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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 little cabinet Mar 27. 2023

2. 번갯불에 콩 구워 먹기

결혼

영국 석사과정 입학은

포트폴리오가 탄탄하고, 인터뷰를 잘 봤다면

컨디션 오퍼를 준다.

그리고 입학 전까지 영어 점수를 만들면 된다.

3월 즈음에 컨디션 오퍼를 받았으니,

7월까지 영어점수를 받으면 되었다.


매주 토요일 남편은 영어시험을 보기 시작했다.

평일에는 둘 다 근무로 바빴고,

저녁에 짬을 내서 카페에서 만나 영어공부를 했다.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용감했다.

무지하면 용감한 것.


우리는 5월에 양가 어른에게 결혼을 통보했다.

아빠는 꾀나 황당해했다.

당신 딸내미가 이렇게 시집을 가겠다고 할 줄 몰랐겠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단둘이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빠는

아직 어리다고

시집은 더 있다 천천히 가도 된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들을 것을.


누가 한 여름에 결혼을 하겠나.

다행히 식장은 많이 비어있었다.

덥고 더운 한 여름.

7월 6일에 우리는 결혼했다.

(왜 그랬나 몰라)


번갯불에 콩을 구워 반쪽만 먹은 기분?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도 좋긴 좋았다)

속도위반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아쉽지만 아니었다.


대망의 드레스를 고르는 날이었다.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이길 바라며

공주놀이를 하는 날!

한껏 들떠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마지막으로 친  IELTS 영어 점수가 발표되는 날이었다.

당연히 통과되겠지 마음을 놓고 있었다.

너무 믿었다.

도대체 뭘 보고 믿은 거지.

 

같이 고른 드레스를 갈아입고 나왔다.

내가 기대한 건 환하게 웃는 남편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앉아있던 남편의 얼굴은 회색빛이었고,

눈빛은 떨렸으며 눈의 초점은 나가 있었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했지만,

어쩌겠나 골라 둔 드레스들을 순서대로 갈아입었다.


영어 성적은 잘 나오지 않았다.

패닉에 빠진

남편은 내가 드레스 입은 모습을

하. 나. 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양반 하는 말이 더 가관이었다.

결혼식 당일 오전에 시험이 하나 더 있으니,

시험을 보고 결혼식에 참석을 해도 되겠냐고 했다.

이 냥반아.

니 결혼식이라고!!!

속이 터졌다.


결국 우리는 신혼여행을 한주 미뤘다.

회사에는 사정이 생겨 신혼여행을

한 주 미루어가게 되었다고

얼렁뚱땅 얼버무려 말씀을 드렸다.

속사정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창피했다.

(지금이니 웃으며 말한다.)

결혼식 당일 주례 말씀을 해주신 큰 아버님께서는

'이제 다음 달이면

영국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부부에게

응원을 부탁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보며 그저 어색한 미소를 날렸다.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는 호텔에서 하루를 묵고 친정으로 돌아왔다.

나는 돌아오는 월요일 출근을 했고,

신랑은 독서실에 처박혀 영어공부를 했다.


여행 성수기인 7월 

뉴욕행 비행기와 호텔 가격은 오를 때로 올라 있었다.  

비행기와 숙소로 날린 돈이 만만치 않았다.


결국, 뉴욕에서의 첫날밤은 호텔을 구하지 못하고 도미토리에서 묵었다.

방에서 오순도순 뽀글이를 끓여 먹었다.


지금이야 추억으로 이야기하지.

그때는 정말 아무한테 말도 못 하고.

정말 남편이 징글징글하게 미웠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보살의 입문기였다.


#결혼준비 #결혼 #드레스 #결혼일기 #런던 #런던살이 #10년 차부부 #부부 #극한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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