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유학생활을 시작하며
나도 모르게 스스로의 포지션을 세팅했다.
'우리는 유학을 왔고,
네가 먼저 공부를 하기로 했으니...
나는 그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서포트 하마.'
이런 마음 이면에는
'내가 공부를 할 때는 얘도 날 도와주겠지?'라는
기대가 있기 마련 아닌가?
이렇게 먹고 튈 줄 누가 알았겠나.
남편의 석사과정은 2년이었다.
느지막이
게다가 많은 준비 없이 오른 유학길이
우리 둘 모두에게 버거웠다.
어찌 됐든 살아남기 위해
없는 손도 만들어 보태야 했다.
이미 시작했고 시간은 정해져 있으니
그 시간을 잘 보내야 했다.
드로잉도 돕고, 논문 자료도 찾고
졸업발표에도 함께 발을 동동 굴렀다.
한 팀이라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도 의문이다.
졸업장에 내 이름 넣어주는 것도 아닌데,
난 왜 그리 열심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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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이나, 생활적인 면에서 오는
다름은 예상했기에 온몸으로 견뎠다.
못 알아듣고 딴 소리 하기는 기본 중 기본!
너무 비싼 물가에
장 볼 때는 항상 머릿속에 숫자들이 둥둥 떠다니고
버스 값 아끼겠다고 걷고 또 걷던 시절이다.
생각지 못했던 가장 큰 벽은
학업을 대하는 '태도', 사고하는 '방식'이었다.
새롭게 생각해야 했다.
꾀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해.
'나도 나름 공부도 했고, 현장경험도 있다.'는
그런 어쭙잖은 마인드를 버리는 게 힘들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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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석사 과정이 시작되었다.
'신랑이 내 논문자료도 찾고 많이 도와주겠지???'
라고 기대하던 순간.
신랑이 취업을 했다.
그것도 일 많기로 악명 높은 회사에.
다 우리가 함께 세운 계획이었고,
함께 지나온 시간이지만...
뭔가 억울하다.
다만, 좀 위로가 되는 건
눈동냥 귀동냥으로 2년을 보내며
영국살이에 감이 쌓였다는 거였다.
나는 유학생으로써
영국교육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무엇을 써야 할지가 분명했다.
첫 학기를 보내고
두 번째 학기를 보내고
논문학기를 앞두고
나는 아이를 가졌다.
수업시간에 입덧을 하고,
부르는 배를 토닥이며 논문을 썼다.
논문을 제출하고 2개월 뒤, 나는 출산을 했다.
왜 내 인생의 타이밍은 이렇게 절묘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