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어디에 있는 거야?
줄거리
70여 m의 상공. 해와 바람과 비와 눈이 그대로 쏟아지는 어느 굴뚝에 두 남자, '누누'와 '나나'가 산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 가까스로 붙들고 있는 건 그들이 '굴뚝을 기다리고 있다'는 목적뿐, 서로의 이름, 굴뚝의 존재에 대한 믿음조차 흐릿해져 가는 누누와 나나 앞에 방문객들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굴뚝 한 개당 10원을 받고 일한다는 굴뚝 청소부인 '청소', 그다음에는 청소를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지능 기반의 청소 로봇 '미소', 마지막으로는 굴뚝의 메시지를 전하러 찾아왔다는 가상현실 속 부캐 '이소'. 누누와 나나는 굴뚝을 만날 수 있을까.
이미지 제공 극단 고래
공연이 시작되면 무대 위에 두 남자가 등장한다. 허름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두 사람은 우스꽝스러운 모양으로 스텝을 밟으며 나타난다. 마치 패트와 매트, 덤앤더머처럼. 엉뚱한 말과 행동으로 웃음을 주는 콤비 캐릭터들이 떠올라 킥킥대던 것도 잠시, 예의 그 우스꽝스러운 스텝을 밟은 이유가 두 사람 중 한 명의 발이 아파서란 사실이 드러나면 어쩐지 웃음이 나질 않는다. 나머지 한 사람은 친구를 따라 했을 뿐이란다. 이윽고 두 사람은 고통의 원인을 찾기 위해 질문과 답을 주고받지만, 어째 두 사람의 말들은 도돌이표처럼 제자리를 맴돈다.
그러다 그들의 시선이 신발로 쏠린다. 발이 아프지 않은 사람이 친구에게 네 발을 아프게 하는 원인은 신발일 것이라고 말한다. 신발을 벗으면 아프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이 놈의 신발, 도무지 벗겨지질 않는다.
문제의 신발은 1막이 끝날 즈음 벗겨진다. 그래서 2막이 시작되면 두 남자는 맨발로 다시 나타난다. 하지만 여전히 우스꽝스러운 스텝을 밟고 있다. 신발을 벗었지만 아직도 발이 아프기 때문이다. 고통의 원인을 제거해도 상처가 회복되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일까? 아니면 애초에 발을 아프게 한 것이 신발이 아니었던 것일까?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는 시종일관 이런 식으로 질문을 남긴다. 지극히 단순한 일상의 언어들을 비틀어 반복하며 새로운 의미를 싣는다. 대신 그 의미란 것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아 오히려 일상과 멀게 느껴지고, 관객이 마음껏 상상하고 추리하게 만든다.
<굴뚝을 기다리며>는 유명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오마주한 작품으로, 그 안에 노동자들의 고공농성을 녹여냈다고 한다.
이 정보를 작품에 적용하면 주인공 '누누'와 '나나'는 고공농성 중인 노동자일 것이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굴뚝은 그들이 일하던 곳의 굴뚝일 테고, 그 아래에는 '누누'와 '나나'의 동료들이 있을 수도 혹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을 수도. '누누'의 발을 아프게 한 '신발'은 그를 굴뚝으로 내몬 노동 혹은 노동 환경일 수도. 아니면 '나나'의 삶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신(神)을 나타낸 것일 수도.
이미지 제공 극단 고래
분명한 건 '누누'와 '나나'가 너무 오래 굴뚝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굴뚝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굴뚝에서 굴뚝을 기다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나나'는 굴뚝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반면 '누누'는 조금씩 자신과 확신을 잃어간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하루에 한 획씩 벽면에 그려놓은 선들이 빼곡하게 쌓일 만큼 오랜 날을 거기 머물렀지만 굴뚝을 만나지 못한 탓이다. 심지어 서로의 이름,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만큼 오랜 시간을 머물렀는데도 말이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흐르고 굴뚝 대신 다른 방문객들이 굴뚝을 찾는다. 맨 먼저 찾아온 사람은 '청소'다. 굴뚝 청소부다. 굴뚝 한 개당 10원을 받고 일하는데 300개를 넘게 청소해야 한다. 원래 굴뚝 청소부는 2인 1조로 일해야 하지만 '청소'는 혼자다. 그러면서 '청소'는 우는 아이에게는 선물을 주지 않는 산타를 나쁜 사람이라고 소리친다. 우는 아이는 원하는 게 있어서 우는 건데, 이미 원하는 것을 모두 가져 울 필요가 없는 아이에게만 선물을 주다니. '청소'의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청소'가 굴뚝 청소를 마친 뒤 자리를 떠나고, 시간이 더 지나 이번에는 '미소'가 나타난다. 그는 사람이 아니다. 로봇이다. '청소'를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지능 기반의 로봇. '미소'는 '누누'와 '나나'에게 '청소'가 노동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하는데, '미소'가 반복하는 '해방'이란 단어 속에서 '방해'라는 단어가 들린다. 그렇다. '미소'는 인간의 지시를 따르지만, 그 지시를 따르는 데 방해가 되는 인간은 밟아야지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미소'가 떠난 다음에는 '이소'가 찾아온다. '이소'는 여자 고등학생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는 유튜버에서 이른바 갓생을 살며 인기를 끄는 인플루언서다. 하지만 '누누'와 '나나'를 찾아온 '이소'는 그 자체로 사람은 아니다. 대중이 호응하는 모습만 편집해 담은 화면 속 부캐인 것이다. 그 증거로 '이소'는 유일하게 무대 밖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들어와 '누누' '나나'와 대화하면서도 내내 굴뚝의 난간 바깥, 허공에 머문다. 어느 순간 이를 깨달은 '누누' '나나'가 깜짝 놀라 '이소'에게 묻는다. "너는 어디에 있는 거야?"
이 때문에 앞서 '청소'와 '미소'는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노동하는 존재로서 '누누' '나나'와 어쨌든 크게 다르지 않은 위치에 서 있는 대조적으로, '이소'는 '누누' '나나'와는 접점이 없는 존재처럼 보인다.
이때 연우소극장이라는 공간이 훅 하고 객석의 나를 '누누'와 '나나' 그리고 '이소' 사이에 가져다 놓는다. 연우소극장은 무대가 바닥과 일치하고 객석이 그보다 높이 올라가는 식으로 설계되었다. 덕분에 보통 관객이 배우를 올려다보게끔 되어있는 여타 극장과 달리 객석과 무대 위 배우의 시선이 맞닿는다. 그러니까 관객들이 모두 '이소'처럼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허공에서 '누누'와 '나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미지 제공 극단 고래
그래서 2023년 5월에 연우소극장에서 <굴뚝을 기다리며>를 본 나는 반성한다. '누누'와 '나나'의 몸부림에 안쓰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절대 그들을 100% 이해할 수는 없는 거리에서, 어쩌면 그들의 삶을 단순 드라마로서만 소비하고 있는 게 아닌가.
쓰다 보니 어째 분위기가 묵직해졌지만, 전반적으로 객석에 웃음이 가득 차는 작품이다. '누누' '나나'가 주고받는 말장난(물론 '누누'와 '나나'에겐 장난이 아니겠지만), '청소' '미소' '이소'가 연달아 선보이는 화려한 퍼포먼스(?) 덕분이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말을 아끼겠지만, 배우들 모두 다재다능함을 마음껏 뽐내며 열연한다. 한편 희곡과 연기 외적의 요소도 기대 이상이다. 무대 구조 상 막을 오르내리거나 무대 장치를 교체할 수 없어 대신 영상과 조명으로 시간의 흐름, 배경 등을 설명하는데 미적으로도 아름답고 연출도 실감 나 관객이 몰입하게 만든다.
아쉬운 점이랄까, 궁금한 점이 있다면 남자 배우가 연기하는 로봇 '미소'는 왜 여성용 메이드 의상을 입고 빨간 립스틱을 발랐는지, '이소'와 같은 신세대는 항상 아이돌을 좋아하는 여자 고등학생으로 묘사되는 지다. 전자의 이유가 단순히 남자 배우의 여장으로 분위기를 환기하거나 웃음을 줄 요량이었다면 아쉽고 다른 의미가 있다면 그게 궁금하다. '이소'를 그린 방식 역시 요즘 대부분의 미디어가 MZ 세대가 제일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MZ 세대를 그리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럼에도 <굴뚝을 기다리며>는 볼 가치가 있는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노동자의 투쟁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살아 숨 쉬는 이야기를 무대 옮기는 건 어렵다. 임의로 결말을 맺어서도, 함부로 감정을 더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굴뚝을 기다리며>가 노동자의 고공농성이라는 소재를 무대에 펼쳐낸 방식은 사려 깊다. 답을 정하지 않고 관객들이 생각하게 만드는 방식 역시 같은 이유로 뜻깊다. 물론 그렇다고 <굴뚝을 기다리며>의 모든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을 필요는 없다. 이 작품은 노동자의 고공농성을 다뤘다거나 <고도를 기다리며>를 오마주 했다는 정보를 모르고 보더라도 글과 연출,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므로.
공연 정보
러닝 타임 | 105분
공연 기간 | 2023. 5. 25~6. 11.
극장 | 연우소극장
출연진 | 홍철희(나나 역) 오찬혁(누누 역) 사현명(청소 역) 김재환(미소 역) 김예람(이소 역)
예매 | 네이버예약, 인터파크티켓
이런 분들이 보기에 좋아요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연극이 보고 싶은 사람
관극 후 곱씹을 만한 거리가 남는 연극이 보고 싶은 사람
노동 현실에 관심이 있는 사람
인간의 삶을 꿰뚫는 시선이 보고 싶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