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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묘호랑 Jun 12. 2022

위플래쉬

두 얼간이의 우정과 배신 그리고 사랑

우리의 주인공 앤드류는 미친 음악 선생 플래처의 좋은 친구죠.


앤드류는 플레처가 그를 자극하기 위해 불러들인 라이언의 연주를 완전히 개쓰레기 같다고, 그의 면전에 대고 말합니다. 만약 라이언이 한 성격 하는 학생이었다면, 옥수수가 다 털릴 때까지 그의 아구창을 박살내 버렸을 것이고, 앤드류는 평생 동안 틀니를 끼고 살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는 소중한 교훈을 지니고 살아 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교훈을 얻지 못한 앤드류는 음악적 완성도라는 미명 아래, 열등한 연주자들을 짓밟고 일어서 자기 세계를 있는 대로 확장하고 온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대단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습관을 유지하며 살아가게 되죠. (그는 자기가 먼저 데이트를 신청했던 여자친구에게, 너는 최고의 연주자가 되려는 나의 앞날에 방해가 될 거라면서 헤어지자고 말합니다. 또한 극중 대사에서 알 수 있듯이, 그에게는 단 한 명의 친구도 없습니다. 열등한 동료 학생들은 그의 앞날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런 것 같습니다. 플래처에게 시달리다 못해 자살했다고 추정되는 션 케이시의 사건을 알게 된 어른들이, 그에게 플래처가 한 짓들을 얘기해 보라고 권유했을 때, 앤드류는 주저합니다. 심지어 처음에는 그가 아무 짓도 안 했다고 말하면서, 그를 보호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죠. 이미 그는 학교를 그만두었기 때문에 이제 플래처와는 아무 상관 없는 사이인데도 말이죠.

앤드류는 플래처와 유사한 스타일을 지녔으며, 따라서 그와 유사한 목표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그가 나중에 음악 학교 선생이 되어 악단의 지휘를 맡게 되었을 때, 과연 성에 차지 않는 학생들의 연주를 듣고도, 그 정도면 잘 했다고 얘기해 줄까요? 아니죠. 아마도 그 학생이 결국에는 서러운 눈물을 쏟아 내며 힘없이 스러져 갈 때까지 형편 없는 연주력을 비난하며 몰아붙이다가, 플래처에 비하면 자기는 양반이라고 너스레를 떨지도 모릅니다. 그리고나서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눈가는 플래처에 대한 그리움으로 촉촉히 젖어 들겠죠.

이 두 얼간이는 음악적 완성도라는 진리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극단적 행동을 정당화 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미친 짓거리들은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세계 확장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플래처는 (그가 추구하는 진리에 부합하는) 아름답고 완벽한 음악적 완성도를 선보여야 할 연주회를 망쳐가면서까지 앤드류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죠. 학생들에게 자신의 음악적 완성도에 대한 미친 집착을 관철시킬 수 있는, 즉 자기라는 스타일을 널리 퍼뜨릴 수 있는 선생 자리를 잃는 데에 앤드류가 크게 일조함으로써 절망을 안겨줬기에, 그보다 더 큰 절망을 되돌려 줌으로써 앤드류라는 장애물을 세상에서 배제해 버린 다음, 자기 세계 확장을 다시 시도하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무대에서 신들린 듯한 연주를 선보이고 있는 연주자의 멱살을 잡아채며 꺼지라고 외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수많은 관객들이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광경을 보게 된다면 이제 그에게 학교 선생이나 악단의 지휘자같은 사회적 위치가 허용되지 않을 테니까요), 일정한 한계 아래에서만 행동할 수 있는 플래처는, 자신이 추구하는 스타일에 부합하는 앤드류의 신들린 연주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은, (어떤 한계 또는 범위 내에서) 한 사람은 연주를, 한 사람은 지휘를 함으로써, 같은 미래를 추구(사랑)하고 있다고 볼 수 있죠.

두 사람은 자기 세계 확장이라는 본능에만 충실한 얼간이들이기에, 아마도 연주회가 끝난 뒤에는 무대 뒤편에서 멱살잡이를 하며 옥신각신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자기 세계 확장에 대한 공통의 기회가 생기면,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면, 두말없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연주를 하면서, 지휘를 하면서, 미래 사랑을 실천하겠죠.

우리가 믿는 것에는 근거가 없습니다. 희망이라는 우리 마음 외에는, 분명하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건 결국, 자기라는 스타일의 확장을 간절히 염원하는 하나의 마음일 뿐이죠. 그래서, 진리는 없습니다. 최소한, 적어도, 누구나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숫자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이 미묘한 인생에 관한 또는 문화에 관한 문제에는 진리가 존재치 않기에, 두 얼간이의 희망에도 정당성은 없습니다.

인간은, 사피엔스는, 이 빌어먹을 시간을 견뎌 내야 살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언제나 지랄같은 희망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 3대 영양소 뿐만 아니라 희망을 필요로 하기에, 언제나 지랄을 해야 합니다. 사르트르 역시 희망의 노예라서,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라고 말했다죠.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저 지랄하다 자빠지는 존재라는 것을요. 이편이 더 객관적이라는 사실을요. 사르트르는 희망을 위해서,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 인간을 아름답게 정의한 것 뿐입니다.

드럼 연습에 열중한 나머지 살갗이 다 벗겨져 피범벅이 된 손바닥으로 스네어 드럼에 피칠갑을 하는 앤드류는 정작 자기가 왜 그런 스타일로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정확한 이유를 모릅니다. 그건 바로 그가 시스템의 노예이기 때문이죠.
시스템은 악마적입니다. 희망은 다른 누군가의 뱃속에만 있죠. 만약 앤드류가 죽을 때까지 무인도에서 살아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면, 금으로 만든 최고급 드럼 세트를 선물 받는다 해도 예전처럼 열심히 연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최고가 되어 다른 이들을 굴복시키거나 감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으로 살아가기 때문이죠.
자족하는 생활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사회적 지위의 측면에서 지금보다 낮은 곳으로 내려가기를 요구받는다면, 그러한 상황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악마적인 인간들 때문에 괴로운 게 아니죠. 우리와 다른 스타일을 추구하는 다른 인간들 때문에 자기 세계 확장이 방해받아서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악마적 시스템의 하수인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꿈과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뛰어난 연주자가 부와 명성을 얻고 더더욱 유명해지면, 나머지 연주자들은 그만큼 좌절해야 하죠. 뛰어난 연주자는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99프로의 노력도, 그렇게 노력할 수 있는 재능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죠.
초등학교 입학식에 가보세요. 모든 아이들은 그 어떤 열망을 품은 눈을 반짝이며 저마다 빛나고 있습니다. 어떤 아이도 운동장 한구석에 널부러져 앉아 초점 없는 눈으로 어딘지 모를 곳을 응시한 채 세상을 저주하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 더 이상의 노력을 그만두고 자포자기하게 되는 것은, 자신보다 훨씬 더 우월한 결과물을 내보이며 겸손을 떠는 친구들을 보며 절망에 빠지기 때문이죠.


더욱 더 노력했어야 했다고 강변하는 자들은 우월한 능력을 타고났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죠. 그들은 절망이 어떤 식으로 사람을 좀먹는지, 이 악마적 시스템이 어떻게 인간을 갉아먹는지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의 근본 동력은 가능성이기에, 생명력은 여기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기에, 가능성 즉 재능이나 재화가 없는 이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으며, 이를 견디기 위해서는 자신을 파괴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파괴라는 스타일의 확장을, 이에 대한 희망을 간절히 원하게 됩니다.

보다 살기 좋은 세상을 위해서는 기부가 아니라 포기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보다 더 큰 가능성을 확보함으로써 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되어 갈수록, 재능을 타고 나지 못한 자들에게는 점점 더 작은 가능성만 주어질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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