불, 도둑을 막을 필요가 있다. 돈은 그것이 종이든, 컴퓨터 비트든, 혹은 별보배고등 껍데기든,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준다. 별보배고등 껍데기는 썩지 않고, 쥐의 입맛에 맞기도 않으며, 불에 타지 않고, 금고에 넣어둘 수 있을 정도로 작다.
부를 이용하려면 단순히 저장해 두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이동시킬 필요가 있다. 어떤 형태의 부, 예컨대 부동산 같은 것들은 전혀 이동할 수 없다. 밀과 쌀 같은 재화는 어렵사리 운반이 가능하다. 화폐가 없는 세상의 부유한 농부가 먼 지방으로 이주한다고 상상해 보자. 그의 부는 집과 논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농부는 이 중 어느 것도 가지고 갈 수가 없다. 이것을 많은 양의 쌀과 바꿀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많은 쌀을 수송하기는 쉽지 않으며, 수송비도 비싸게 들 것이다. 돈을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준다. 농부는 재산을 팔고 별보배고등 껍데기 한 자루를 받아서 어디든 쉽게 가지고 갈 수 있다. 돈은 부의 전환과 저장, 이동을 쉽고 값싸게 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복잡한 상거래망과 역동적 시장이 출현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만일 돈이 없었다면 상거래망과 시장의 규모와 복잡성, 역동성은 매우 제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돈은 거의 모든 것을 다른 거의 모든 것으로 바꿀 수 있게 해주는
보편적인 교환수단이다."
'어른'이라는 표현이 턱 없이 부족할 만큼 그분은 너무나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분 말씀 중에 하나를 옮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