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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LP바

우리들의 밤은 계속된다

by 베리티

'미드나잇 플레져'라는 가게가 있다. 한 밤중의 어떤 심정을 자극하는 간판이다. 그냥 지나칠만한 단어에도 '미드나잇'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설렘이 깃드는 마법이 생긴다. 평범한 하루라면 잠들 시간이지만, 깨어서 뭔가 다른 것을 한다는 기대감이 감돈다. '미드나잇 카우보이', '미드나잇 인 파리스'. 그래서 영화 제목에도 많이 쓰였을까. 아, 한 때 음악 듣는 클럽을 장악하던 그 곡이야말로 이 구역의 최고 제목이다.

DJ Shadow의 'Midnight in a perfect world'.

앞에 들었던 음악을 모두 평정하는 듯한 전주가 공간을 울리는 것도 좋았지만, 그 곡을 들으면서 걸으면 정말 그런 순간이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영화 'Once'에서 여주인공이 워크맨의 배터리를 사러 한 밤중에 나가는 장면을 좋아한다. 매일매일의 반복되는 일상 사이에서도 음악을 들으며 동네의 밤을 거니는 길은 빛난다. 결국, 영화 'Begin Again'에서 존 카니 감독은 마크 러팔로의 대사를 빌어 고백한다. "난 이래서 음악이 좋아. 지극한 따분한 일상의 순간까지도 의미를 갖게 되잖아. 이런 평범함도 어느 순간 진주처럼 아름답게 빛나거든. 그게 바로 음악이야"


'한밤 중'에 어딘가를 나간다는 것을 꽤 오래 멀리하고 지냈다. 한밤 중 아니라, 밤 10시가 되어도 거리는 깜깜하고 적막했다. 팬데믹의 위력은 그렇게 일상에서 '한밤중'을 지웠다. '라이브 음악'도 지우고, '버스킹'도 몰아내고, 친구들끼리 이따금씩 가던 'LP바'도 잠재웠다. 알다시피, 음악 듣는 바는 2차로 가는 경우가 많아서 밤 10시까지 제한하면 사실상 손님들을 놓치는 셈이다. 따져보면 음악 바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곳은 더더욱 그렇다.

제한이 풀린 첫 주말, 동네에 있는 LP 바를 나가보기로 했다. 그동안 여러 가게들이 사라졌지만, 다행히도 여전히 간판의 불이 들어와 있었다. 문을 여니 커다란 스피커, 나무 테이블, 바를 지키고 있는 사장님. 모두 그대로였다. 2년 만의 발걸음. 원래 주말이면 늘 손님들이 북적이던 곳이었는데, 한 두 테이블과 바 자리의 손님이 전부였다. 너무 북적이는 것도 걱정되던 차라 마스크를 새삼 체크하면서 자리를 잡았다.


큰 스피커로 울리는 음악들을 듣고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한다. 듣고 싶은 곡이 떠올라서 메모지를 달라고 했더니, 사장님이 한참을 찾다가 주신다. 그동안 신청하는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서였을까. 물론 사장님의 선곡을 쭉 듣고 있는 것도 충분히 좋다. 그런데, 몇 곡이라도 신청하면 분위기가 좀 달라진다. 감이 있는 사장님이라면 그날의 손님 취향을 파악하고 그 곡 외에도 부지런히 좋아할 만한 곡들을 틀어주신다. AI의 알고리즘과는 비교할 수 없다. 사람 간의 커뮤니케이션이다. 언젠가 유튜브 검색을 할 때 가끔 전혀 생뚱맞은 것을 검색한다는 친구의 얘기가 떠오른다. 그 알고리즘에 지배되기 싫다는 것이다. 추천은 모두 빠져들기 좋지만 AI에 혼란을 줘야 한다는 농담에 같이 웃었다.

음악 듣기는 점점 편리해진 시대인데, 제대로 듣는 것도 그만큼 좋아졌을까. 언젠가 블루투스 스피커로 듣던 곡이 오디오로 들으니 달랐던 경험을 하면서, 좀 귀찮아도 오디오로 들어야겠다 생각은 했는데, 막상 편하니까 그렇게는 잘 안된다. 물론 편리해진 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핸드폰 하나로 원하는 음악을 언제라도 들을 수 있는 건 반가운 일이다. 그래도 가끔은 좋은 스피커로 듣는 느낌을 대체할 수는 없다.


늦은 가을에 들을만한 사이키델릭한 락 넘버들이 몇 곡 나오고 내가 신청한 곡들도 다 틀어주시고는 옛 가요로 분위기 전환. 이문세, 박광현, 푸른하늘, 그리고 이상은의 '언젠가는'.

전주가 나오자 다른 테이블 언니들의 환호성이 들려온다. '아, 이거 내 18번인데!' 그리고 신청곡이 마구 늘어난다. 다들 나누던 얘기들을 멈추고 조용히 노랫말을 따라 부른다.

뉴욕의 작가 프란 레보비츠는 예술의 최고 분야는 음악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듣는 사람의 감정과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장점은 다른 분야의 예술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라는 이유다. 음악을 흔히 시간의 예술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갖는 회한과 추억은 세월이 갈수록 더 짙어지기 때문에 그 장점도 점점 더 커지는 것 같다.

예전에 이곳에서 '봄여름가을겨울'의 곡을 듣다가 떠오르는 친구가 있었다. 핸드폰이 없어서 교실에서 쪽지가 오가던 시절, 언젠가 같이 음악 듣고 싶다는 메모가 날아왔다. 이름도 없이 날아든 쪽지. 누굴까를 한참 생각했는데 내가 예상 못했던 친구였다. 가끔 아는 척 정도 하고 긴 얘기 없이 지내던 반 친구였는데, 그 쪽지를 계기로 그 친구의 집까지 따라가게 되었다. 그리고 LP판을 꺼내어 들려준 음악이 '봄여름가울겨울'이었다. 그 친구는 내가 음악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왜 그땐 그런 걸 물어보지 않았을까. 누군가가 어떤 음악으로 기억되는 건 멋진 일이다.

계속 이어지는 가요의 항연 속에서 정점은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로 이어진다. 와! 왜 이 곡을 좋은 스피커로 들을 생각을 못 했을까. 다들 그런 것일까. 테이블이 조용해진다. 진짜 멋진 작품은 환호가 아니라, 말을 잊게 하는 것이다. 소리에 귀를 기울일 뿐이다.


돌아오는 길, 한 밤의 동네 골목은 조용하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밤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작년 가을 버스 타고 가다가 셔터가 내려진 거리를 바라보던 때가 떠오른다. 학생들로 북적이던 젊음의 거리가 숨을 죽이고 움츠러든 풍경. 예전에 그곳에 머물던 활력이 사라져서 낯설게 보였다. 거리마저 아픈 사람의 모습을 닮았다. 뉴스로 보는 장면들이었지만, 그 거리의 기억이 있던 사람들에게는 또 다르게 다가왔을 것이다.

시끌벅적한 밤거리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누구나 갖고 있는 자신만의 '미드나잇 플레져'가 지켜지는 건강한 밤이었으면 좋겠다. 저녁에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가고 싶은 LP바가 있다고 했다. 약속한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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