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해라 베드캅 나도 굿캅 하고 싶다
2주에 한 번 학교에 제출해야 하는 숙제를 빠지지 않고 챙겨야 하는 것은 내게 주어진 사명 같았다. 거의 놀자판 격인 호주 학교 숙제도 이렇게 힘든데 학원까지 다니는 아이들의 숙제는 어떻게 챙기는 걸까? 상상 만해도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그리고 그것을 해내는 사람들에게 존경심이 마구 샘솟는다.
2학년 Term 1 마지막 주 숙제에는 이런 파트가 있었다.
사실 살짝 설렜다. 그리고 궁금했다. 우리 1호가 엄마를 사랑하는 이유가 있을까? 있다면 뭘까?
이 숙제를 해볼까? 아이와 결정했던 날. 나는 왠지 기대를 품고 싶었다. 괜한 기대일까 싶으면서도 내심 궁금해졌다. 아이가 나를 사랑하는 이유가.
숙제의 내용을 함께 확인한 후에 나는 지그시 아이의 눈을 쳐다보며 물었다.
“우리 이쁜이는 엄마를 왜 사랑해?”
사랑스러운 대답을 유도하고자 부른 호칭은 절대 아니다. ‘이쁜이’라는 호칭은 평상시에도 내가 많이 부르는 애칭이다.
곧이어 돌아온 아이의 대답에 나는 들이마신 숨을 내뱉지도 못하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카레 만들어 주니까.”
뭣이? 카레? 고작 카레라고? 엄마를 사랑하는 이유가 네가 좋아하는 카레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라고? 이건 말일까 방귀일까? 설마 7살 난 아이가 나를 놀리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1호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그걸 보니 진심이라는 것을 나는 알아버렸다.
음… 당황한 나는 살짝 말을 더듬다가 되물었다. ‘그럼 엄마가 카레를 만들어 주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거야?’ 맙소사 세상에. 이런 유치한 질문을 내가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떨리는 내 눈빛을 바라본 1호도 당황했는지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녀석은 눈치가 빠르다. 그 빠른 눈치로 상황을 판단하고 이내 베실 베실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어떻게 엄마를 안 사랑해. 당연히 사랑하지.”
늦었다 이 녀석아. 이미 엄청 늦었단 말이다. 내 마음은 서운할 대로 서운해진 뒤였다.
에잇! 그렇다면 아빠를 사랑하는 이유라도 들어보자. 아무리 아빠랑 절친이라고 해도 내가 낳아 준 엄만데~ 아빠는 엄마보다는 쪼~~~금 못하겠지? 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게 무슨 기대를 할 것이 있다고 나는 또다시 떨리는 마음으로 아이에게 물었다.
아빠를 사랑하는 이유. 내게 돌아온 1호의 대답은 내가 못 알아듣는 영어 단어였다.
뭐라고? 나는 아이에게 연신 물었고, 이 단어는 정말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단어였다. 발음으로는 전혀 연상이 되지 않아 아이에게 스펠링을 하나하나 불러 받아서 조회를 해본 결과는 이랬다.
Prankster :
a mischievous or malicious person who plays tricks, practical jokes, etc
From https://www.dictionary.com/browse/prankster
1호는 아빠가 자기를 웃겨주고 재미있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란다. 하얀 이가 보이도록 환하게 웃으며 아빠를 사랑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아이를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좋았... 아니 좋아야 했다. 나는 이 사실이 다행이라고 여겨져야만 했는데 내 마음은 전혀 아니었다.
사실 나도 웃길 수 있는 엄마였다. 장난 많이 치고 농담도 잘하는 사람이었는데... 아이에게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대체 나는 어디서부터 그저 카레를 만들어 주는 재미없는 엄마 사람으로 전락하게 된 걸까? 아이가 농담으로 한 말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거 아닌가요? 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나는... 진심으로 서운했다.
서운함에 더해 나는 뒤끝이 참으로 길디 긴 사람이다. 한마디로 내 마음이 풀릴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란 말이다.
저녁을 먹으러 식탁에 앉은 남편에게 억울한 심정을 토로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남편은 되려 박장대소했다. 그러고는 나에게 말했다. 아빠는 웃겨 주지만 늘 필요한 것은 아니고, 엄마는 웃겨주지 않지만 자신에게 늘 필요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 아니냐고. 무얼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냐고. 자기는 웃겨 죽겠다며 깔깔대고 웃었다.
남편이 시원하게 웃어넘길 수 있는 건 자기 얘기가 아니니까 그렇지 하는 마음이 뾰로통하게 올라왔다. 나도 매사에 장난치며 웃어넘기는 엄마이고 싶지만 마음과는 달리 현실 엄마 역할은 정말 바쁘다.
두 아이의 끼니를 책임지고, 씻기고, 숙제시키고, 놀 때 다치지 않게, 싸우지 않게 돌봐야 한다. 집에 있는 한 순간도 정신 줄을 놓을 수가 없다. 장난치며 더 많은 시간을 놀아주고 싶지만 꼭 필요한 돌봄은 해결해야 하기에 노는 시간보다 다그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다.
마음 같아서는 꽥 소리를 지르면 상황이 한 번에 해결될 것 같지만 아이와의 관계를 망치는 건 한순간이기에 그럴 수도 없다. 아이가 잘못했을 때는 단호하게 잡고 가르쳐줘야 하는 베드캅 역할도 우리 집에서는 내 차지다. 언제나는 아니지만 대부분 남편은 굿캅 역할이었다.
싫은 소리는 하는 사람도 정말 싫다. 나도 아이들과 매일 웃기만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내가 잊지 말아야 할 부모라는 역할은 아이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아이를 사랑하는 만큼 내 아이가 바르게 자라도록 부모인 나는 아이를 가르치고 인도해야 한다.
물론 1호가 엄마를 사랑하는 이유는 카레뿐만이 아니라는 이유도 당연히 알고 있다. 하지만 말은 분명 '아' 다르고 '어' 다르다. 같은 말이라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서 나는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그에 열 배에 해당하는 빚을 더 질 수도 있다.
서운한 마음을 무릅쓰고 나는 아이를 꼬옥 안으며 말했다.
'오늘은 카레 만들어줬으니까 엄마 사랑해 주는 거야?'
아이는 내 품에서 피식피식 웃었다. 속으로는 '이야~ 우리 엄마 뒤끝 작렬이다. 와~ 다시는 말 실수 하지 말아야지.' 할 수도 있었겠지만.
내 사랑하는 아이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엄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 많이 더 많이 사랑하지."
이 달콤한 한마디에 남편에게 '베드캅 너나 해라.'라고 뿜고 싶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버렸다.
그래. 베드캅이면 어떻고 굿캅이면 어때.
다 너를 사랑하는 마음인 걸 네가 알면 그걸로 충분하지.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이 글을 적고 있는 오늘의 나를 보면 나는 분명 뒤끝 끝판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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