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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 Sep 17. 2024

과일로 화보를 어떻게 찍어요?

에디토리얼 화보 촬영 후기 (파인애플을 그네에 태운 이유)

요기요에 몸 담으며 푸드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maat'을 창간하고 1년 반 정도 콘텐츠를 만들었다.


안타깝게도 앱 내 프로덕트로서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기가 어려운 상황이었고, 콘텐츠의 가치를 아는 이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인스타그램을 통해 잘 보고 있다는 피드백을 받는 정도였다.


출발은 좋았다. 요기요가 추구하는 '즐거움'의 키워드를 다르게 풀어보자는 취지로 시작했다.


비주얼로 크리에이티브를 풀어낼 수 있는 게 우리 팀의 강점이었으니, 이를 살리면 기존과 다른 콘텐츠가 나오지 않을까, '맛있는 즐거움'을 제대로 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전문 푸드 스타일리스트와 포토그래퍼가 팀원으로 함께 했기 때문에, 촬영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업무 또한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다. 식재료를 화보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면서 정보를 제공하고, 비주얼의 강점을 살린 콘텐츠를 추구했으니 본격적인 에디터 커리어를 시작하면서 나에게는 굉장히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음식에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니고, 미식가도 아니지만 누구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쉬운 소재이면서도, 식재료 고유의 색감과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일은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공부할수록 넓은 세계인 것은 분명해 보였기에, 이를 재밌게 풀면 좋겠다 싶었다. 다시 말해  '오, 이런 것도 있었어?', '와, 이건 참 재밌다!' 정도의 느낌을 독자가 얻는다면 성공한 거라 생각했다.


앱이 리뉴얼되면서 매거진 프로덕트는 앱에서 사라졌고, 조직 개편 등의 이유로 운영은 이미 오래전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간 만들어온 콘텐츠는 네이버 포스트와 인스타그램 계정에 남아있고, 무엇보다도 나의 머리와 마음 깊이 남아있다. 그냥 혼자 알고 있기엔 아까우니까, 어떻게 기획하고 제작했는지 회고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로 가장 좋아하는 결과물을 소개한다.


배경은 바야흐로 늦봄. 기획 당시에는 여름 시즌을 준비하며 아이템을 고민했다.


가제는 과일의 운동에너지였다.

과일로 뭔가를 해보고 싶었다.

놀이터 모래밭에 운 좋게 장난감이 있어 과일을 배치.

과일이 주는 통통 튀는 생기와 컬러감을 전하기에 아주 좋은 계절이라 생각했다.


첫 의도는 과일 x 스포츠를 엮어서 하나씩 4컷 화보로 표현하려 했다.


예를 들면

-라임 x 테니스... (테니스 공을 떠올리며)

-수박은 볼링공으로

-다이빙을 연상하며 레몬을 물에 빠뜨리겠다고 했다.(말이 되니? 수조가 필요하다고.)


팀장님께 받은 피드백은 날카로웠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아요."


맞다. 내가 봐도 어떻게든 4개의 과일-스포츠신을 짜 맞추려던 게 억지스러워 보이고, 4컷을 관통하는 맥락이랄 게 부족했다.


"과일을 놀이터로 보내버리면 어때요? "

팀장님의 아이디어는 한 줄기 빛 같았다.

내가 가려워한 부분을 탁 긁어주셨다.

기존 기획안을 엎어버리고 새롭게 판을 짰다.

기준은 이랬다.


4컷을 다 다른 기구를 활용해 표현할 수 있는가?

과일의 다양한 shape을 보여줄 수 있는가?

현실적으로 구현 가능한가?


이 세 가지 기준을 잡고 디테일하게 파고들었다.



과일과 놀이기구를 매칭해 보자!


1) 놀이기구를 이용하는 사람의 모습과 비슷하다거나 행위와 연관 지을 수 있는 모양의 과일을 찾는다.


2) 4컷에 각각 들어갈 메인 과일의 색깔이 겹치지 않도록 한다.


3) 과일만 쓸 건지, 여러 과일을 한 컷에 같이 담을 건지 고민한다.


과일과 놀이터를 동시에 구상해야 했다.

어떤 기구에서 찍을 것인지를 먼저 고민하고-  이에 맞게 과일의 종류와 장면을 담을지 다시 짰다.



딱 맞는 놀이터 로케이션부터 찾아야 했다.


1) 제약 없이 접근 가능한 공공 놀이터일 것

 (물론 실사용자가 놀이터를 이용할 때 방해하지 않도록 촬영하기)


2) 내가 찍고 싶은 기구가 한 곳에 모두 모여 있는 곳이면 베스트.

한 곳에서는 촬영이 어려워 사무실 근처 작은 놀이터도 로케이션으로 추가했다.


3) 컬러감이 잘 느껴지는 놀이터일 것.
-그네도 쇠사슬 줄이면 안 됨
-가급적 컬러감이 살도록 우레탄 바닥이면 좋겠다
-너무 칙칙한 컬러의 기구가 아니어야 함 (like 산스장이나 옛날 놀이터)


4) 미끄럼틀: 직선형이거나 쇠 소재의 미끄럼틀 말고, 나선형으로 컬러 들어간 플라스틱(?) 소재일 것

(쇠 소재는 반사도 심할뿐더러 다른 컷과 대비해 튈 수 있음)


이색 놀이터, 놀거리 많은 놀이터 등으로 숱하게 검색해 딱 맞는 한강 놀이터를 찾았다.

블로그 후기를 보며 어떤 기구가 있는지 파악했다. 그네가 있는 곳을 최우선 순위로 놓고 찾다가,

가장 활용도 높은 곳을 발견했다.




이 기구에 어떤 과일을 올릴 것인가?


내가 찾은 한강 놀이터에는

그네

위로 걸어 다닐 수 있는 그물망

구름사다리

우레탄 클라이밍 벽이 있었다.

다른 놀이터에 있던  '미끄럼틀'은 다른 놀이터에서 찾았다. 나선형에 노란색이었다.


그네에는 한 사람이 보통 타니까, 가장 사람 같아 보이면 좋겠다 싶어 '파인애플'을 택했다.


팔다리가 있는 건 아니지만 몸통과 꼭지로 나뉜 게 사람의 몸통과 다리를 대신할 것 같기도 하고, 단순히 1단으로 둥근 과일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길기 때문에 적합하다고 봤다.


그물망에서는 오히려 가벼운 과일보다 무게감 있는 과일이 올라가 통통 튀었을 때 의외성이 재미를 가져다줄 거라 봤다. '그물'이라는 키워드에 착안해 '그물' 패턴이 들어간 과일을 활용하면 좋겠다 싶어 멜론과 수박을 매칭했다. 


구름사다리 어렸을 적 구름사다리에 매달려 본 기억이 났다. 원숭이 같기도 한 것이, 팔을 쭉 늘어뜨린 장면을 상상하면 '바나나'가 가장 어울리는 과일이라고 단번에 결정지었다.


클라이밍 벽 클라이밍 벽에 박힌 인공 돌멩이(?)는 석기시대 초콜릿 같기도 하고 울퉁불퉁했다. 그렇다면 울퉁불퉁하면서 인공 돌멩이와 비슷한 사이즈의 과일을 섞어보자! 싶었다. (물론 이맘때 나오는 과일이어야만 구할 수 있었다)




+최적의 날짜와 시간대에 촬영!

1) 자연광이 잘 나는 아침

2) 아이들이 어린이집 가서 놀이터에 나올 확률이 적은 아침

3) 비 소식이 없는 날


최종 결과물


(왼) 던지는 나 (오) 결과물

육중한 무게(?)로 전혀 튕겨 본 적 없을 것 같은 수박, 멜론이 가볍게 튕기니 재밌는 모습이 나왔다. 한 개의 수박을 떨어뜨려 그 반동으로 다른 두 과일이 튀어 오르는 순간을 포착했다.


약간의 흔들림을 포토그래퍼가 잘 잡아준 덕분에 생생하게 정말 튀어 오른 것처럼 나왔다. 정말 3개의 과일이 공중에 띄워진 상태가 골고루 잘 나와야 아래 동그란 그림자도 나오니 몇 번을 던졌는지 모른다.



파인애플&그네 샷

각도를 아래에서 위로 향하게 찍으니 재밌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파인애플이 정말 그네를 타는 것 같았다. 파인애플은 그네에 고정이 안되니 낚싯줄로 그네 줄과 함께 묶었다.


바나나&구름사다리 샷

점점 바나나가 햇빛에 노랗게 되어서 하마터면 못 쓸 뻔했다.  휘어짐의 정도가 적당하고 맨 위 바나나 꼭지가 구름사다리 손잡이 부분에 잘 걸치도록 지지했다.


하나만 걸칠 수도 있었지만, 사람이 구름사다리를 두 팔로 매달리니 바나나도 두 송이 걸쳤다.





클라이밍 & 울퉁불퉁 과일 샷

비스듬한 벽에 과일이 떼굴떼굴 굴러갈까 봐 걱정했다.최대한 인공 돌멩이 위에 과일이 세워져야만 했다.


촬영 전에는 과일을 자르면 단면이 벽에 붙어 지지될 줄 알았으나,

생각보다 흐물거려 무너질 수 있고, 과일 자체의 shape이나 그림자가 덜 보여 평면적으로 보일 것 같았다. 그래서 포토그래퍼님이 그냥 올려보자 하셔서 용과, 아보카도 등을 올렸다.


미끄럼틀 & 둥근 과일 샷

딱 내가 원하던 '과즙미 팡팡'의 느낌이 나왔다.

파란 우레탄 바닥과 노란 미끄럼틀, 그리고 미끄럼틀에서 쏟아져 나오는 오렌지, 레몬, 라임, 참외, 자두.


다양한 컬러 + 크기의 과일을 골고루 준비했다. 너무 매끈한 것만 있으면 재미없어서 표면이 거친 오렌지나 줄무늬가 있는 참외도 한 개 포함했다.


플라스틱 우유 박스에 과일을 한가득 담았다. 포토그래퍼는 미끄럼틀이 끝나는 지점에서 기다리고 있고, '던지세요!' 신호가 떨어지면 나는 카메라 프레임에 걸리지 않는 쪽에 서서 박스에 있는 과일을 후두두- 부었다.

우당탕탕탕! 소리를 내며 과일이 굴러내려가는 게 얼마나 웃기던지! 떨어지는 과일이 서로 겹치지 않으면서 역동적으로 보일 수 있게 여러 번 찍었다. 그럴 때마다 이쪽저쪽 굴러 떨어진 과일을 주워 담고, 박스에 다시 옮겨 담아 붓기를 반복했다. 포토그래퍼는 과일이 더 멀리 굴러가지 않게 연신 발로 막아주었다. (몸은 힘들어도 정말 재밌었단 말이지)




촬영하며 느낀 점

야외 촬영의 묘미.. 는 '변수'에 있구나!


촬영 현장, 피사체의 상태(특히 식품이라면 더욱이 변화에 대비가 필요하다), 촬영에 어떤 액션이 들어간다면 이를 위한 사람의 움직임까지도 디테일하게 고민해 보는 시간이었다.


생각했던 구도대로 안 나오면 다른 대안을 빠르게 생각해야 했다.

분명 일기예보에서는 맑은 날씨라 했는데 갑자기 구름이 끼면 구름이 걷힐 때까지 기다렸다.

과일이 무르면 땅에 내동댕이 쳐지면서 상처가 나거나 깨질 수 있으니 주의해야 했다. 그러므로 넉넉히 여분의 과일을 준비했다.

 바나나 같은 경우 후숙이 굉장히 빨리 되는 친구라서 갈변되기 전에 싱싱할 때 빨리 찍는 게 관건.


+  현장에서 '우연'도 큰 힘이 될 수 있다.

생각지 못했던 장난감이 모래장에 놓여있어서, 덕분에 재미있는 커버샷도 건졌다.


쉬운 촬영이란 없다. 온갖 변수란 변수에 대응해야 하고, 순간의 상황 판단력이 매우 중요하다. 이 작업을 함께 하는 동료와 호흡을 맞추고, 함께 의사결정을 빨리 내려야 작품의 퀄리티를 높일 뿐만 아니라, 한정된 시간 안에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



마치며


콘텐츠의 핵심 메시지와 내가 전하고자 하는 맥락의 일관성은 언제나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촬영 스타일과 구성을 결정할 때 큰 기준점이 된다. 제작자와 소통할 때에도 흔들리지 않고 조율할 수 있는 방향키가 된다.


동시에 추상적인 아이디어에서 그치지 않고 '현실적인 구현 가능성'을 늘 염두하고 촬영을 준비해야 한다는 걸 몸소 느꼈다. 최고의 결과물을 내기 위해 제작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기 보다는 에디터도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대안을 내거나,  아이디어를 (기존 기획의도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내는 게 중요하구나 싶었다.


수레에 과일을 잔뜩 싣고 나무 그늘 아래에서 숨을 고르던 순간, 그때의 뜨거운 햇빛과 파란 하늘, 잠깐씩 불어오던 바람. 그 모든 기억이 선연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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