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한 번째 ©Myeongjae Lee
쉰 번째 ©Myeongjae Lee
KE1326, A321-neo(A321-200)
20:20, 탑승구 5, 좌석 47F
<헤로니모>에 등장하는 유대교 랍비는 이런 이유로 디아스포라의 본질을 '고통에서 시작하지만 혁신을 낳을 수 있는 존재들'이라고 했을 것이다.
「당신의 수식어」_더 큰 세상을 향한 디아스포라 이야기, 전후석(창비, 2021)
토요일 오후, 아내와 함께 연극 <불투명 인간>을 봤다.
제주와도 연관이 있는 난민과 디아스포라에 관한 연극이었다. 묵직한 주제를 과하지 않게, 나름 담담하면서도 재미있게 잘 다룬 것 같다. 본인을 실제 제주 라씨의 시조라고 소개한 시리아 출신 난민 라ㅇㅇ씨의 출연도 신선했다. 작명소에서 20만 원 주고 ㅇㅇ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그의 말에 모두가 웃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무언가 이들에게 작은 도움이 될 수 있는 자원봉사 활동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마음에 이런 작은 변화와 동기를 가져다주었다면,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공연이 아닐까.
연극에는 제주 토박이, 이주민(from 육지), 난민(from 해외)이 함께 출연했다. 이방인들의 유입이 제주의 문화를 더 풍성하게 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토요일에 봤던 음악공연도 육지에서 이주해 정착한 예술가들이 없었다면 만나보기 어려운 무대였을 것 같다. 이러한 '함께'를 통해 제주의 문화가 더욱 꽃을 피우고, 특화되고, 돋보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비록 귤밭은 없지만, 아내 덕분에 작년 즈음부터는 제주에서 귤을 사 먹는 일이 거의 없다. 아내의 직장 동료나 지인들이 틈틈이 마음 써주는 귤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많아지고 있다. 그 마음들이 훈훈하고 고맙다. 아이들도, 귤을 많이 먹는 편은 아니지만, 집에 귤이 풍족한 것이 좋은 모양이다. 제주에 나름 잘 정착해가고 있는 것 같아 고마우면서도, 아내에게는 여러모로 늘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다.
쉰한 번째.
2024년의 마지막 비행이었다. 재력과 체력이 더 충분했었다면, 좀 더 자주 다녀올 수 있었겠다 아쉬움도 없지 않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의 최선이었다.
가족들을 보러 가는 길은 늘 좋았다. 제주에 갈 때면 열심히 일하고 '보상'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가족들을 보고 오는 길도 좋았다. 육지로 돌아가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화가 나거나, 그 시간이 더디 오도록 시간의 옷자락을 붙들고 마냥 늘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날도 많았지만, 그래도, 항상, 무언가로 채워져서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언젠간 이 시기도 지나가고 추억이 되어 웃으며 얘기할 날이 오겠지. 잘 살자."는 아내의 메시지처럼, 힘이 들기는 해도, 언젠가는 좋은 기억, 추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이 시간을 잘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12.29. 비극적인 항공기 사고로 유명을 달리 하신 분들의 명복을 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겪고 있을 유가족 분들을 위해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