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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CCAEL Dec 07. 2023

"수습"의 비애

열정페이를 강요당하는 현실

관세사 시험 합격생은 의무적으로 1개월의 온라인 또는 오프라인 교육과 5개월의 현장실습을 포함해 총 6개월간의 "수습"기간을 거쳐야 관세사회에 등록을 하고 정식 관세사로 업무를 할 수 있다.


난 현재 수습은 마쳤지만 아직 등록은 하지 않은 상태인 "미등록 관세사"이다.

등록을 해야 관세사법에 따른 보호를 받고 정식으로 업무를 할 수가 있는데 그러지 못한 이유는 경제적인 원인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관세사 등록비는 400만 원이다. 그리고 활동하는 도시마다 지부 회비가 따로 있는데, 내가 활동하는 서울의 경우 지부회비는 50만 원이기  총 관세사 등록비로 450만 원이 소비된다. 할부가 안되고 전액 일시불이기 때문에 부담이 안될 수 없는 금액이다.


법인심사를 전문으로 하는 나의 업무 특성상 관세사 등록은 거의 필수적인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심사 시 세관대응은 등록 관세사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팀에는 늘 등록관세사들이 많았는데, 회사 내부 사정으로 인해 인력이 감축되고, 본부장님이 바뀌면서 팀 내에 등록 관세사가 1명밖에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정을 알게 되신 새로운 총괄본부장님이 우리 팀원들의 관세사 등록 여부를 체크하시고는 아직 등록을 하지 않은 관세사들이 많자 이렇게 여쭤보셨다.


"등록비가 400만 원이라며, 400만 원이 없어?"(놀랍게도 정말 이렇게 여쭤보셨다.)

"네... 없습니다... 저희 연봉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 본부장님."(억울한 마음에 살짝 울컥하긴 했다)




맞다. 관세사는 전문직이다. 전문직은 보통 사람들의 인식 속에선 고연봉직에 속한다. 관세사는 능력에 따라 벌어들일 수 있는 수입에 상한선이 없기 때문에 고연봉직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밑으로 내려갈 수 있는 하한선도 없다.

우리 업계 상황을 잘 모르는 주변 사람들은 전문직 타이틀을 부러워하며, 아직 1년 차인 내 연봉이 당연히 높을 것이라고 짐작을 한다 (아마 그들은 객관적으로 고액연봉자인 회계사나 변호사 등의 직업을 떠올리면서 나를 대입시켰을 것이다). 난 아니라고 진심으로 말하지만 그들에겐 겸손으로 들리나 보다. 정말 아닌데...


난 운이 좋게도(?) 업계에서 규모가 큰 대형법인에 입사를 해서 수습을 시작했다. 그래서 수험생일 때부터 월급 관세사는 박봉이라는 행간의 소문을 어렴풋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매출도 높고, 규모도 큰 이 법인에 어느 정도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계약서를 쓰는 날 박살이 나다 못해 가루가 됐다.


"저... 죄송한데... 이거 세후 금액은 아니죠?"

이전에도 직장을 다녔었기에 고용 계약서를 처음 써보는 것도 아니고, 당연히 계약서 금액은 세전금액일 테지만, 너무도 터무니없는 급여에 내가 잘 못 알고 있나 헷갈려서 저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고 말았다. 


최저시급도 되지 않았던 급여는 야근과 주말 출근을 강행해야 했던 업무 스케줄에 비하면 쥐꼬리가 오히려 커 보일 정도였고, 회사를 다니면 다닐수록 적자인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무언가 잘 못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백번 천 번 양보해서 수습급여가 적은 것은 이해를 해도 법적으로 정해놓은 최저시급을 가뿐히 무시해 버리는 행위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습기간 5개월 동안 정말 열심히 일을 했고, 맡겨진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끝냈다. 처음 투입됐던 기획심사는 과태료 3억을 낼 수도 있었던 외환이슈를 잘 대응해서 0원으로 판정받은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바닥을 뚫고 내려가는 통장잔고와 옷 한 벌도 선뜻 쇼핑하지 못하는 처지에 현타를 느끼며 다음에 입사할 후배 관세사들을 위해서라도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현재 우리의 열악한 상황을 부각하기 위해 주변 다른 법인 및 사무소들의 급여 수준을 조사했고, 조사를 하면 할수록 전반적으로 하향 평준화 되어 있는 업계 실태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중 우리가 최하위였다.

이 자료를 근거로 다음 연봉 협상 때 최소한의 희망연봉을 제시했고, 약 한 달여간의 의견 조율 끝에 약간의 연봉 상승이라는 소기의 성과를 만들어냈다. 물론 이제야 쥐꼬리가 되었을 뿐이다. 적어도 우리 뒤에 들어올 후배 관세사들은 쥐꼬리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거에 만족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참 씁쓸하기도 하다.


물론 전반적인 업계 연봉 수준이 열악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법인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법인 by 법인, 사무소 by 사무소이기 때문에 대형 법인보다 많은 급여를 챙겨주는 사무소도 있고, 복지가 매우 좋은 소형 법인들도 있다. 대표 마인드에 따라 크게 좌지우지되는 환경인 듯싶다.


한 때 열정페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매스컴에서도 많이 차용을 했고, 유행어처럼 사용되다 보니 어느 정도 사회에 경각심이 생기는 가 싶었는데 우리 회사를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나 보다. 

돈이 다가 아닌 것은 맞다. 초반에는 돈보단 배움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의욕과 직업적 자부심, 그리고 나아가 회사에 대한 로열티는 어느 정도 적당한 품위유지를 할 수 있고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경제적 여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급여가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인재의 소중함을 인지하고, 높은 이직률을 막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면서 동시에 최고의 복지는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임을 회사를 운영하는 분들이 알기 바라며, 열정을 저당 잡힌 페이가 아니라, 열정을 쏟은 만큼 페이를 받을 수 있는 그런 환경이 업계에 조성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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