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장국영을 기억하는 법 (1)

나의 레슬리 ep17 : 내가 사랑한 가수 장국영 (5)

by 장지희

가수로도 배우로도 사랑을 받았던 레슬리..

아니, 그보다는 여전히 가수로서도 배우로서도 사랑받고 있는 레슬리.

가수와 배우로서의 장국영은 그 특별함 만큼이나 참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배우로서의 레슬리가 얼마나 사랑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중국 영화 100주년을 기념해 진행된 "홍콩인이 가장 사랑하는 중국 영화" 설문 결과가 증명한다. 총 25,0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설문에서 홍콩인이 가장 사랑하는 남자 배우 1위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1위에서 5위를 차지한 영화 중, 무려 4편이 장국영이 출연한 작품들이다.


5위 <해피투게더>

4위 <무간도>

3위 <영웅본색>

2위 <아비정전>

1위 <패왕별희>


저 순위를 보고 있으면 극도의 팬부심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아, 역시 우리 국팔씨라니까.



하지만 이토록 사랑받은 작품을 많이 남겼기에 그의 영화는 수차례 다시 만들어지기도 했다.

<영웅본색>은 심지어 한국 버전 리메이크 버전에 뮤지컬 버전까지 등장한 단골손님이다.

<천녀유혼>은 또 어떠한가. 일찌감치 애니메이션으로도 리메이크된 바 있고, 스핀오프라고 보아도 무방할 실사 버전 리메이크작도 있다. 왜 스핀오프냐면, 어벙한 서생 '영채신'은 조연으로 전락하고 귀신 잡는 도사 '연적하'는 소도둑에서 터프가이로 느닷없이 페이스오프 하고 나타나 난데없이 주인공 행세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발마녀전>, 아.. 이 작품에 대해서는 말을 줄이기로 하자.


안타깝게도 레슬리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들 중에 호평을 받은 작품은 아직 없는 것 같다. 언젠가 아주 기쁜 마음으로 감상평을 나누고 싶어 지는 리메이크작이 등장하기를.



하지만 영화에 비해 음악은 좀 사정이 다르다. 그의 히트곡을 리메이크한 곡 중에는 꽤 괜찮은 넘버들이 여럿 있다.

사실 레슬리의 리메이크 음악에 좀 더 후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한 노래를 여러 버전으로 듣는 것을 좋아하는 취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래 한 곡에 꽂히면 여러 가수들이 부른 온갖 리메이크와 라이브 버전을 다 뒤져서 들어보는 TMI성 취미라고 할 수 있겠다.


덕분에 애플뮤직의 내 플레이리스트에는 'Re-Leslie'라는 비공개 폴더가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레슬리가 불렀던 곡들을 리메이크한 곡들을 하나씩 모아서 만들어둔 플레이리스트이다.

오늘은 이 플레이리스트를 살짝 공개해볼까 한다. 이미 들어보았을 수도, 처음 듣는 곡일 수도 있지만.. 한 곡씩 들으면서 세상이 그를 어떻게 기억하고 추억하는지 함께 느껴보면 어떨까.




1. 고거기 <最愛>

홍콩 가수 고거기가 2016년, 장국영의 60번째 생일을 맞아 발표한 앨범 <Salute to Dear Leslie>의 수록곡이다. <Dear Leslie>라는 타이틀곡이자 창작곡을 제외하면, 앨범의 수록곡 모두가 레슬리의 히트곡 리메이크이다. 고거기는 2017년에는 같은 제목의 콘서트도 열었는데, 앨범 전곡도 콘서트 실황도 모두 유튜브에서 찾을 수 있다.


<Dear Leslie 音樂會(Dear Leslie 음악회)>의 한 장면


이 앨범에는 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레슬리의 시대별 인기곡들이 두루 수록되어 있는데, 발표 당시에 가장 화제가 되었던 곡은 신인시절 장국영이 각별히 아꼈다고 알려진 고천락과 고거기가 함께 부른 <當年情(당년정)>이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最愛(최애 / 최고의 사랑)>이다. 이 곡은 대만 출신의 배우이자 가수이면서 영화 <심동>의 감독이기도 한 장애가가 북경어로 발표한 곡을 장국영이 광동어로 개사해 부른 곡이다.

이 노래를 들으면 새삼 레슬리가 얼마나 노래를 드라마틱하게 소화해내는지 알 수 있다. 나는 당연히 이 곡의 원곡도 소장하고 있는데, 장애가도 고거기도 장국영 버전의 드라마틱함은 따라잡을 수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쭉 듣고 나면 마치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노래를 추천해놓고 '그래도 장국영이 최고'라며 주책을 부린 셈이 되었지만, 고거기 버전도 요즘의 날씨와 꽤 잘 어울린다.


https://www.youtube.com/watch?v=lea6gusazHI&list=PLOlEzXHfwSD0K45ipQkjTtknK8YRzD6v5&index=9






2. 포비달 <拒絕再玩>

고별 콘서트에는 장국영이 무대 중간에 공연의 스태프들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다. 느닷없이 "I wanna sex, I need your sex"라는 멘트와 함께 색소폰 플레이어를 소개해 열세 살의 나를 멘붕에 빠뜨렸던 바로 그 대목.


그 장면에서 소개된 인물 중에 '크리스 바비다(Chris Babida)'라는 인물이 있다. 필리핀-중국 혼혈 출신의 뮤지션이자 '포비달'이라는 중국어 이름으로도 잘 알려진 그는 2007년, 레슬리를 그리며 그의 음악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한 연주 앨범을 냈다. 제목은 <I Remember... Leslie>.


레슬리와 포비달이 함께 찍은 사진. 두 사람은 은퇴 전은 물론, <야반가성>의 OST도 함께 작업했다.


이 앨범에서 추천하고 싶은 곡은 <拒絕再玩(거절재완)>이다. 댄스곡을 재즈로 재해석했는데, 의외로 잘 어울려서 놀랐다. 이 연주에 맞춰 노래하는 장국영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운 마음이 들 정도로.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앨범의 수록곡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좀 심히 갈린다. 어쩐지 호텔 로비의 경음악이 떠오르는 곡도 있고..)


https://www.youtube.com/watch?v=hx_VZkyxjPk&list=OLAK5uy_kAf0mGgwbBD2asL0VK41fWfJAgL-XpGu4&index=8






3. 종진도 <由零開始>

한국인에게 가장 유명한 홍콩 노래 중 하나인 <One Summer Night>. 진추하와 아비가 함께 부른 곡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연히 여기서 등장하는 아비는 <아비정전>의 아비가 아니다. Kenny Bee라는 영어 이름 덕분에 홍콩에서 阿B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종진도이다.


종진도와 장국영은 둘 다 80년대의 홍콩을 주름잡았던 스타인데, 이 둘이 한 작품에 등장한 것은 90년대가 된 이후다. 그중 1998년 <九星報喜(구성보희)>는 캐스팅을 둘러싼 재미있는 뒷이야기를 가진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이 작품은 1988년 개봉되어 큰 성공을 거뒀던 영화 <八星報喜(팔성보희)>의 리메이크작이다. '여덟 개의 별이 행복을 전합니다'라는 영화의 원제처럼 리메이크작 역시 8명의 주인공이 정해졌는데, 촬영이 시작되기 직전에 제목이 바뀌고 출연자가 추가되었다고 한다.

사정은 이랬다. 당시 선배인 종진도가 경제적으로 파산에 이르러 어려운 형편이라는 소식을 들은 장국영이 제작사에 건의해서 '8성'을 '9성'으로 바꾼 것이라고. 덕분에 영화의 스토리도 조금 달라졌다고 하는데, 하지만 정작 종진도 본인은 그 사실을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구성보희> 덕분에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종진도는, 2018년 <To Bee Continued>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연작 싱글에서 장국영의 노래를 다시 불렀다.

<由零開始(유령개시)>, 0에서부터의 시작을 의미하는 노래 제목과 "나를 기억해주겠느냐"는 가사가 종진도의 개인사와 맞물리며 묘한 여운을 남긴다.


https://www.youtube.com/watch?v=ALK_RsDtx1E

장국영의 목소리와는 다른, 연륜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듣는 Will you remember me라니... 새롭고 또 새롭다.






4. 상천아 <儂本多情>

2013년 3월 31일, 장국영의 10주기를 맞아 홍콩에서 열린 <繼續寵愛. 十年. 演唱會. (계속총애. 십년. 콘서트)>에서는 수많은 홍콩스타들이 무대에 올라 그의 노래를 다시 불렀다.

그 공연을 보러 홍콩으로 날아갔던 나는 그 날 어지간한 홍콩스타들은 거의 다 보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난 캐스팅에 놀랐다. 양조위가 사회를 보고, 장학우와 진혜림과 막문위와 주혜민 등의 스타들이 쉼없이 장국영의 노래를 불렀던 그 날.


하지만 그 날 보았던 무대 중에서 가장 마음에 오래 남았던 것은 앞서 언급한 슈퍼스타들이 아니라, 한 중년배우의 노래였다. 그 주인공은,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84년에 장국영과 함께 드라마 <儂本多情(농본다정)>에 출연했던 여주인공 '상천아'이다.


1940년대 홍콩을 배경으로 바람둥이 도련님 장국영과 사랑에 빠지는 순진한 아가씨를 연기했던 그녀. 상대역이었던 남자 주인공 장국영은 세상을 떠난지 10년이 흐르고, 여전히 현재를 살아가는 여주인공이 그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내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다. 게다가 그녀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연륜과 세월이 더더욱 마음을 흔들어 놓아서, 그 여진이 더더욱 오래 갔다.


https://www.youtube.com/watch?v=EdP20z3qEhM

노래가 끝날 즈음 무대 뒤에 보이는 드라마 <농본다정>의 베드신(!)이 백미다.






5. 알란 탐 <風繼續吹>

가수 라이벌의 가장 큰 라이벌이었던 알란 탐.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될 정도였다는 두 사람의 팬들 간 갈등은 장국영의 가수 은퇴 이유 중 하나라고 짐작되기도 했었다.

정작 본인들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는데, 팬들이 날을 세우는 바람에 난감했다는 장국영과 알란 탐. 그들은 1999년 알란 탐의 솔로 데뷔 15주년(알란 탐은 1974년 그룹사운드 'Wynners'의 리드보컬로 데뷔했다. 위에서 소개한 종진도도 이 밴드 출신이다)을 맞아 발표한 헌정앨범에서 함께 듀엣을 발표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리즈시절. 희대의 라이벌이었다는 것이 이해가 될 정도로 둘 다 참 각자의 방식대로 예쁘다. 그리고 참... 젊다.


당시 두 사람의 듀엣을 들으며 나는 언젠가 장국영의 데뷔 25주년쯤 되는 해가 되면 거꾸로 장국영의 노래를 부르는 알란 탐의 모습을 들을 수 있겠구나 기대에 부풀었더랬다. 그런데 그런 기대는 영 다른 방향으로 실현되었다. 장국영이 떠난 지 7년 후, 알란 탐이 <我們一起唱過的歌(우리가 함께 불렀던 노래)>라는 리메이크 앨범을 발표한 것이다.


장국영의 아련아련한 원곡보다 상당히 뽕끼가 느껴지는 해석이라, 처음 들었을 때에는 풉 하고 웃으며 '역시 알란 탐 스타일이구나' 싶었다. 두 사람이 함께 불렀던 알란 탐의 노래에서는 레슬리가 뽕끼를 뽐내더니 둘의 케미는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구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비록 장국영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지만, 이렇게 그의 노래를 불러낸 알란 탐이 마냥 반갑다. 이루어지지 못한 듀엣에 대한 아쉬움을 담아 한 번 들어보시길.


https://www.youtube.com/watch?v=ckZMLHAPA1Y

아쉽게도 앨범 버전은 유튜브에 없고, 중국판 <히든싱어>에서 선보인 라이브 버전을 소개한다.






이렇게 내가 사랑한 장국영의 리메이크곡들을 소개했다.

혹, 더 듣고 싶으시다면 댓글을 남겨주시길.

아직 나의 'Re-Leslie' 폴더에는 풀지 않은 음원들이 많이 남아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