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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 little cabinet Mar 31. 2023

3. 이것은 출장인가? 신혼여행인가?

신혼여행

우리는 뉴욕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이제 유럽에 살게 됐으니

당분간 미주는 가기 힘들겠거니 했다.

예상대로 런던에 오고 10여 년간 미국을 못 가봤다.


미술관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미술관에 가는 건 내 일이자 취미가 되었다.

시카고, 엘에이, 파리, 런던, 동경, 상하이

많은 도시를 다녀봤는데,

뉴욕을 못 가다.

우리의 신혼 여행지는 그렇게 결정되었다.


신혼여행이라 쓰고 출장이라 읽다.

극. 기. 훈. 련이 따로 없었던 우리의 신여행.


신혼여행 전부터,

뉴욕 시내, 근교에 있는 미술관 리스트를 만들었다.

업무를 하며 만들어 놓은 자료들이 있었던 터라 어렵지 않았다.

건축가, 총면적, , 전시장 개수, 교육공간 면적,

휴게시설(카페, 레스토랑), 수장고, 공용공간, 사무실 등등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자료는 다 찾

엑셀파일을 차곡차곡 채워갔다.

이미지도 더해 폴더별로 착착착 정리해 놓았다.

리스트 지금 다시 꺼내어봐도,

참 잘 정리되어 있다.

이런 데에 기쁨을 얻는 나는 변태인가.


우리는 비행기 안에서도 머리를 맞대고 연구했다.

어떤 스케줄로 움직여야

우리가 보고 싶은 미술관을 일정 안에 다 보고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

게다가 신랑이 보고 싶다던 몇몇 물과 거리.

내가 보고 싶은 몇몇 전시들을 보려면  

하루에 3-4곳을 방문해야 했다.


도미토리에서 뽀글이를 먹었던 첫날밤이 지나고,

둘째 날부터 강행군을 시작했다.


메트로폴리탄, 모마, 모마  PS1, 휘트니, 뉴뮤지엄 등등등

모마는 이 필요 없다.

모마  PS1은 상했던 데로 힙했다.

휘트니 뮤지엄에서 만난

제임스 터렐 할아버지 작업은 그저 힐링이었고,

세지마 할머니가 디자인한 뉴뮤지엄은

아기자기했다.


뉴욕 사는 사촌동생 남자친구 차를 얻어 타고

뉴욕 외곽을 달려달려 디아비콘에도 다녀왔다.

(감사합니다. 잘 지내고 계시죠?)

디아비콘에 설치되어 있던

리처드 세라, 루이스 부르주아 대형 작업들은

땅에 꽝꽝 박혀있는 느낌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대형 스케일의 설치작업을 쉽게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저 신기하고 좋았다.


우리 신혼여행 사진에는

우리 둘 사진은 거의 없다.

전시장 공간, 사람들의 이동 동선, 미술관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

재료, 천정, 채광 등의 사진이 주를 이룬다.


가끔가다 내 뒷모습이 걸린 사진들이 있다.

나는 나를 찍어주는 줄 알고 활짝 웃었는데, 뒤 돌으란다.

나는 그저 스케일 체크를 위한 '자' 같은 역할이었다.


둘 다 먹는 데에 참 관심 없.

마침 뉴욕의 Restorant Week 기간이어서

미슐랭 레스토랑들이 우릴 반기고 있었지만!

우린 주로

미술관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고,

미술관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미술관이 문을 닫을 시간이 되면,

헐레벌떡 뛰쳐나 뉴욕 거리를 구경했다.

공원도 걸어보고, 공공조각 작품들도 찾아다니고,

하이라인도 걷고, 애플 스토어도 갔다.


이런 스케줄을 소화하다 보니

저녁에 예약해 놓은 저녁을 먹거나, 공연을 보러 가서는

둘 다 끄덕끄덕 졸았다.


라이온 킹을 보는데 뒤에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기린을 보고

깜짝 놀라 잠에서 깼던 기억난다.

그리고 그 공연장에서 새로 산 선글라스를 잃어버렸다.

자.다.가.


미술관을 찾아 이동할 때는 그렇게 싸웠다.

내가 맞네 네가 맞네.

이 방향이 맞네, 이 길이 더 빠르네.

한 번은 뭐에 홀렸는지

일주일 지하철 이용권을 자동차 주차기계에 넣어버렸다.

이 사건으로도 엄청난 구박을 받고 싸웠다.


나는 길치였지만, 신랑이 가자는 데로 가기 싫었다.

왜 인지는 모르겠다.

항상 여행은 내가 주도적으로 준비해 다녀왔는데.

나도 여행 좀 해본 여잔데.

내 계획대로 움직여야 마음이 편한데.

자꾸 옆에서 말을 보태는 이놈에게 짜증이 났다.


쇼핑을 하다가도 그렇게 싸웠다.

그냥 계속 싸웠다.

이건 이래서 싸웠고, 저건 저래서 싸웠다.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말자며,

각자 볼 거 보고, 각자 사고 싶은 거 사고 만나기도 했다.


이놈을 만나고

따뜻한 나라에서 맛있는 거 먹으며 수영하는 그런 여행을 해본 적이 없다.

신혼여행 이후로도 우리의 여행은 줄곧 이런 식이었다.  

우리는

미술관이라는 공통분모 안에서

지적 허영을 채우는데 짝짜꿍이 잘 맞았다.

(다음 생에, 혹은 이번 생이라도...

다시 한번 신혼여행을 갈 기회가 생긴다면 꼭 휴양지에 갈 거다!)


일주일의 극기훈련 같은 신혼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우린 둘 다 컴퓨터를 켜고

여행에서 찍었던 사진, 보았던 내용들을 정리했다.

컴퓨터는 미술관에서 받은 각종 스티커들로 뒤덮여 있었

트렁크에는 각종 리플릿들이 가득했다.


#신혼여행 #런던 #부부 #뉴욕여행 #뉴욕미술관 #출장 #해외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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