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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Feb 01. 2024

모두가 우리처럼 되고 싶어 해

자기계발서 보다 이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1. 아무도 모른다. 해보기 전에는


언젠가 바닷가의 패션쇼 촬영에 함께 했던 적이 있다. 쇼가 끝난 호텔의 밤은 잠들 줄 모른다. 공식적인 뒤풀이가 끝나면 못다 한 이야기들이 작은 방으로 흩어진다. 우연히 옆 방의 모임에 끼게 되었는데 스태프들 중 막내 디자이너도 있었다. 디자이너 선생님의 지시를 따르며 손발이 안 보일 정도로 소품들을 나르던 그에게도 드디어 한숨 놓을 시간이 온 것이다.

학생 신분으로 디자이너 밑에서 실습을 선택한 그는 밤낮 구분 없이 재봉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학업과 병행하려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니 박봉이나 밤샘작업까지는 견딜 수 있다고 했다. 정작 흔들리는 때는 이런 경우다. 한 번은 학교 시험 전날 디자이너 작업실 주변에 게스트하우스 방을 예약해 놨다. 그 시간을 내기 위해 밤을 새워 미친 듯이 일을 몰아서 했다. 그리고 기진맥진하다 시피해서 공부하러 도착. 본격적인 시험 준비를 해볼까 하는 순간 어김없이 전화가 울린다. 긴 생각할 것도 없이 작업실로 불려 간다. 여기서 시험을 따지면 이도저도 안 된다. 그리고 또 반복. 그녀는 거의 울먹이듯 푸념하다가 잠들었다.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전화 얘기라면 내가 일하는 직종도 만만치 않다.

방송작가라고 하면 대본을 쓰는 일인 줄 알았다. 틀린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대개 1년 이상 섭외전화부터 소품, 방청객, 자료조사 온갖 잡일을 거쳐야 글을 쓸 기회가 주어진다. 출근 첫날부터 내게 주어진 일은 섭외였다. 아침부터 대중교통 끊기는 시간까지 전화통을 붙들고 있고, 몇 달을 참다가 겨우 나간 친구 모임에서 눈치 보며 전화를 받고 대처해야 하는 일상. 심지어 집 전화를 받을 때에도 습관적으로 방송국 이름을 대곤 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말을 쉽게 하지만,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그 사이의 고군분투를 잘 다룬 영화가 있다.


KT Tunstall -suddenly I see

https://www.youtube.com/watch?v=bG_xdkGrwSA


2. 지금 내 모습은 진짜가 아니라고?


로스쿨 합격도 마다하고 유명 패션지 편집장의 세컨드 비서로 취직한 앤디의 진짜 목표는 패션지에 글을 쓰는 작가가 되는 것이다. 패션계의 거물인 미란다가 누구인지 내 알 바 아니었고, 패션계에 뼈를 묻을 것도 아닌데 굳이 옷에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다만, 1년만 꾹 참고 비서 일을 하면 원하는 일을 구하는데 유리한 조건에 서게 된다. 유명인들과 접촉도 늘 것이고 어떤 기회가 올지 모른다. 그 자리에 가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들이 널리고 널려있다.


스텔레토 힐과 펜슬스커트로 활보하던 동료들이 촌스런 스커트를 비웃어도, 미란다가 보풀난 스웨터 운운하며 아침마다 전신 스캔을 해도, 셀룰라이트가 생길까 봐 아무도 손 안대는 클램차우더를 가득 담던 앤디에게도 변화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런데, 정말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1년 일할 건데 패션까지 싹 다 바꿔야 하는 것인가.

각자에게 정답은 다 다를 것이다. 다만, 그 업계를 존중한다는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감당해야 한다.

어떤 일을 하든, 심지어 내가 원하는 직종에 들어왔다고 해도 기대했던 일들만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을 만난다. 미란다가 주체하는 파티에서 두 권의 책에 달하는 게스트들의 얼굴과 신상을 달달 외워서 현장에서 귀띔해 주는 일이 과연 저널리스크가 되는 목표에 어떤 도움이 될까?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가는 곤란해진다. 지금 주어진 일도 제대로 못 하는데, 어느 날 그토록 원하는 큰일이 온다고 해서 갑자기 잘하게 될까. (나 역시도 많이 실수했던 부분이다)

앤디는 옷차림을 바꾸고 남자친구를 실망시키고 친구들에게 싫은 소리 들어가면서 일에 매달린다. 퍼스트 비서 에밀리를 능가할 정도로 변해간다.     


3. 그토록 싫어했던 그 상사는 나쁘기만 했을까


누구나 한 번쯤은 지독한 상사를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미워서 이런 일까지 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짙어지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앤디 역사 미란다를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나이젤에게 하소연하자 돌아오는 말은 이렇다.

"너 지금 일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징징대는 거야. 그는 그의 일을 할 뿐이야"


대개는 일을 진행시키려고 괴롭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편하려는 본성이 있고, 일을 추진시키려면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가 필요하다. 그 상사는 내가 미워서라기보다는, 그의 일을 잘하고 싶을 뿐이다. 반복되고 감정이 쌓이다 보면 그저 일로 받아들일 것들을 과잉해석하고 있을 때가 많다.


시간이 지나 이 영화를 보니, 리더의 입장에 선 미란다가 다시 보인다. 비행기 예약을 못 했다고 크게 실망했다고 강조하며 자존심을 자극하거나, 앤디가 더 일을 잘한다는 것을 은근히 두둔하며 퍼스트 비서 에밀리 대신 파리에 간다고 직접 말하라고 종용하는 장면들.

리더십에 탁월한 사람들이 잘 알아보고 놓지 않는 것들이 있다. 앤디는 항상 자신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변명했지만, 실은 그 안에 잠재된 욕구가 있었고 미란다는 그걸 알아본 것이다. 그 욕망을 건드려서 같은 팀으로 계속 끌고 가는 것에 탁월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지독하던 상사들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 강하게 한다는 니체의 말처럼, 이를 악물고 버티다 보면 한 단계 올라와 있다. 그때는 몰랐지만 세월이 지나야 알 수 있는 일이다.


4. 진짜로 원하는 건 성공이야 자아실현이야?


 앤디는 계속 미란다가 원하는 선택을 따라간다. 자신은 못 한다고 했지만 퍼스트에게 직접 내가 간다고 통보하고 파리로 날아간다. 명품 드레스, 셀럽들, 파티, 그리고 파리의 눈부신 화려함에 취해 이제 이 세계에 들어온 듯한 기분도 느낀다. 미란다와의 호흡도 이제 익숙해져 간다. 그도 이제 자신을 인정해 주는 것 같다.

"너를 보면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


칭찬의 의미가 더 크겠지만,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이렇게 말해주면 반갑지가 않다. 그건 아니라고 부인하는 앤디. 자신은 미란다가 나이젤을 내친 것처럼은 못 한다고 선을 그었지만 미란다는 확인해 준다. 앤디가 이미 똑같이 에밀리에게 했다는 사실을.

정말 앤디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까?  앤디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이 영화에서 가장 결정적인 장면이 펼쳐진다.

https://www.youtube.com/watch?v=-qdHE9-8spU


"모두가 우리처럼 되기를 원해(Everybody wants to be us)"

미란다가 말하는 절묘한 타이밍에 맞춰 차는 파티장앞에 도착한다. 선글라스를 한껏 올려 쓰고 온 세상이 동경하는 그 미소를 준비한 후,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향해 나아가는 성공한 셀럽의 순간이 펼쳐진다. 이미 후임 편집장에게 밀려났더라도 끝까지 멋진 굿바이를 보여줘야 한다.


그 이후 앤디의 선택에 대해서는 찬반이 분분하다. 그렇게 무책임하게 떠났다고 탓할 수도 있고, 자신이 원하는 길을 선택했다고 박수를 보낼 수 있다. 누군가는 실망했을 테고, 또 어떤 이는 안도했을 것이다.

남들이 바라는 성공을 원하면 미란다의 길을 가면 되는 것이고, 좀 다른 길을 원한다면 앤디처럼 할 수 있다.

나는 아니라는 확신이 섰다면 그 순간에 지체 없이 끝낼 수 있는 태도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버티는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있고, 남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이 얻는 것이 다를 테니 자신을 잘 살필 일이다.    


이 영화의 훌륭한 지점은 그 두 사람이 함께 가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존중한다는 것인데, 앤디는 미란다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더라면 일 잘하는 사람으로 존경받지 지금처럼 가십이 대상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한다. 미란다 역시 자신을 떠나긴 했지만 앤디를 고용하지 않으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일갈한다.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들과도 일 해보고 겪을 필요가 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보지 못하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006>는 디즈니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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