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슐러 K. 르귄. 『혁명 전날』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진정한 여행은 돌아오는 것.

by 묘묘

'감옥에서 보내는 편지'. 사람들은 그걸 이제 이렇게 불렀고, 서로 다른 판본이 열두 가지는 있었다. 사람들이 라이아에게 영적 활력이 넘친다고 말하던 그 편지들....... 그건 아마도 라이아가 그 편지들을 쓸 당시 얼굴에 우울을 가득 담고 자신을 계속 격려하려 애쓰며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라이아가 이제까지 한 중에 가장 탄탄한 지적 작업임이 분명한 <유추>. 이 모든 게 아시에오가 죽은 뒤 드리오의 '주둔지'에 있는 그 감옥에서 쓴 것이었다. 뭐든지 할 일이 필요했고, '주둔지'에 서 종이와 펜은 허락됐다....... 그러나 모두 급하게, 휘갈겨 썼기 때문에 라이아는 자신이 쓴 글씨체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45년 전에 썼던 <정부 없는 사회>의 필사본에서 본 자신의 둥글고 까만 소용돌이 모양의 글씨체와는 달랐다. 타비리는 라이아의 육체와 욕망뿐 아니라 라이아의 아름답고 깨끗하던 글씨체마저도 함께 생석회 속으로 가져가 버렸다.

그러나 타비리는 라이아에게 혁명을 남겨 주었다.

운동에서 그러한 패배를 겪고, 당신 반려자가 죽었는데도, 감옥에서 그렇게 계속해서 버티고 활동하고 쓸 수 있었다니 당신은 어쩌면 그리도 용감하게 살 수 있었습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멍청이들. 거기서 달리 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대담함, 용기. 무엇이 용기였단 말인가?'

라이아는 용기가 무엇인지 이해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두려워하지 않는 것,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두려워하지만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 또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 말고 사람이 또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제까지 인간이라는 존재가 진정한 선택권이라는 것을 가져 본 적이 있었는가?

죽는다는 것은 단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지나지 않았다.


(중략)


"난 누구지?"

라이아는 보이지 않는 청중들에게 중얼거렸고, 그들은 그 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입을 모아 대답했다. 라이아는 딱지 앉은 무릎을 한 소녀. 늦여름의 열기 속에 현관 계단에 앉아 리버 거리의 먼지 낀 금빛 아지랑이를 응시하고 있는, 여섯 살 난, 열여섯 살 난, 거칠고, 비뚤어진, 꿈 많은 소녀. 아직 더럽혀지지 않았고 더럽혀질 수 없었던 소녀였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었다. 시실 라이아는 지칠 줄 모르는 일꾼이자 사상가였으나 혈관의 핏덩어리 하나가 그 여인을 라이아에게서 빼앗아 갔다. 사실 라이아는 연인, 인생의 한가운데를 헤엄치는 사람이었으나 타비리는 죽으면서 그때의 라이아를 자신과 함께 데려가 버렸다. 아무것도. 정말로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오직 처음 그대로의 라이아 어린 시절의 가공되지 않은 라이아만 남았다. 라이아는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라이아는 집을 떠난 적이 없었다. '진정한 여행은 돌아오는 것'. 빈민가의 먼지와 진흙과 현관 계단. 그리고 저 멀리, 거리의 저쪽 먼 끝에 밤이 오면서 들판 가득한 키 큰 마른 잡초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 Ursula Kroeber Le Guin, The Day Before the Revolution



간만에 다시 읽은 르귄의 단편집 바람의 열두 방향』.

르귄의 소설 중 가장 좋아하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다시 읽고 싶어서였는데, 다시 읽은 지금은 혁명 전날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 현실과 타협할 수 없기에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면, 혁명 전날은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올곧게 살아간 누군가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다. 르귄이 40대 중반에 1년 간격으로 발표한 두 소설을 나는 20여 년에 걸쳐 서서히 곱씹어 이해한 셈이다.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 보여도 날것의 자신으로 돌아갈 뿐이다. 그도, 나도, 우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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