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 좋아하세요?

박연준,『모월모일』,『소란』,『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by 아구 aGu
조금은 단단한 사람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박연준,『모월모일』

주기적으로 새치 염색을 한다. 탈모인들은 극노할 이야기지만, 새치인으로 감히 말하면 탈모에 다음 가는 스트레스다. 이런 건 유전적으로 닮지 않아도 되는데 참. 어쩌겠나.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니 이제는 받아들인다.


새치 염색을 하며 디자이너와 이런저런 토크를 나눈다. 예전에는 침묵을 선호했는데, 언제부터 가벼운 토크가 좋아졌다. 억지로 끌어가는 대화가 아닌 자연스러운 티키타카 말이다. 근황 토크를 하고 염색약이 스며듬을 기다리며 책을 펼친다.『모월모일』. 금방 주고받은 두서없는 토크가 고스란히 글에 가닿는다. 문장을 만나 살아 움직인다. 어쩜 이럴 수가 있지? 모든 것이 연결되는 삶. 감각이 열려 있음을 느낀다. 살아가는 참맛을 느낀다. 평범한 하루가 특별한 하루가 된다.


평범함은 특별하다. 우리가 그 속에서 숨은 모과를 발견하기만 한다면 평범이 특별함이다. 매일 뜨는 달이 밤의 특별함이듯. - 박연준, 『모월모일』


나는 이럴 때 행복감을 느낀다. 눈에 보이는 만족을 위해 애면글면하는 것이 아니라, 거창하고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일상에서 준비 없이 작고 소박한 행복이 내게 스며들 때, 발견했을 때 내 마음은 따뜻함으로 한껏 가득 찬다. 누구나 그런 경험 있을 거다. 여행지에서 가야 할 곳을 가고, 봐야 할 것을 본 기억보다 소소하고 여유롭고 사소한 어떤 순간이 행복했던 기억. 붐비는 맛집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다 발이 이끄는 곳에서 기대 이상을 맛본 경험. 일정 없이 밖으로 나가 벤치에도 앉아 보고, 공원에서 뒹굴어도 보고, 강변에서 하릴없이 노래 들으며 멍 때리다 아! 하는 순간. 그럴 때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새어 나온다. ‘아 진짜 좋다. 너무 행복하다.’


어쩌면 내가 파리를 좋아하는 이유도 파리에서 보낸 평범한 시간, 기억들 덕분이겠지. 리들에서 1유로짜리 크루아상을 입에 물었을 때. 식탁보 들고 슬렁슬렁 공원으로 가 해질 때까지 뒹굴었을 때. ‘미드나잇 인 파리’에 나오는 장소를 우연히 발견했을 때. 평범함에서 숨은 모과를 발견하는 순간들 말이다.


(망할 코로나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전만큼 여행에 목마르지 않은 이유는 여기서도 충분히 반짝이는 감정과 행복을 느끼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때 그곳이 아닌 지금 이곳에서. 외부가 아닌 내부로 시선을 보내며. 평범한 하루 안에서 내게 스며드는 빛을 오롯이 받으며. 조금은 단단한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라 퍽 좋다.



인생에 반짝이는 것이 있다면, 그건 '취미란'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느냐에 달려 있을 거다.
박연준, 『모월모일』

좋아하는 일에 마음껏 마음을 주는 친구가 있다. 취미만 50개일 정도로. 예전 같으면 ‘어찌 그럴 수 있지?’ 했겠지만, 이제는 끄덕일 수 있다. 공감할 수 있다. 좋아하는 것들에 점점 마음을 빼앗기고 있으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 교육받았다. 할 말이 있어도 삼키는 날이 많았고, 튀지 않고 중간만 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모나지 않고 둥글한 사람은 되었을지 몰라도, 무색무취의 사람이 되어버렸다. 나만의 색이 없는. 고유의 빛깔이 없는. 가져본 적 없어 잃어버렸다고 할 수도 없는. 공부라도 잘했으면 ‘공부 잘하는 애’로 불렸을 텐데. 특출날 게 없는, 내세울 게 없는 아이였다.


‘취미란’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막막했다. 독서, 산책, 음악 감상을 때마다 겨우 적어냈다. 매번 찜찜했다. 작아졌다. 너 자신을 알라던 테스 형 말이 아니라도 충분히 초라했다. 호불호가 있어도 호는 희미했다. 오히려 불호 덕분에 호를 더듬어나 볼 수 있었다. 아집으로 공감할 줄 몰랐다. 내 마음도 모른는데 타인의 마음을 살필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지금은 읽고, 보고, 들으며 취향을 채집하는 사람이 되었다. 글을 쓰며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이 되었다. 스스로 무엇을 좋아하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흐릿했던 삶의 방향과 태도가 제법 뚜렷하다. 계기가 있느냐고? 마음이 끌리는 일에 마음껏 내 마음을 줘보니 알겠더라. 시간과 돈을 어디에 쓰는지 기록으로 알겠더라. 내 취향을, 내 마음을, 그리고 나 자신을.


인생에 반짝이는 것이 있다면, 그건 '취미란'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느냐에 달려 있을 거다. 지우고 쓰고 반복하면서 취미는 계속되어야 한다. 싱싱하게. - 박연준, 『모월모일』


최근에는 ‘박연준 작가’에게 빠진다. 좋은 책을 읽기 전에 나의 시선을 갖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았다면, ‘평범한 아무 날이 내 것’ 임을 공감하지 못했겠지. 비슷한 취향으로 충만함을 느끼지 못했겠지. 나와 닿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겠지. 나와 너를 사랑하고 반짝이지 못했겠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내에 모든 취향이 존중받을 수 있기를. 개취 존중! 모월모일 안에서.



구십구 퍼센트의 평범을 사랑하는 일
박연준,『모월모일』

책마다 오래 시선이 머무는 꼭지가 있다. 쉬이 넘어가지 못하고 자꾸만 머물게 되는 이야기가 있다. 『소란』은 개정판 서문과 ‘하필, 이라는 말’, 『모월모일』은 서문이 그렇다. 『소란』이 처음, 당신, 사랑이라면 『모월모일』은 일상이다. 같은 작가의 산문집이어도 다른 질감으로 함께 나누고 싶은 책이다.


사실, 추천은 잘하지 않는 편이다. 나만 알고 싶은 욕심은 아니다. 책과 글에 너무 진심이라 조심스러운 마음 때문이다. 왜 너무 좋아하면 마음이 고장 나기도 하지 않나. 내게 좋다고 해서 당신에게 좋다는 보장은 없다. 당신과 나의 생각이 다르듯 취향도, 들어오는 문장도, 독후의 느낌도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경험을 가지고 고유하게 읽어낼 뿐이다. 저마다의 속도와 시선을 가지고 독서의 맛을 알아갈 뿐이다.


그럼에도 유별나게 마음이 움직이는 책이 있다. 호들갑을 떨고 싶을 만큼! 무야호를 외쳐 소문내고 싶을 만큼! 방정맞게 왜 그러냐는 소리를 끝내 듣고 싶을 만큼! 좋아하는 것이 있고, 함께 나누고 싶은 게 있다는 건 꽤 소중하고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감으로 당신에게 닿을 수 있다면 더더욱 그럴 테고.


삶이 일 퍼센트의 찬란과 구십구 퍼센트의 평범으로 이루어진 거라면, 나는 구십구 퍼센트의 평범을 사랑하기로 했다.- 박연준, 『모월모일』


약간의 소란과 특별할 거 없이 무탈한 하루가 또 흘러간다. 구십구 퍼센트의 평범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행복은 예사로운 일이 된다. 일상에서 언제든 마주할 수 있는 작고 가벼운 행복을 자주 발견하고 싶다.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시간을 '보내는 것'이 삶이라면 될 수 있는 한 '잘 대접해서' 보내주고 싶다.
박연준, 『소란』

나이가 들수록 적당한 소란에 마음을 빼앗긴다. 장사할 때도 그랬지만, 시장 가는 걸 특히 좋아한다. 시장에 가면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호객하는 소리, 흥정하는 소리,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 리어카와 수레 끄는 소리 등. 다닥다닥 붙어 있어 사람 냄새가 난다고 할까. 일상을 열심히 사는 이들의 소란이 좋다. 그 소란이, 활력이 내게 와닿고 싶은 마음에 더 그런지 모르겠다.


고요한 내 방보다 자잘한 잡음이 있는 카페가 좋다. 공부가 아닌, 읽고 쓰는 일이라 시끄럽지만 않으면 괜찮다. 스벅 오는 사람은 크게 두 부류다. 토크 혹은 공부. 후자의 비율이 높은 곳을 선호한다. 공부하러 오는 사람의 비율이 높다는 건, 소란스럽지 않다는 말이니까. 함께 집중하는 느낌이 좋다. 그런 환경에서 몰입이 더 잘 되는 편이다.


아무쪼록 잘 사는 일이란 마음이 머물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해, 순간의 시간을 온전히 할애해주는 것일지 모른다. 시간을 '보내는 것'이 삶이라면 될 수 있는 한 '잘 대접해서' 보내주고 싶다. - 박연준, 『소란』


부쩍 시간을 ‘잘 대접해서 보내는 것’을 생각한다. 읽고 싶은 책을 보고, 보고 싶은 방송과 영화를 보고, 듣고 싶은 노래를 듣는 일. 문장을 수집하고, 영감을 얻고, 쓰고 싶은 글을 쓰는 일. 일상을 관찰하고, 친구와 토크하고,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일. 내 일상은 그게 다다. 내 마음이 그러고 싶으니까. 그 시간에 몰입한 스스로가 너무 섹시하니까. 그러다 한 번씩 스스로 감탄하는 순간마저 있으니까.


작가 김영하는 많은 것이 잘 지나가도록 자신을 열어두는 게 잘 사는 거라고 한다. ‘흘러가는 인생, 스트리밍 라이프’다. ‘김형’이라 부르고 싶은 그의 말에 공감한다. 잘 살고 있는지는 몰라도, 점점 자신을 열어두고 있다. 자연에 자주 마음을 빼앗기고, 취향과 결이 맞는 사람에게 자주 마음이 간다. ‘마음이 머물고 싶어 하는 것’에 내 시간과 틈을 기꺼이 내어준다. 그 열림 사이로 따뜻한 빛이 스며들 수 있도록. 적당한 소란이 함께.



‘늦된’ 감정
박연준,『소란』

5월 일기를 적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난 4개월 너무 나를 돌보지 않았구나. 먹고사는 일에 치여 하루를 살아내기 바빴구나. 자주 한숨지었고 돌이킬 수 없어 마음 아팠다. 사는 재미가 없는 날은 표정을 잃었다. 공허함을 자주 느꼈고 배고프지 않아도 먹었다.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고 그런 거라지만 고독한 날이 많았다. 머물러 있음에도 부재를 느꼈다.


마음이 어수선해서일까. 재독을 위해 고른 책, 『소란』. 10월에 처음 읽고 적던 마음으로 ‘시간을 잘 대접해서 보내고 있는지’ 내게 묻는다. 좋아하는 일에 여전히 시간을 내어주고 있다. 마음, 대화, 일상을 나눌 사람의 부재가 순식간에 나를 잠식하기도 하지만, 그 허허로움까지 이제는 온전히 감내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다 앓고 난 후 이제 좀 쉬려 하는데 뒤늦게 머리를 들이미는 '늦된' 감정이 있습니다. - 박연준, 『소란』


‘늦된’ 감정. 누군가 잠긴 문을 열어젖히듯, 왈칵 쏟아져 내리는 세계. 충분히 아파하고, 충분히 슬퍼하고, 충분히 기뻐하고, 충분히 쏟아내던 시절이 있었다. 내게 뿌리내렸던 무엇을 솎아내고 매듭지어 놓아주던 시간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쑥 찾아오는 늦된 감정이라니. 여전히 내 몸 어디 기생하고 있었던 걸까. 희미해진 흔적 안에 보이지 않는 똬리를 틀고 있었던 걸까.


어쩌면 다 쏟아내지 못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쌓인 시간만큼 허물어짐도 제법 시간이 필요한 일이 있다. 보이는 상처가 아물었다고 괜찮을 거란 보장은 없다. 때로는 후폭풍이 진짜 감정을 데려 온다. 그 소란마저 껴안은 나를 사랑하고 싶다. 그저 작고 가볍게, 흐르고 놓여있기를.



지나치게 가까워 '거리'를 잃어버리면 '관계'도 잃어버린다 박연준,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부쩍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돼요. 나와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 나와 닿았던 사람들. 나를 스쳐 간 사람들. 그들의 안부를 물을 용기는 없을지라도 그 관계들을 왕왕 떠올려봐요. 나를 돌아봐요.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는 그들에게 무해한 사람인지. 내 인생은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살아갈수록 관계의 어려움을 느껴요. 더는 어릴 적 무구함만으로 내 마음을 꺼내어 보일 수 없어요. 먼저 다가가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이제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죠. 점점 너와 나의 거리를 가늠하기 어려워요.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혼자만의 착각일 때도 있어요. 흐르는 시간 앞에 변화된 우리 사이를 받아들여야 해요. 가끔은 그게 참 힘들어요. 당신이 나의 전부일 때도 있었는데 말이죠. 내 삶의 이유인 적도 있었는데 말이죠. 인생은 당신과 함께 흐른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죠.


지나치게 가까워 '거리'를 잃어버리면 '관계'도 잃어버린다. 밀착되어 있지 않으면 그에 대해 속속들이 알 수 없기에 서로 존중하는 마음이 생긴다. 둘 사이에 조화로운 틈이 생기며, 격이 생긴다. - 박연준,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흐르는 시간 앞에 멀어져 잃어버린 관계도 있지만, 지나치게 가까워 잃어버린 관계를 떠올려봐요. 더 마음 아픈 일이죠. 이해와 위로라는 이름으로 가장하여 내 생각을 앞세우기도 해요. 가까운 만큼 당신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이 다른 경우가 많죠. 하긴, 내 마음도 모를 때가 많은데 당신 마음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거 자체가 욕심인지도 몰라요. 알 수 없는 인생만큼 알 수 없는 게 당신 마음이고, 사람 마음이죠.


그럼에도 어쩌겠어요. 우리는 어떻게든 관계할 수밖에 없어요. 섬으로 존재하는 사람은 없어요. 어떤 관계든 나라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게 인생이에요. 그래서 말인데요, 나의 마음을 돌보듯, 당신의 마음을 돌보고 싶어요. 당신의 안부를 묻고 싶어요. 왜냐고요? 당신의 존재가 내게 힘이 되기 때문이에요. 당신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해요. 선은 넘지 않을 거예요. 우리 사이 틈을 존중할 거예요. 당신도 그 거리를 존중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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