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우와 3번째 수업을 하던 날이었어요. 은우가 노트를 하나 들고 왔습니다. 그 노튼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학습노트 같은 것이었어요. 노트 위쪽에는 10개가 넘는 숙제가 적혀 있었고, 왼쪽 아래로 날짜가 적혀 있었습니다. 날짜 옆으로 각 과제마다 동그라미와 엑스 표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대부분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어요. 은우의 행동에 저는 생각이 많아졌어요. 빼곳히 그려진 동그라미가 자랑스러워 제게 자랑하는 모습이 아니었거든요. 뭔가 고자질하는 것 같기도 했고, 힘드니까 구해달라고 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밤마다 숙제하느라 은우와 어머니가 보내야 했던 힘든 시간이 짐작되었습니다.
'아가들이 다 자도 해야 하는 숙제, 울면서 해야 하는 숙제'
은우가 일기에 쓴 내용인데, 매일 밤 은우가 숙제를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 심정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은우의 어머니는 너무 좋은 분이시고, 아이를 위한 마음으로 좋은 공부 습관을 잡아주기 위해 원칙을 지키려 했을 뿐이란 것도 너무 잘 압니다. 아이와 실랑이를 벌이느라 어머니가 더 힘들었을거라고 생각해요. 은우 어머니께서도 마찬가지로 제게 하소연을 합니다.
"양이 많지 않아요. 5분이면 풀 수 있는 문제들을 시간 끌어서 밤까지 한다니까요."
아이가 집중하지 못해 시간이 길어진 것일 뿐, 습관만 잘 잡히면 금방 끝낼 수 있으니 잠시만 견디면 된다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6~7세 아동이 매일 밤 몇 시간씩 숙제할 때 어떤 느낌일까요? 어른으로 치면 매일 밤 야근을 해야 하는 상태가 지속되는 상황이라면 이해가 될까요? 월급도 받지 않고 매일 야근을 해야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아동기는 습관이 아니라, 뇌가 만들어지는 시기입니다. 사람의 뇌는 누가 개입해서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동기에 놀이학습의 효과가 좋은 이유도 뇌가 형성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뇌는 즐거운 일에 반응하니까요. 그러니 습관을 잡기 위해 억지로 공부시키기보다, 아이가 정서적으로 즐기며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줘야 합니다.
* 그리고 아이가 가만히 앉아 있는 것 자체를 힘들어할 수도 있는데, 이것이 걱정이 된다면 자신을 조절하는 훈련을 먼저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제 유튜브에 소개한 적이 있는데 초등학교 1학년 입학 전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혹은 '얼음 땡' 놀이 처럼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는 놀이를 해주는 것이 자기조절능력을 키워줍니다. 또 자신의 욕구를 참고 기다리는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 아이가 어떤 요구를 할 때 "잠시만 기다려 줘"라는 말로 '욕구지연 훈련'을 해주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 자신을 견디며 공부하는 습관은 앞 장에서 밝혔듯, 4학년 이후 고학년 때부터 해주어도 늦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1, 2학년 저학년 시기는 학습에 대한 흥미를 높여주어 기본기를 쌓아주는 것이 좋습니다. 또 통상적으로 습관을 만드는데는 8주 정도가 걸린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8주간 꾸준히 지속했는데도 습관이 잡히지 않는다면 습관이 될 준비가 안 된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학교 숙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이 시기에도 해야 할 것은 해야 하죠. 꼭 필요한 공부는 당연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학교 숙제 때문에 학습스트레스 증세를 보이거나 소아우울증이 걸리는 경우는 없습니다. 아이들도 본능적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하면 받아들입니다. 학교라는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해야 하는 숙제는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힘들어하긴 해도 극단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즉 아이를 설득하지 못하는 숙제들이 늘 문제를 일으킨답니다. 그래서 공부의 수준과 양을 점검해보고, 아이가 받아들이고 있는지 확인해보시길 조언드립니다.
아동기 뇌 발달에 관해서 데이비드 F. 비요크런드는 인상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특정 감각기관의 발달이 과도할 경우, 이후 다른 발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시각 자극이 과도하면 나중에 발달하는 청각 기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균형을 이룬 안정적 발달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 저는 이 말에 대해서는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들마다 개인차가 크고, 어떤 감각기관의 발달이 과도했는지, 또 아이의 타고난 지능과 감각 등 다양한 변수들이 있기 때문에 모든 아이에게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다만 학습 스트레스 증상과 관련지어 비요크런드의 의견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이가 받아들이기 힘든 수준의 조기교육을 일종의 과도한 자극이라고 한다면, 이는 발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죠. 실제로 뇌가 성장하는 아동기에 스트레스 호르몬이 반복적으로 분비되면, 관련 뇌신경을 끊어 버린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 물론 저는 학습 스트레스가 관련 뇌신경을 끊어 버리는 것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저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학습 스트레스를 일종의 성장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장통이니 그저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그 증상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겪었던 것이라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리고 저라면 제 아이에게, 특히 아동기라면 그런 고통을 감수하라고 절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스트레스에 따른 증상들이 분명히 있고 이것이 아동기 발달에 부정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아동기에는 스스로 스트레스를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회피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고, 두통이나 가슴통증, 소화장애 등의 증상이 일반적이며, 심한 경우 틱으로 발전하는데, 사사로운 틱 증상에서 심각한 증상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학습 스트레스 상태에 있는 아이들이 의자에 앉아 있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일종의 회피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아이의 뇌에서 도망가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죠. 수학 문제집 풀기를 과도하게 시켜서 스트레스 호르몬이 반복적으로 분비되면 수학 학습 도중 스트레스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너무나 많습니다. 실제로 아이가 처음에는 잘하다가, 꾸준히 시켰는데 오히려 더 못 하는 것 같다고 호소하는 어머니들이 제법 많습니다.
*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학습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는 즐거운 놀이 학습을 학습에 대한 흥미를 올려주고, 아이의 성향과 지능을 고려해서 학습설계를 해주어야 합니다. 사실 이 부분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부모가 자기 아이를 가장 잘 알 것 같지만, 그렇지 않더라고요. 아이를 바라본는 시선에 사사로운 감정이 섞이게 되고, 편견과 기대감 등으로 내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파악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 별표 부분은 제 책의 글을 다시 읽으며 추가한 부분입니다.
윤 경 미
(현) 성북동 좋은선생님 원장
(현) 좋은 연구실 대표
(전) 대치동 KYLA Smart Education 원장
(전) 성북동 성당 주일학교 교사
저서 및 저작 활동
<뮤지컬 앤 더 시티> 저자
<일기는 사소한 숙제가 아니다> 저자
<초등 1, 2학년 처음공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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