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레슬리 ep19 : 내가 사랑한 가수 장국영 (6)
가끔씩 장국영이 등장하는 영상을 보다 보면 현타가 올 때가 있다. 워낙 동안이다 보니 그의 나이를 알면서도 까먹게 되는데, 그러다가 그가 등장하는 영상이나 사진을 보다가 문득 옆에 선 사람을 보곤 흠칫 놀라곤 하는 것이다.
아, 맞다. 우리 국팔씨 56년생 잔나비띠였지.
이미 장국영이라는 이름 석 자를 역사 속에서 튀어나온 것인 양 느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직 나에게는 그가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일 테다. 그래서 가끔씩 내 기준의 역사 속 인물이나 아주아주 옛날 사람이라 생각하는 이와 함께 있는 레슬리를 볼 때마다 그의 연배를 새삼스레 깨닫고는 현타가 와버린다.
그뿐인가. 80년대의 어리고 풋풋하고 (심지어 촌스러운) 장국영과 그의 친구들을 보아도 현타는 어김없이 찾아온다.
아 맞아, 저런 모습도 있었더랬지 하는 마음이 들며 새삼스럽게 다시 빠져들게 만드는 영상들.
현타가 오는 이유가 참 다양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시절의 레슬리, 그리고 그와 함께 한 스타들을 보며 이내 엄마 미소를 짓게 되는 영상들을 모아보았다.
feat. 조용필, 알란 탐, 모리 신이치(森進一)
80년대의 일본 음악계에는 아시아 음악인들이 한데 모여 교류하는 행사가 여럿 있었다.
'팍스뮤지카'가 그랬고, '동경가요제'가 그러했다. 대개 일본과 한국과 홍콩의 뮤지션들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행사였는데, 이 공연들은 매년 국내 TV에서 녹화 중계되곤 했다. 대부분 MBC에서 방송되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리고 매년 이런 공연들이 방송될 때마다 화면 하단에 번역되어 나오는 가사를 보면서 아, 다른 나라에서는 저런 내용으로도 가사를 쓰는구나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맞다, 누차 말하지만 나도 결국은 옛날 사람이다)
이 노래는 1987년 18회 동경가요제에서, 가요제의 중심점에 섰던 일본과 한국과 홍콩의 남자가수 네 명이 함께 부른 곡이다.
원곡을 부른 모리 신이치가 서두를, 장국영이 1절의 후렴을 부른 후에.. 무려 조용필이 등장한다.
조용필과 장국영이 한 무대에 서서 노래했다니, 두 사람이 80년대라는 동시대를 풍미한 스타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이 한 무대에서 함께 노래한 적도 있다는 사실에는 매번 새삼스레 놀라게 된다.
가사를 보니 항구를 떠나가는 배에 남자를 비유한 것이 꼭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가 떠오른다. 심수봉의 노래가 남겨진 여자의 시선이라면, 이 노래는 떠나는 남자의 시선으로 쓰여진 곡 같아서 더 재미있다.
그런데 ‘겨울의 리비에라’라니, 무슨 뜻일까. 리비에라는 지명의 이름으로 “겨울의 해안가”정도로 해석이 가능하다고.
https://www.youtube.com/watch?v=Qki_F-bWln4
feat. 등려군, 임자상, 여방, 매염방, 와니
조용필과 한 무대에서 놀랐다면 이번에는 등려군이다.
왠지 등려군은 장국영보다 한~참 더 나이가 많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3살 연상의 누나다. 생각해보면 영화 <첨밀밀>의 엔딩이 등려군이 세상을 떠난 1995년 즈음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장국영과 등려군 역시 동시대의 스타인데, 대만과 홍콩이라는 지리적 거리만큼이나 두 사람의 음악 스타일도 다르다 보니 함께 선 무대를 처음 보고 꽤 놀랐다.
이 무대는 1986년 ‘白金巨星耀保良’이라는 무대의 영상이다. 당시 인기가수들이 총집합한 무대에서 꾸며진 스페셜 스테이지이다.
가수 겸 작곡가이자 홍콩스타 엽천문의 남편이기도 한 임자상과, 대만을 대표하는 스타인 등려군, 그리고 장국영이 1절을 부르는데.. 등려군과 어깨동무한 장국영이라니, 눈으로 보면서도 늘 신기한 영상이다.
그리고 또 하나, 노래 초반에 마이크가 켜지지 않은 것 같지만 음향사고에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장국영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이놈의 콩깍지는 언제나 벗겨지려는지 원.
https://www.youtube.com/watch?v=zaQ-y4e2h2k
feat. 매염방
위에서 소개한 ‘白金巨星耀保良’에서 선보인 매염방과의 듀엣 무대이다. 이 곡은 두 사람 모두가 팬이었다고 알려진 일본 여가수 百山口惠(야마구치 모모에)의 노래를 매염방이 개사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곡이다. (사족이지만 야마구치 모모에는 장국영의 <風繼續吹(풍계속취)>의 원곡자이기도 하다.)
흔한 백댄서 하나 없이 오직 장국영과 매염방 둘로만 채워진 무대. 하지만 둘은 엄청난 기운을 뿜어대며 무대를 한 가득 채운다.
신나게 노래하면서 춤추는 둘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아, 실로 엄청난 끼를 가진 사람들이구나'와 '둘 다 몸이 참 가볍구나' 하는 것. 스프링처럼 팡팡 튀어 오르는 가벼운 동작이라니.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저렇게 뛰면서도 멋진 라이브를 보여준다. 실로 엄청난 폐활량이다.
이 영상을 처음 본 것은 아주 오래전 어디서 구했는지도 모를 비디오테이프를 통해서였다. 두 사람이 함께 춤추는 아주 짧은 부분이 스치듯 담긴 영상이었는데, 어이 없게도 풀 버전은 레슬리의 사후에 비행기에서 보았다.
언젠가 소개했던, 레슬리가 세상을 떠났던 그 해 생일에 홍콩을 찾았는데 캐세이퍼시픽의 기내 동영상 중에 TVBS에서 제작한 그의 추모 스페셜 영상이 있었다. 한국에서 홍콩으로, 다시 홍콩에서 다시 한국으로 날아오는 동안 나는 그 스페셜 영상에서 이 무대만 계속 반복해서 돌려보았던 기억이 난다.
가볍게 날아오르며 핑그르르 춤추는 아이돌 시절의 까무잡잡한 레슬리라니,
슬쩍 장난까지 쳐가며 절친과 신나게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이 무척 행복해 보이는 영상이기도 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nJd9boOGk9Q
feat. 허관걸
국내에는 영화 <最佳拍檔(최가박당)>으로 유명한 배우 허관걸. 하지만 홍콩에서는 배우보다는 가수로 먼저 분류되는 사람이다. 그리고 알고 보면 그는 현재의 홍콩 음악계를 만든 장본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0년대 영어로 된 노래의 커버 음악뿐이었던 홍콩에서, 처음으로 광동어로 개사된 노래를 선보인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허관걸은 가수인 동시에 노래를 직접 만드는 작곡가이자 작사가이기도 했는데, 장국영의 히트곡 <沈默是金(침묵시금 / 침묵은 금)> 역시 그가 직접 가사를 쓴 곡이다.
그렇다면 이 노래의 작곡은 누가 했을까?
맞다, 바로 장국영이 했다. 그 남자(장국영)의 작곡과 그 남자(허관걸)의 작사가 만나 완성된 노래이다.
이 무대는 1992년 허관걸의 가수 은퇴 파티에서의 라이브이다. 당시 가수로서는 은퇴 상태였지만, 존경하는 선배를 위해 기꺼이 무대에 올라 노래하는 레슬리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영상 속에서 장국영은 남자들끼리의 듀엣곡이 별로 많지 않다고 말하는데, 그 말이 무색하게 두 사람은 듀엣곡을 두 곡이나 발표했다. 하나는 장국영의 솔로곡으로도, 허관걸과의 듀엣곡으로도 발표된 <沈默是金>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 <최가박당 5>의 주제가인 <我未驚過(아미경과 / 난 놀라지 않았어)>이다.
둘이서 주거니 받거나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허관걸과 장국영도 '最佳拍檔(최가박당 / 최고의 파트너)'라 부를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https://www.youtube.com/watch?v=BNRIuaxd1YQ
feat. 이선희
1989년 봄, 이선희와 함께 했던 조인트 콘서트에서 부른 노래이다. 현타가 올만큼 새삼스러운 영상도 아니고, 또 워낙 유명한 무대이기도 하지만 그 시절의 이선희와 그 시절의 레슬리가 함께 선 모습은 언제 봐도 흐뭇한 얼굴을 하게 한다. 그래서 빠뜨릴 수가 없었던 영상이다.
이 무대에서 레슬리는 "J, 난 너를 사랑해" 하는 대목에서 얼굴을 훅 들이대는 등 시종일관 이선희와 눈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모습이다. 반면 이선희는 쑥스럽고 부끄러운지 시종일관 뻣뻣하게 경직되어 있다. 그런 그녀가 이해가 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한 무대이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내내 손바닥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장국영이라니. 한국어 발음이 어려운지 커닝 페이퍼도 그다지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열심히 이선희의 입모양을 보며 따라 부르는 모습도 귀엽다.
두 사람의 음역대가 워낙 달라서 노래하는 레슬리의 목소리가 좀 힘겨워 보이고, 불협화음이 나는 것인가 싶은 구간도 잠깐 있지만 그래도 한국어로 노래하는 그를 볼 수 있는 레어템이자 완소템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WnG0V7erQ5s
오늘 이 영상들은 유튜브에 업로드된 지 오래인 유명한 것들이라 모두 본 분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울 것 없는 영상일 수도 있지만, 다른 가수들과 노래하는 그의 모습을 다시 한번 즐겨주시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