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aria Sep 15. 2024

하얀 국화 한송이 우아하게 피어나듯. 비스펠베이의 바흐

J. S. Bach | Cello Suite No. 2, BWV 1008


공상을 즐기는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후대에 이토록 멋지고 철학적이며 논리적이기까지 한, 따뜻한 감성과 차가운 이성을 동시에 지닌 명곡들을 많이 남긴 J. S. Bach는 (만약 환생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의 전생의 공적을 고려해 볼 때 과연 어떤 존재로 환생했을까? 살아생전 그 진가를 온전히 다 인정받지 못했던 그의 공적들은 사후에 과연 신의 저울 위에서 얼마만큼의 가치의 무게로 매겨졌을까?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듣다가 분명 바흐는 반신반인에 준할 만큼의 어떠한 대단한 존재로 환생했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결론을 내려본다. (신 얘기를 했지만 사실 난 종교도 없고 신도 믿지 않는다.)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특히 전곡은 첼리스트들에게 대체로 매우 도전적이고 어려운 과제처럼 여겨지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왠지 명반도 많은 것 같고, 덕분에 나는 기분 따라 양질의 연주를 골라 들을 수 있다. 그런 명반의 목록에서 빠질 수 없는 음반이 하나 있는데, 바로 ‘피터 비스펠베이(Pieter Wispelwey)’의 연주 녹음이다. 내가 제대로 아는 게 맞다면 첼리스트 비스펠베이가 바흐 첼로 모음곡 연주를 수록한 음반은 총 네 개로 알고 있다. 그중에 한 음반은 사고로 인하여 일찍 하늘나라로 떠나버린 아들을 추모하며 연주한 모음곡 제5번이 수록되어 있는데 사연을 알고 들어서인지는 몰라도 이 연주를 듣고 있으면 괜히 울컥하게 된다.


어쨌든 피터 비스펠베이는 첼로 연주의 대가들 중 한 명으로서 손꼽히는 첼리스트이고, 솜씨 좋은 데다가 이 곡에 대한 출중한 경력까지 갖고 있는 프로라 할 수 있는데 한국에서 무려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을 연주해 준다고 하니 귀중한 감상의 기회임이 분명했다.


이 모음곡은 첼로 연주자들의 단골 앙코르곡이라 공연장에서 들을 기회는 의외로 꽤 많지만 한 악장만을 따로 떼어 들려주다 보니 전곡을 다 듣는 기회는 또 흔치 않다. 집에서 음반으로 듣는 건 아무래도 중간중간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것이 불가피하다.(라고 변명해 본다….) 그래서 이렇게 공연장에서 전곡 연주를 해 주는 일이 감상자로선 참 고마운 일이다. 각 잡고 제대로 빠져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나 할까.


이때 나는 몸 상태가 몹시 좋지 않았지만 그토록 손꼽아 기다려온 이 연주를 결코 놓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피터 비스펠베이의 연주는 아픈 환자에게 잠시나마 모르핀을 투여함과 동시에 고통과 고뇌가 없는 꿈의 나라로 하늘을 나는 기차에 태워 실어 보냈다.


피터 비스펠베이는 정말이지 자기 객관화가 분명하고 또한 감정의 농도를 조절하는 데 능한 사람 같다. 퍼포먼스가 꽤나 큼직큼직하고 겉보기에 매우 유쾌해 보여 여름밤의 흥겨운 파티 같기도 한데, 귀를 기울여 연주를 들어보면 차분하고 유려하며 폭닥폭닥한(?) 것이 마치 서늘한 가을바람이 이는 공원의 벤치 위에 앉아 어깨 위에 가벼운 캐시미어 숄을 두르고는 차분하고 깊은 색으로 한껏 칠해진 세상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 같다. 시각의 세계와 청각의 세계가 뚜렷하게 달라 마치 환상 기차를 타고 서로 다른 시공간을 넘나드는 기분이다. 물론 연주가 감히 흠 따위를 잡을 데 없이 준상하여 몰입을 깨뜨리는 일 없었음은 당연하고 말이다. 깊은 가을 색 연주와 같다고 했지만 매 곡의 ‘지그’에서는 어김없이 탐스럽고 하얀 국화가 꽃망울을 터뜨렸으니 그야말로 참 멋진 연주였다.




연주가 모두 끝난 후 첼리스트는 지쳐 녹아내릴 법도 한데 마치 방금 낮잠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기운찬 모습으로 사인회석에 앉았다. 여섯 곡에 앙코르까지, 그저 앉아서 감상하기만 한 나도 이렇게나 정력이 소모되었는데 온몸을 써 연주한 무대 위 연주자가 어쩜 이렇게 팔팔한지 참 대단하다.


인터넷에서는 품절이라고 떠 있어 사고 싶었으나 사지 못했던 음반을 공연 전 기획사 매대에서 반갑게 발견하여 구입했고, 나름 이것도 사연이라면 사연일까 싶은 의미가 부여된 이 소중한 음반에 비스펠베이의 사인을 받았다. 회전초밥식 사인회라서 많은 말을 전해드리진 못 했고 선생님 연주에 감동받았다는 짤막한 한 마디만 수줍게 전하고 왔다.


지금 당장 내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는 다른 것에 귀를 기울이고, 보이지 않는 향기를 흠뻑 들이마셔보면 세상엔 경이롭고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 차 있다. 세상에 꽃씨를 심어놓고 떠난 바흐씨, 새삼 또 한 번 당신에게 고맙습니다.


커튼콜 인사 때 찍은 비스터펠베이의 모습.




Pieter Wispelwey가 연주하는 J. S. Bach의 Cello Suite No. 2 in D minor BWV 1008 영상의 링크를 첨부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양한 위로의 방식, 그리고 엘가와 드보르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