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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이 May 05. 2021

떠오르다,

그것을 보면 당신들이 떠오른다

나의 고모는 예뻤다. 사실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진 않지만 마른 체형에 풍성한 파마머리 그리고 하얬던 피부 정도가 떠오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오빠인 나의 아빠도 한 인물 하였고 여전히 아빠의 머리숱도 빈틈없어 보이니, 아빠의 젊었을 적 사진을 보며 고모의 얼굴을 유추해 보는 것이 무리는 아닌 듯했다. 아빠의 진한 눈썹과 꽤 오뚝한 코, 살짝 아래로 처진 눈을 닮아 있었겠지, 그려본다.

여덟 살 때 즈음 일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랑받은 기억이다. 나는 결혼하지 않은 고모의 첫 조카였고, 본능적으로 어린이는 자신을 예뻐해 주는 사람을 알아챈다. 겨울철 나에게 귤을 까주는 고모는 귤의 알맹이에 붙은 하얀 껍질을 정성스레 벗겨 내주었다. 귤의 주황 속살만이 매끈하게 보일 때까지, 고모는 그렇게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혹여 내가 먹으면 안 좋을까 혹은 입안이 까끌까끌할까, 그 누구보다도 오래 귤을 깠다. 나는 조용히 다른 어른들보다 귤을 건네주는 속도가 느린 고모의 손을 바라보며 한참은 더 말랑해진 귤을 받아먹었다.


고모는 너무나 아름답고 싱그러운 나이에,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났다. 죽음의 의미와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을 그때의 나는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떠나는 고모를 위해 애도도, 고모의 가는 길이 조금 더 따뜻하기를 바랄 수도 없었다.

다시는 볼 수 없었던 고모에게 받은 것은 매끈한 귤 알맹이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사랑이었다는 것은 고작 여덟 살 어린아이도 느낄 수 있었다. 나를 사랑해 준 어른이 떠나기 얼마 전 주고 간 추억이었다. 한참을 크고 나서 찾아보니 귤락이라 불리는 그것은 고모의 염려와는 다르게 먹어도 일절 상관없는, 오히려 건강에는 좋을 수 있는 성분이 함유된 그것이었다.

매해 붕어빵이 길거리에 나오고 어묵 국물이 당기는 겨울이 오면, 동시에 귤의 철이 오고 만다. 그 귤을 까는 순간 나는 고모가 떠오른다. 고모처럼 정성스레 그 귤락이라는 것을 다 떼어내지는 못하지만 과하게 붙은 그것을 떼어내면서 예쁘고 젊었을 고모를 떠올린다. 예쁜 귤을 보면 예쁜 귤을 주었던 그녀가 떠오른다.     


나는 태어나서 9년간 아빠의 부모와 함께 살았다. 에어컨이 매우 비싸고 흔치 않았던 어린 시절 한 여름 열대야가 한창이면, 나와 할머니는 슈퍼에서 메로나를 사서 물고 바깥 어딘가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집을 나설 때 들고 나온 할머니의 태극 모양이 양면으로 새겨진 튼튼한 부채는 한껏 쭈글 해진 팔에 쥐여 본인과 나에게 번갈아 바람을 주었다. 그러면 금세 숨이 막혔던 공기가 날아갔고 동시에 메로나를 물고 입을 오므려 돌돌 빨고 있자면 목덜미에 소름마저 돋았다. 마지막으로 빨아먹느라 동글동글해진 그것을 한 번에 씹어버리면 열대야의 밤은 금방이고 지나갔다. 차고 달달한 연둣빛의 그것은 나의 여름이었다. 할머니가 준 열대야를 피하는 방법이었다.        

  

할머니는 작고 왜소하였고 노화와 타고난 체질의 합작으로 소화력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어렸을 적 할머니 방의 그다지 고급 져 보이지는 않았던, 1단으로 이루어진 알 수 없는 금빛 무늬를 가진 나무 서랍장 안에는 국민 소화제인 까스활명수 혹은 위청수가 박스째로 구비되어 있었다. 그렇게 위가 예민한 할머니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이 생기면 할머니의 미간 사이 주름은 더 파였고, 자신의 위가 위치한 배를 어루만지며 구부정한 자세로 어김없이 그 서랍장을 찾았다.

소고기뭇국은 나에게 있어 할머니의 상징이었다. 할머니와 함께 살 때에도 할머니의 시그니처 메뉴였지만, 우리 가족이 분가한 후에도 할머니 집을 가면 국은 항상 맑은 소고기뭇국이었다. 어렸을 때는 그것이 대수롭지 않았고, 할머니의 소고기뭇국은 항상 맛있었다.


아빠는 할머니로부터 어김없이 그 체질을 그대로 물려받은 듯하다. 무릇 그때의 할머니 나이와 비슷해진 아빠의 위장도 그렇게 힘을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럴 때면 엄마는 잘 끓이지 않던, 아빠 전용 소고기뭇국을 끓인다. 그제야 깨달았다. 할머니의 집에 항상 소고기뭇국이 있었던 이유를. 자극적이지 않고 무로 우려낸 그 국물은 할머니가 양껏 먹어도 속이 편한 음식이었다는 것을. 나는 소고기뭇국을 볼 때면 어김없이 그녀가 떠오른다. 국민 소화제라 불리는 그 갈색 유리병에 담긴 약들을 만병통치약인 양 건네던 할머니가 떠오른다.     


딸을 먼저 보낸 어머니의 마음은 감히 헤아릴 수 없다. 나는 고모를 잃은, 그때의 할머니 모습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하나뿐인 여동생을 잃은 아빠의 모습도 전혀 기억에 없다. 엄마의 모습만 어렴품하게나마 기억에 남아있다. 장이 치러지는 곳으로부터 나와 동생을 차단하고 다시 고모를 보내기 위한 곳으로 돌아가던 엄마의 뒷모습만 남아있다. 그리고 소고기뭇국으로 이어진 그 모자의 마음이 나는 이제야 슬프다.      


누군가 그리워지는 상징적인 무언가 생기는 것은 두렵기도 하지만, 내가 멋대로 거부할 수도,  지울 수도 없는 무언가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귤과 같은 사랑을 남겼는지 떠올린다. 메로나와 같은 달달한 방법을 주었는지 생각해 본다. 소고기뭇국과 같은 염려를 남겼는지 기억을 더듬는다. 분명한 것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남긴다는 대단한 일에 더불어 사랑만을 남길 자신은 없지만, 내가 기억되는 무언가는 따뜻한 마음을 필히 동반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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