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의 소리가 무서운 이유
제정신으로 살 수 없는 시대에 도달했다.
자신의 이익, 혹은 손해 보지 않으려 하는 욕심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자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아파트 경비실의 에어컨을 반대하는 사건들은 뉴스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여의치 않은 주차시설에 장애인 주차장을 이용하는 건 물론, 그것을 신고한 이를 '지랄 맞은 것들'이라 표하며 다수 앞에서 큰소리를 내는 이를 보며 경악했다. 또한 놀란 가슴을 가라앉힐 수 없는 다른 이의 '장애인 주차장을 없애자.'라는 의견과 '장애인 주차장을 몇 번 이용했다'라며 신고당할까 걱정하는 모습은 도덕과 윤리에 있어 부끄러움을 모르는 건가 싶어 혼란스럽다.
이 상황에 있어 분노하는 나를 보며 예민하다 말하는 이도 있을 테다. 이것이 다수의 소리가 무섭고도 위험한 이유다. 기본적인 토대로 잘못된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보호를 하찮게 여기는 것은 소외받는 이들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는 이기심에서부터 비롯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반대로 작은 상식으로 이어진 실천은 배려라는 이름으로 많은 것을 바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떠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자괴감에 빠진다. 완벽할 수 없는 나이기에 내 소리가 교만이 될까 겁난다. 심지어 '함부로 나서지 마, 해코지할 수도 있잖아. '라는 누군가의 말에 정당성을 찾기도 한다. '해나는 착해. 그저 주장이 강할 뿐이야.'라고 말했던 또 다른 누군가의 말이 다수에 속하지 못하는 나의 잘못이라며 비난의 화살이 되어 돌아온다.
이런 작은 일이 면밀하게 순간순간들로 모여 나를 흔들고 어지럽게 한다. 이곳이 지옥이다. 이 가운데서 중심을 지키고 '예수님이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며 마음을 지키는 일은 어렵다. 하지만 해야 하는, 가장 하고 싶은 일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아가 세상에 대입하는 것. 그 크나큰 숙제가 내일을 다짐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