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노르웨이 숲』,『직업으로서의 소설가』외 2
하루키 소설의 매력은 무엇일까?
『노르웨이 숲』
책을 구경하러 서점에 가거나 차트를 자주 살핀다. 유 퀴즈 덕분에 정세랑 작가의 책이 많이 보인다. 이미 읽히는 작가라 그 폭발력이 더하다. 수많은 콘텐츠 중에서, 출판물 중에서, 소설 중에서, 어떤 작가의 책과 닿는다는 건 경이로운 일이다. 한 작품이 좋으면 또 다른 작품으로 손을 뻗어 확장하고 몰입한다. 그렇게 우리는 한 사람의 세계관으로 입장한다. 정세랑 월드에 빠진다. 차트와 월드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 처돌이 친구의 인생 책을 읽었다.
하루키 소설의 매력은 무엇일까? 일단 술술 읽힌다. 문장이 유려하고 섬세하다. 일상을 담담하게 말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하다. 사소한 이야기를 나열하지만, 책을 덮었을 때 사소하지 않은 여운이 있다. 치열하고 깊이 있는 사색이 아닌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로 말을 걸어온다.
우리는 살면서 죽음을 키워 가는 것이다. [...]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상실의 시대. 누구나 사랑을 잃은 슬픔이 있다. 상실의 경험이 있다. 끊어지고 사라진 상실감은 울음으로 내 몸에 아로새겨진다. 그때는 너무 아파서 모른다. 왜 이렇게 눈물이 흐르는지. 왜 이렇게 무너져 내리는지. 속절없다. 시간이 흐른 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어떤 감정과 사건이 불쑥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그렇게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미련도 아니고, 망가진 관계를 회복하려는 애씀도 아니다. 그저 시간이 흘러야 꺼내볼 수 있는 마음을 문득 마주하는 일이다. 왜 ‘사랑을 말하기 좋을 때는 사랑에서 멀어졌을 때’라 하지 않나. 어느 순간 그 거리를 가늠하고, 내게 일어난 사랑과 이별, 죽음을 이해하는 법을 알아간다. 그것은 결국 나를 알아가는 일이고, 현재 내게 주어진 일상을 좀 더 진실하게 사랑하는 방식이다.
인간은 외로운 존재다. 사랑 앞에 결코 담백할 수 없는 존재다. 누구나 경험하는 사랑과 상실의 감정을 소설이 툭 건드린다. 너와 내가 같은 시간을 헤쳐왔고, 비슷한 감정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너만의 고민과 아픔이 아니라고 공감으로 손을 내밀어 준다. 우리의 소중한 닿음이 상실의 감정을 조금은 엷게 만들어 준다고 믿고 싶다.
직업으로서의 작가가 된다면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대단한 영감이나 어떤 계기가 있어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닙니다. 직업으로서의 작가를 어렴풋이 상상해보거나 글로 먹고사는 걸 소망한 적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회적이고 단편적인 마음이었습니다. 닿을 수 없는 뜬구름을 잡는 이야기, 보이지 않는 신기루를 좇는 일에 가까웠습니다.
글은 누구나 쓸 수 있고, 누구나 출간할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습니다. 전문성과 특별한 자격을 요구하는 분야, 직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글을 꾸준히 쓰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작가, 전업작가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글을 한 번 써보는 거랑 글로 먹고산다는 건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은 이걸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있음에도 작가가 되겠다고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쓴다는 건, 꾸준히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는 건 생각보다 더 많은 품과 끈기, 성실, 집요함을 요구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는 작가조차 흔들리는 날이 많습니다. 가뜩이나 그런 불안한 마음인데 주위의 의심스럽고 불안한 시선마저 견뎌내야 합니다. “네가 글을 쓴다고? 네가?, 글은 뭐 아무나 쓰니, 작가는 아무나 되는 줄 아나, 일은 하기 싫고 뭐라도 붙잡고 있기 위해 그런 거 아니냐, 정신 좀 차려라……” 특히 나를 아끼고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런 걱정과 불안감을 격렬히 내비칩니다. 현실을 직시하라고 끊임없이 다그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머뭇거리고 망설였습니다. 좋아서 하는 일과 업으로 하는 일은 분명 다르니까요. 지금도 자신은 없습니다. 작가로 살아가는 혹은 살아남는 일은 불확실하고 아주 비효율적입니다. 정말로 글 써서 밥벌이하기 힘든 현실입니다. 그래서 직장을 다니며, 최소한의 생계유지는 가능한 상태에서 글을 써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짧은 시간, 일하며 그런 가능성을 더듬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직장을 다니면서도 충분히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되긴 합니다. 꾸준히 글을 쓴다는 건 몸과 마음의 건강이 받쳐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일을 그만두고 돈이 되든 안 되든 글 적으며 살겠다고 결심한 계기도 몸과 관련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몸이 삭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교대근무의 고충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면역력이 떨어지는 몸 상태가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열망을 가진 또 다른 자아를 갉아먹었습니다. 때마침 직장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컸습니다. 의미 없는 일을 하며 길지 않은 인생을 더는 낭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더 멀어지기 전에, 내 몸과 정신이 더 상하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심연에서 아물거리는 그 무엇을 더는 외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현명하지 못하고 현실적이지 않은 선택인 거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근데, 살아보니 인생이란 그렇더군요. 결코, 현명하게만 살 수 없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며 살 수밖에 없더군요. 생각하는 성과나 만족을 얻지 못하면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일도 있을 겁니다. 아니, 돌아가야만 되겠죠. 어떻게든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철없는 20대가 아니잖아요. 최소한 내 몫은 책임져야만 하는 어른이 어느 순간 되었잖아요. 그 사이 고통스러운 현실과 방황 역시 제가 감내할 부분이겠죠.
즐겁지도 않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인생이란 아무리 살아봤자 별로 즐겁지 않기 때문입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그래도 말입니다.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면, 어제보다 오늘 죽음에 더 가까워지는 게 우리 인생이라면, 가끔은 마음 가는 대로 살고 싶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할 수밖에 없다면, 이왕이면 하고 싶은 일을 해보고 후회하고 싶습니다. 결과를 떠나 최선을 다하고 싶고 무엇보다 놓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이러한 선택으로 잃는 것들 역시 있습니다. 열악하지만 안정적인 직장, 통장을 스쳐 지나가는 월급, 좋아하는 사람과의 연애,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는 결혼은 더 멀어지는 결정입니다. 제가 포기하고 책임져야 할 부분이겠죠. 지금 제게는 그런 것들보다 좋은 글을 꾸준히 쓰고 싶다는 열망, 제 안에 작게나마 맺혀 꿈틀거리는 그 마음이 훨씬 더 소중합니다.
직장을 다니며 책상 앞에 앉는 힘을 길렀습니다. 꾸준히 기록하며 글 쓰는 근육을 키웠습니다.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엉덩이 힘과 고집을 잃지 않았습니다. 꾸역꾸역이라도 앉아 있다 보면 뭐라도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고독하고 배고픈 시간을 버틸 수 있는 적은 돈을 모았습니다. 일하며 버티고 버틴 그 시간 덕분에 비로소 글을 써야겠다는 결정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마음먹었으니 가봐야죠. 무엇이 있을지 몰라도 마음이 이끄는 그 세계로.
"쓸 때는 그냥 대강 씁니다. 나중에 고칠 생각으로요."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국문과를 갔어야 하나. 문예 창작과를 갔어야 하나. 자기 위안인지도 모르겠다. 뭐라도 배웠으면 조금은 달랐을까 하는. 배워서 했으면 좋아할 수 있었을까. 꾸준할 수 있었을까. 배워서, 경험해서 나쁠 건 없으니 어떤 식으로든 도움은 되었겠지? 지금 와서 학문으로 배울 수 없는 노릇이니 책을 통해 답을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읽고 싶은 부분만 읽어내며 스스로 주문을 거는지도 모르겠다. 사는 일이 그렇듯, 쓰는 일도 배워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꾸준히 읽고 쓰려 노력하다 보니 어렴풋이 글쓰기의 얼개에 가닿을 때가 있다. 이 책 저 책에서 강조하는 내용이 중첩되는 경우가 있다. 스킬이나 비법이 아닌, 자세와 마인드 말이다. 하루치 성실. 결국, 그게 전부구나, 싶다. 타고난 재능도 쓰고 싶다는 열정도 꾸준함을 이길 수 없다. 계속해서 쓰는 사람일수록 엉덩이 힘을 강조한다. 그들이라고 사실 별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정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면, 황석영이라면, 김영하라면 뭔가 다를 거야’라는 마음은 독자가 품은 환상일 뿐이다. 저마다의 디테일 차이는 있겠지만, 뭉근하게 써 내려가는 게 공통일 뿐이다. 교과서만 봤다는 서울대생의 교과서적인 대답과 다를 게 없더라도 그게 사실이다.
물론 방법 차이는 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미친 듯이 써 내려가는 게 좋은지. 한 문장, 한 문장 찬찬히 이어가는 게 좋은지. 짧은 글을 적을 때는 상관없을지 모르겠다. 근데 소설을 적거나, 직업으로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전자가 좋지 않을까 부쩍 생각한다. 아니, 전자여야 계속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꾸역꾸역 적어내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 생각으로 적는 것이 아니라, 리듬과 감각으로 써야 한다는 걸 점점 느끼고 있다.
쓸 때는 그냥 대강 씁니다. 나중에 고칠 생각으로요. 그래도 비유는 잘 고치지 않아요. 너무 머리를 쓰면 오히려 어려워지니까. - 무라카미 하루키,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고치면 되니까. 뭐라도 일단 적어야지. 쓰는 일만 그런 게 아니고 모든 일이 그렇겠지. 대강 시작하는 용기와 꾸준한 성실. 어쩌면 사는 일이 전부 그런 게 아닐까.
무라카미 하루키, 좋아하세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책을 사는 일에 인색해요.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신중하게 구매해요. 읽고 싶다고 덜컥 사진 않아요. 좋아하는 만큼, 읽을수록 갖고 싶은 책이 늘어나는 만큼, 더욱 엄격해져요. 그렇지 않았다면, 책값을 감당하지 못했을 거예요. 스스로에게 하는 투자라 하더라도 돈 쓰는 일 앞에서 고민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예외는 있어요. 대형 서점이 아닌 작은 책방에서 많은 책을 구경했을 때, 서문과 목차가 너무 좋아 사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을 때, 마음에 드는데 이곳이 아니면 쉽게 구할 수 없을 때, 수집하고 싶은 문장이 화수분처럼 마르지 않고 쏟아져 나올 때, 구매하는 편이에요. 마지막 이유로 참을 수가 없었어요.
하루키 팬은 아니었어요.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었고, 너무 유명하고 신화적이라 오히려 거부감이 있었어요. 그가 해외작가라는 이유도 한몫했어요. 아무리 좋은 글이라도 번역을 거치면 그 의미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생각했어요. 아무튼, 그랬어요. 그랬는데, 지금은 하루키 러버가 되어 가요. 하루키도 그렇고, 헤르만 헤세도 그렇고, 김영하 작가도 그렇고 소설가의 에세이가 좋아요. 그들의 소설보다도 훨씬. 에세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럴 수 있겠고, 소설은 작품마다 편차와 호불호가 있는 반면, 에세이는 그렇지 않아 좋아요.
하루키의 리듬감 있는 문체와 비유를 좋아하는 사람 많아요. 동의해요. 번역한 글이어도 술술 읽히는 매력이 있어요. 무엇보다 그의 성실함을 사랑해요. 그가 소설을 쓰는 자세, 일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존경해요.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을 쓰기 위해 불필요한 것들을 최대한 하지 않고, 루틴을 유지하는 노력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결코 누구나 하지 않는 일이에요.
만약 내 묘비명 같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리고 그 문구를 내가 선택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렇게 써넣고 싶다. [...]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이것이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그를 소설가로 만든 건 요약하면 재능, 집중력, 지속력. 세 가지예요. 러너이자 마라토너도 마찬가지예요. 하루키라고 달리면서 걷고 싶은 순간이 왜 없었겠어요. 멈추고 싶은 순간이 왜 없었겠어요. 그럼에도 그는 걷지 않아요. 이런 자세가 나를 하루키 러버로 만들어요. 계속해서 그를 만나고 싶어요. 좋아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