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Schumann | Fantasiestücke Op.12
챠가쟉!
‘쨍그랑’도 아니고 ‘댕강’도 아닌 "챠가쟉"이라는 낯선 소리와 함께 바닥에 크리스털 카펫이 멋지게 깔렸다.
식사 준비를 하다가 싱크대 위의 물잔을 미처 보지 못하고 떨어뜨린 탓이다. 흰색 바닥에 흩뿌려진 투명한 크리스털 조각들이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남의 속도 모르고 순진한 체하며 그 맑은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간 식탁 위의 튼튼한 물잔으로써 제 역할을 다해왔던 그 유리 물체는 사실 자신은 이렇듯 가냘픈 존재였음을 알리고자 하는 것인지 아주 잘고 섬세하며 또한 날카롭게 자신의 몸을 산산조각 내어 보였다.
나는 음식들을 꺼내 놓은 싱크대를 잠시 뒷전으로 하고 쪼그려 앉아 그 유리 조각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단면이 날 서있지 않고 크기도 제법 큼직하여 다루기 쉬운 조각들과,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미세한 주제에 아주 날카로워 그 표면에 닿으면 사람을 화들짝 놀라게 하는 작디작은 까다로운 조각들이 한데 모여 차례차례 내 손에 의해 정리되었다.
지금이 하필 한 해의 마지막날이기 때문일까. 나는 형태도, 질감도 모두 다 제각각인 그 유리 파편들을 치우며 나의 일 년간의 조각들을 그러모아 정리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 기쁘게, 행복하게, 뿌듯하게, 희망차게, 절망스럽게, 슬프게, 아프게, 비참하게 만들었던 수많은 크고 작은 여러 일들이 조각을 주울 때마다 하나씩 떠올랐고, 마치 그 일들을 이제는 보내주려는 의식을 치르듯 유리 조각들을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젖은 행주 여러 장으로 닦고 또 닦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유리 가루까지 완벽하게 치운 후 밖에 나가 쓰레기봉투를 버리고 왔다.
나의 2023년을 멀끔하게 정리한 기분이다.
시기적절하게 깨져버린 유리잔 덕분에 겸사겸사 나의 한 해를 정리했군.
2023년을 정리하는 데 있어서 내게 이 곡을 빼고 논할 수는 없겠다. 슈만의 환상소곡집 Op.12 중 특히 세 번째 <Warum?>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겠는데,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가 끊임없이 주고받는 대화를 엿들으며 나의 이중적 고뇌 또한 찬찬히 정리해 본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슈만으로 시작하여 슈만으로 끝나는구나. 2023년은 가히 슈만과 사랑에 빠진 해였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다.
Sviatoslav Richter가 연주하는 Schumann의 <Fantasiestücke Op.12> 전곡 영상 유튜브 링크이다.♩
글에서 언급한 <3. Warum?>만의 연주 영상도 있어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