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국영 <열화청춘>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많이 놀라셨죠? 디테일을 알고 보면 충격이 덜할지도 몰라요

by 장지희

지난 4월 1일은 스물두 번째 맞이하는 만우절이었다. 어느새 22년. 20주기를 기념하느라 홍콩 전체가 들썩였던 것도 어느새 2년 전 일이 되었다. 긴 시간을 거치는 동안 만우절은 다시 돌아오는 것이 반갑지 않은 날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언젠가부터는 옛 영화들이 재개봉되는 위안도 함께 하는 날이 되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번엔 무려 두 편이나, 그것도 매해 돌림노래처럼 등장하던 작품이 아닌 무려 <열화청춘>과 <대삼원>이 스크린에 걸렸다.



<열화청춘>은 참 이상한 영화다. 90년대 말 비디오테이프로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랬다. 등장인물 중에 제정신 박힌 사람이 아무도 없다. 공감은커녕 이론적인 이해조차 어렵다. 결말은 급발진이라는 표현으로도 소화하기 어렵다. 그런데 겉포장지는 요사스러울 만큼 예쁘다. 배우들은 더 예쁘다. 이런 혼란스러운 조합이 섞여서 내게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이 되었다. 죽었다 깨도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장국영의 초기작들을 말할 때 이 작품을 첫 손에 꼽곤 했다. 솔직히 나도 뭐가 좋은지 말로 설명을 못하면서도 일단 봐라, 보면 안다, 어쨌든 좋다, 만 남발했던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20여 년 뒤, 중년이 되어 이 작품을 두 영화제에서 차례로 다시 봤다.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다시 보았을 때의 감상은 한마디로 '경악'이었다. 말로는 설명해낼 수 없었던 매력은 그대로였으나 그 사이 내가 너무 늙어버렸나보다. 그저 당황스러웠다. 예전에는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던 것들에 하나하나 트집을 잡고 싶었다. 그리고 그 삐딱한 마음만큼 영화를 이해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컸다. 비록 그 마음은 현생에 치여 이내 잊혀졌지만, 지난해 부산영화제 커뮤니티비프를 기점으로 되살아났다. GV에 게스트로 초대받아 이 작품에 대한 토크를 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제대로 이해하고 가야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영화를 꽤 열심히 공부했지만.. 제한된 시간 안에 다양한 주제를 오가다보니 미처 이야기하지 못한 것들이 많아 아쉬웠다. 극장 정식 재개봉을 맞아 이참에 그때 찾아내고 이해했던 것들을 글로 남겨보려고 한다. 물론 나만의 신박한 해설을 쓰겠다기보다는, 왜 이 영화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필리버스터 급의 변론이지만. 그래도 이 글이 급발진 투성이인 영화를 보며 당황할 <열화청춘>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빌어본다.








어디서 일본 냄새나지 않아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캐시(하문석)는 가부키 춤을 추고, 루이스(장국영)는 일본도(刀)에 관심을 보이며, 루이스와 캐시는 함께 욱일기를 걸고 '일본가수 대침략'이라는 행사를 준비한다. 그런가 하면 루이스의 새엄마와 토마토(엽동)는 일본어회화 연습에 열심이고, 캐시의 고모는 일본풍의 옷을 만드는 패션 디자이너이다. 거기에 후반부에는 적군파라는 일본단체까지 등장한다. 이렇게 영화에는 시종일관 '일본'이라는 코드가 집요하게 등장한다. 왜일까.



80년대 아시아문화의 중심에는 일본이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홍콩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이러한 일본문화 칭송은 꽤 당혹스럽다. 홍콩 역시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때 일본의 그늘에서 자유로웠던 나라가 몇이냐 있었냐 반문할 수도 있지만, 홍콩은 대만과 달리 꽤 혹독한 시기를 거쳤다. 홍콩의 자랑 페닌슐라 호텔은 일본군 본부로 활용되고, 시민 전체가 물자배급을 받아 생활하는 등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졌다. 그 결과 당시는 홍콩이 영국을 통치를 받은 이래 가장 처절한 시기였다고 평가된다.

그런데 영화가 개봉된 1982년은 그 시절을 겪은 지 40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이다. 그 시절에 저렇게까지 일본문화를 동경하는 영화가 버젓이 개봉되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여기에는 감독의 계산이 숨어있었다.


당시 홍콩에서 일본의 대중문화가 신드롬을 일으켰던 것은 사실이었다고 한다. 영화가 지나칠 정도로 일본문화에 열광하는 젊은 층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그 시기 홍콩에서 유행했던 대중음악이 대부분 일본음악을 개사한 것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경험했던 기억하는 기성세대 입장에서는 지극히 위험천만하고도 못마땅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당시 신세대 감독이었던 담가명은 그 역시도 일본문화에 매혹되면서도 그에 대한 위험을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는 홍콩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화려하고 트렌디한 일본문화의 겉모습 아래 감춰진 양면성을 보여준다. 영화 중반에 등장한 일본의 세련된 디자이너는 돌연 적군파 여장교라는 본색을 드러내며 퐁, 신스케, 그리고 캐시를 사무라이의 방식으로 처단한다. 그것도 그들이 바라던 이상향으로의 출발 직전에. 그것도 그들이 동경해 마지않았던 일본도(刀)로.

실제로 담가명 감독은 1999년 홍콩국제영화제에서 이 작품의 상영 뒤에 이어진 관객과의 토크에서 홍콩과 일본과의 관계를 '애증의 관계'로 요약하고, 이 작품에서 일본 문화에 대한 양면성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일본의 유행문화 뒤에는 잔혹한 문화가 도사리고 있음을 적군파라는 형태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적군파(정식명칭은 일본적군파)는 1969년 발족해 1970년대에 주로 활동한 일본의 극좌파 테러단체다. 굉장히 과격한 테러활동을 이어간 것으로 유명한데, 민간항공기를 납치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도 손을 잡는 등 규모가 큰 테러를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조직을 이탈한 배신자에 대한 처벌이 엄격했던 것 같다. 영화에서는 할복만 강조하지만, 실제 조직을 이탈한 동료를 살해기록을 찾아보면 그 방법이 훨씬 더 과격하고도 잔혹했다. 이처럼 잔혹한 적군파의 등장은 홍콩 사람들에게 전시 일본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전달해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영화를 촬영하고 편집하고 개봉하던 1980년대 초는 일본이 펼친 대담한 역사왜곡의 시작점이었다. 일본 자민당은 1980년 '편향 교과서 캠페인'이라는 운동을 전개했는데, 이 운동의 결과로 교과서에 한국, 중국 등의 아시아 침략을 "침략"이 아닌 "진출"로 개정했다. 침략은 진출로, 출병을 파견으로, 한국의 3.1 운동을 폭동으로, 독립운동 탄압을 치안유지 도모로 표기하는 등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만행을 호도하고 미화한 것이다. 이후 ‘침략인가 진출인가'라는 표현은 당연히 한국, 중국 등 주변국가와 외교 문제로까지 발전했다. 실제로 국내 신문 아카이브를 검색해 보면 이 문제를 다룬 기사들을 찾아볼 수 있었는데, '일본가수의 침략'이라는 포스터는 이를 꼬집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짙어도 너무 짙은 왜색의 이유를 찾고 나니, 어딘지 모르게 좀 기시감이 들었다. 일본문화에 열광하는 젊은 세대와, 일본 통치시기를 기억하기 때문에 이걸 이해하지 못하고 못마땅해하는 기성세대. J-POP이 유행하고 일본문화개방이 논의되었던 1990년대의 한국을 생각해 보니 아, 대충 그런 분위기였겠구나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우리나라는 문화개방을 굉장히 조심스럽게 진행해서 홍콩과 똑같다고 보긴 어렵겠지만.

관련해서 개인적으로 무척 흥미로웠던 것은 한 일본인의 평론이었다. 이 사람은 일본에서는 한류 열풍이 계속되는데, 반면에 한국에서는 일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예로 들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본과 주변 아시아 국가들의 관계에는 단순히 유행문화와 예능을 누리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 긴장감이 끊임없이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이미 20년 전에 보여줬다"라고.




감독이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작가도요)


잘 알려져 있듯, <열화청춘>은 홍콩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제작진도 무척 쟁쟁하다. 지금은 거장이 된 담가명을 필두로, 조감독이 무려 관금붕이고, 장숙평은 미술감독을 맡았다. 그리고 조금은 생뚱맞지만 유진위가 제작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감독 담가명과 시나리오 작가 진관중이 의기투합해서 만든 작품이다. 제작사의 투자를 이끌어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절반정도 촬영을 마쳤을 때 이미 예산이 모두 바닥나버렸다. 이제 와서 영화제작을 엎자니 손해가 막심하고, 돈 먹는 하마 같은 감독을 그대로 두면 안 되겠다 판단한 투자자들은 담가명을 해고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이름도 비슷한) 당기명이라는 인물을 감독으로 기용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담가명 감독의 단독작품으로 알려져 있음에도, 간혹 감독을 두 명으로 기재하는 영화 DB도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감독만 교체됐느냐. 당연히 아니다. 빠르게 촬영을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시나리오 작가도 교체된다. 그런데 투자자 혹은 제작자들은 아무래도 돈 문제는 돈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나 보다. 진관중 작가 대신 당시 이름을 날리던 스타 시나리오 작가 4명을 동시에 기용했다. 이 작가들의 집필방식이 다소 황당한 게, 집단집필이 아니라 한 사람이 시나리오 전체를 수정하고 빠지면 그다음 사람이 들어와서 처음부터 다시 뜯어고치는 식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운전대를 잡은 사람에 따라 이야기가 이리저리 방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하지만 영화가 주는 묘한 느낌은 여러 작가들이 엮어놓은 콜라주에서 온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재미있는 것은 레슬리가 연기한 루이스가 어머니의 라디오 녹음본을 듣는 장면은, 현직 라디오작가로 활동하던 작가가 추가한 설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투입된 작가가 극의 초반부까지 수정했다는 걸 보면, 이 작품의 시나리오는 처음부터 정교하게 작성되어 있었다기보다는.. 어쩌면 왕가위 방식의 쪽대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잘 알려져 있듯 담가명 감독은 왕가위의 영화적 스승이기도 하다. 어쩌면 왕가위의 투자자 피 마르게 하는 제작방식은 스승님께 배운 걸지도.. 물론 왕가위 쪽이 청출어람이긴 하지만)


그렇게 다수의 뱃사공이 노를 저은 덕분에 영화는 당초 계획했던 곳과는 완전히 다른 곳에 도착한다. 당초 담가명이 의도한 엔딩은 다음과 같다.

유유자적 그들만의 사회를 즐기던 네 주인공 캐시, 퐁, 루이스, 토마토, 그리고 신스케는 결국 노마드 호에 올라 아라비아로의 항해를 시작한다. 하지만 망망대해에서 나타난 일본 적군에게 신스케와 퐁, 캐시가 살해당하고, 뒤이어 루이스와 토마토는 항해를 계속해나간다.

하지만 제작비 문제로 선상에서의 장면을 촬영할 수 없게 되었고, 거기에 감독과 작가가 모두 교체되면서 문제의 모래밭 살육신이 등장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엔딩이 원래 계획과 비슷하다는 것이 꽤 의외였다. 내심 완전히 다른 엔딩을 계획하지 않았을까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새로운 팀이 꾸려졌다고 해도 제작비 부족에 시달리는 와중에 원래의 엔딩에서 크게 벗어나기 어려웠을테니까. 그리고 설령 원래의 엔딩을 그대로 살렸더라도 그곳까지 다다르는 과정이 완전히 다를 것이기에 계획과는 다른 결과물이 나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원래의 결말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데 감독과 작가가 교체되기 이전에도 촬영상의 문제가 많았던 모양이다. 사실 이 영화의 제목은 원래 <열화청춘>이 아니었다고 한다. "불타는 청춘"이라는 제목의 뜻과 극이 무척 잘 어울려서 다른 이름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원래는 <反斗幫 반역자들>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담가명 감독은 훗날 한 인터뷰에서 '성명학' 때문에 제목을 바꿨다고 털어놓았다. 하도 촬영이 여러 번 지연되고 제대로 진도를 나가지 못해 고민을 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 절친한 친구인 엄호 감독의 추천으로 성명학 전문가를 모셨다고. 사람도 일이 잘 안 풀리면 개명을 고민하는데, 나름 멀쩡한 영화의 제목을 도중에 바꿀 정도로 제작과정이 험난했음을 알 수 있다.




취업사기에 더빙사기까지.. 우당탕탕 촬영 에피소드


제작과정이 순탄치 않았던 만큼, 촬영과 관련된 에피소드도 꽤 많았다. 우선 캐스팅 과정이 재미있는데, 장국영은 일종의 취업사기로 이 영화에 합류하게 되었다. 담가명 감독은 장국영의 분위기와 외모를 눈여겨보며 루이스를 연기할 배우로 일찌감치 그를 낙점해 두었다. 하지만 정작 당시의 장국영은 연기변신을 꾀하고 있었다. 드라마에서 선보였던 부잣집 도련님 같은 역할은 그만하고 좀 더 남자다운 역할을 하고 싶어 했다고. 이걸 전해 들은 감독은 이 작품이 대담하고 분방한 청춘의 이야기인 데다, 탕진업과 주먹다짐을 해야 하는 장면이 있다는 것을 어필했다고. 결국 장국영은 남자다운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해 출연을 결정했지만.. 그 결과 탕진업과의 매우 모양 빠지는 싸움 끝에 그에게 뽀뽀까지 받아야 했다.


여자주인공 두 사람은 이 작품으로 데뷔했는데, 엽동은 오디션을 통해 발탁되어 제작사인 세기영화사의 전속배우가 되어 월급을 받으며 촬영했다. 그리고 하문석은 모델로 활동 중이었는데, 그녀가 출연한 광고를 본 각본가의 추천으로 면접을 보고 합격했다.

그런데 문제는 두 사람 모두 촬영과 개봉당시 미성년자였다는 점이다. 엽동은 19세, 하문석은 17세였는데 요즘 같으면 감독부터 제작자까지 모두 잡혀갈 일이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문제의 트램씬이 미성년자 하문석의 첫 촬영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장면은 따로 대본도 없었다고. "장면을 미리 설계하고 순서대로 촬영하면 대본이 필요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감독의 주장인데, 설명을 들을수록 어질어질해진다. 결국 하문석은 촬영 전에 브랜디를 좀 마셨다고 한다. 미성년자 음주에 파격적인 19금 장면 촬영까지… 이래저래 문제작이다.




한편 앞서 언급한 제작비 부족은 "우리가 바로 사회다"라는 유명한 대사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 대사는 영화의 주제를 담은 아주 중요한 대사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사실 이 대사는 장국영의 목소리가 아니다.

당시 영화들은 모두 후시녹음을 했기 때문에 촬영 후에 별도의 더빙과정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배우가 아닌 성우가 더빙을 하는 경우도 흔했다. 장국영은 본인의 목소리로 직접 더밍을 했는데, 제작사에서 더빙을 마치는 날 출연료를 지급하기로 약속했었다고. 하지만 제작사는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이에 화가 난 장국영은 마지막 대사 하나만을 남겨두고 자리를 떴다. 전체 출연료라기보다는 일종의 잔금이었던 모양인데, 장국영의 공격을 받아친 제작진의 반응이 웃프다. 화가 나서 가버린 장국영에게 출연료를 주고 대사를 시킨 게 아니라, 조감독인 관금붕 감독에게 대리 더빙을 시킨 것이다.

훗날 한 기자가 담가명 감독에게 이 일화를 언급하며 "말하지 않으면 잘 모르겠다"라고 했더니 담가명 감독이 "아니다, 티가 난다"고 퉁명스럽게 답했다고 한다. 정말로 나 역시 이 사실을 알고 나서 영화를 보니 과연 그 부분은 레슬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절대로 아니었다)


담가명은 배우들을 매우 엄격하게 통제하는 감독이라고 한다. 게다가 입이 꽤 거친 편이라고 한다. 장국영도 평소 담가명 감독을 '배우들에게 욕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라고. 한 번은 거의 극한에 가깝게 욕을 먹은 적도 있었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가명과의 작업을 즐겼고 언젠가 다시 작업하기를 바랐다. (얄궂게도 담가명과 왕가위는 장국영과의 관계성조차 유사하다. 역시 그 스승에 그 제자인가)

엽동 역시 담가명은 배우의 자유로운 연기를 용납하지 않는 매우 깐깐한 잣대를 들이대는 감독이라고 말한다. 덕분에 배우들도 때때로 갈피를 잡지 못할 때가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덕분에 담가명 감독은 연기는 배우에게 맡겨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는데, 그때 "장르마다 접근이 달라야 하고, 배우에 대한 요구도 달라져야 하기 때문에 연출 방법은 한 가지로 이야기할 수 없다."라고 답했다고.




하루 천하로 끝난 도발적 개봉


<열화청춘>은 1982년 11월 26일 개봉했다. 개봉 당시의 홍보문구는 “以性開始以愛結束,最後面對死亡 섹스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나, 최후에는 죽음을 맞는다”였다고. 홍보카피라기보다는 로그라인(한 줄 줄거리)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직관적이지만, 당시에는 그 자체로 엄청난 파격이었다고.


하지만 이렇게 도발적인 개봉이 무색하게 영화는 하루 만에 상영금지처분을 받는다. 홍콩 교육계가 정면으로 반발하고 나선 결과인데, 가장 문제가 된 장면은 당연히 두 커플의 섹스신이었다. 탕진업과 하문석 쪽이 장소가 문제였다면, 장국영과 엽동은 만난 당일에 섹스하는 게 문제였다고. (당연히 더 문제시되었던 쪽은 전자였다) 결국 1.5~2미터 분량의 필름을 삭제한 후에 재상영되었지만, 전체 상영기간이 7일 정도로 길지 않았고 화제에 비해 흥행성적도 좋지 않았다. 그해 홍콩박스오피스 1위는 최가박당이었는데, 이 작품의 1/10을 밑도는 성적을 기록했다.

재미있는 것은 상영중단을 이끈 사람은 사회운동가인 사도화라는 사람인데, 영화 <칠중주>에서 허안화 감독이 만들었던 <교장>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40년간 교직생활을 했던 교장선생님 출신 사도화는 이 작품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고.


그리고 홍콩 3년 후에는 대만에서도 개봉했는데, 그나마도 하문석이 출연한 <殺夫 남편을 죽여라>라는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이뤄진 일이었다고 한다. 물론 대만문화는 홍콩보다 훨씬 더 보수적인 탓에 훨씬 더 강도 높은 편집 끝에 개봉되었다고 한다. 강도 높은 편집이었다고 하니 문득 궁금해진다. 당시 대만관객들은 이 영화가 무슨 이야기인 줄은 알고 보았을까.




그런데 왜 이렇게 야하지?


영화의 요트나 정욕적인 요소는 프랑스 작가 조르주 바타유의 소설 <Story of the eye 눈 이야기>를 차용한 것이다. 이 작품은 "인간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학적인 대답이 담겨있는 소설이라고 평가된다고 한다. 어떤 부분에서 모티브를 얻었을지 궁금해서 전체를 읽어볼까 했으나.. 줄거리만 대충 봤는데도 난교, 신성모독, 살해 등 온갖 변태적인 내용이 난무해서 포기했다.

이 소설은 놀랍게도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하는데, 어지간한 포르노그라피 따위는 우습게 뛰어넘는 수위의 이야기에서 담가명이 찾아낸 것은 무엇이었을지가 무척 궁금했다. 그리고 내가 다다른 결론은 '금기'였다. 금기를 깨는 도발적인 소설을 쓴 조르주 바타유처럼, 담가명 감독 역시 금기를 깨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영화는 더욱더 매운맛이 되어야 했고, 더 도발적이어야만 하지 않았을까. 내 예상이 맞다면, 그는 비록 미숙했으나 꽤 성공적으로 홍콩사회의 금기를 깼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담가명 감독이 소설에서 차용한 것은 섹스 외에도 다른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NOMAD라는 배의 이름이다. 소설은 위에서 서술한 행각을 벌이던 남녀 주인공이 좁혀오는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요트를 타고 먼바다로 도주하는데, 이 요트의 이름이 바로 NOMAD이다.




40년을 기다려 만들어낸 감독판


이렇게 말도 많고 사연도 많았던 <열화청춘>. 하지만 극장에서 상영 중인 버전은 개봉 당시와는 다소 다른 '감독판'이다. 앞서 1982년에 필름을 삭제하고 재개봉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후에 삭제된 필름이 유실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를 원래 의도대로 만들고 싶었던 담가명에게 감독판 제작은 오랜 염원이었다고.

이를 드러내듯 담가명은 1999년 홍콩국제영화제 <열화청춘> 특별상영 당시에도 감독판에 대한 의지를 피력했다고 하는데, 그 꿈은 개봉 41주년이자 장국영의 20주기인 2023년에 이뤄진다. 유실된 화면을 찾아서 내용을 원래의 구상에 가깝게 복원한 다음, 네거티브 소재를 4K 해상도 디지털 복원하여 2023년 4월 6일 홍콩에서 정식으로 공개했다.


상영 버전이 87분, 감독판이 92분 정도 되는 것으로 보아 약 5분 정도 차이가 나는데, 두 버전은 어떻게 다를까.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원본은 루이스가 라디오 녹음본을 듣는 장면에서 시작하지만 / 감독판은 퐁의 남동생이 어린 나이에 여자친구와 임신했음을 알리는 것으로 시작

2. 원본의 트램씬은 '둘이 무슨 일이 있었나?' 싶은 수준으로 난도질되었지만 / 감독판은 '살짝 자르지 그랬나' 싶을 정도로 길다.

3. 장국영과 엽동의 러브신 또한 다르다

4. 할복에 대한 묘사의 수위가 다르다.








이 영화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고, 그래서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분명 있을 거라 생각하며 글을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다 쓰고보니 안내서라는 거창한 제목이 무색해진다. 영화를 한 흐름으로 읽어내기 보다는 이곳저곳에서 건져올린 키워드에 맞춰서 풀어내다보니, 영화자체보다도 더 중구난방이 되어버린 느낌이 들기도 하고. 하지만 그럼에도 이 글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아주 조금이나마 힌트가 된다면 기쁠 것 같다.


원래는 만우절에 발행하려던 글인데, 바쁜 일상에 밀려 이제야 마무리되었다. 22년이 지났음에도 이렇게 새롭게 극장에서 상영되는 작품이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더불어 내년 만우절에도 이렇게 새로 극장에 걸리는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슬쩍 꺼내본다. 그리하여 내년에도 우리들의 만우절이 조금은 더 가벼운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는 날이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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