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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명구 Jun 20. 2022

아시럽에서 발로 쓰는 명상록 128

(삼족오 천 년의 꿈)

          (삼족오 천 년의 꿈)     

 찬란했던 조상들의 문화유산과 그것들을 지키고 이어가려던 순국선열들의 넋이 새 세상을 꿈꾸는 자를 유혹한다. 조국의 모든 재산을 다 버리고 사랑하는 친지들과 이별하고 이 땅으로 와서 어떤 추위와 어떤 배고픔 속에서 야밤에 행군하며 돌베개를 베고 자며, 어떻게 피곤을 쫓고 희미해져 가는 의지를 불태웠는지 조금이라도 느끼고 싶었다. 언제나 시작은 멈춰선 자리에서이다. 그들의 독립의 의지가 멈춰선 자리에 서서 평화로운 혁명을 꿈꾼다.   

  

 여기서 옌벤 대학에 근무하는 노귀남 교수를 만나고 백두산 볕 좋은 자리를 잡아 13년 전 집을 짓고 단군할아버지를 모신다는 분을 만났다. 나는 그들을 통해 잊힌 독립선언 ‘무오독립선언’을 만났다. ‘무오독립선언’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도 그전에 무오독립선언을 만나지 못했다. 만났다고 해도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명동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듯 만나서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잘 알지 못하듯 학자들도 잘 알지 못한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대부분 1919년 2월 1일 발표됐다고 나온다. 1919년은 기미년이다. 노귀남 교수에 의하면 1918년이 맞고 당시 해외에 뿔뿔이 흩어져있던 39명의 서명인과 당시의 통신이나 교통 사정상 어느 한자리에 모이거나 연락할 수가 없어서 날짜가 정확하게 서명되지 않았다고 한다. 1918년 무오년에 이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면 올해가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1918년 11월로 추정되는 어느 날 만주 길림성에서는 무오독립선언이 발표되자 만주독립운동가와 암암리에 연락을 하던 유학생들이 영향을 받아서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이 발표된다. 독립운동가 39인이 서명한 대한독립선언서이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점령하면서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해외로 나가 독립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문장가로 이름 높던 조소앙 선생이 초안을 작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소앙은 1917년에도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을 호소하는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한 적이 있다. 이 무오독립선언은 조소앙, 박은식, 신채호, 김규식, 박용만, 박은식, 김좌진, 김교헌, 김규식, 이상용, 여준, 이동녕, 김동상, 류동열, 이승만, 이시영, 신채호, 안창호, 허혁 등 39명의 이름만 대면 알만한 쟁쟁한 인물들이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최초로 선언을 한 것이다.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이 특히 높이 사는 건 선언서의 내용이다. 3·1 독립선언이나 2·8 독립선언에 비해 민족의 ‘대동단결’을 주장하고, 훨씬 신랄하게 일제의 침략을 비판하고 더 선명하게 독립 의지를 표출했으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방안으로 무장투쟁 노선을 명확하게 제시했기 때문이다.


 내용의 일부는 이렇게 적혀있다. “궐기하라 독립군! 한번 죽음은 사람이 면할 수 없는 바인즉, 개, 돼지와도 같은 일생을 누가 원하는 바이리오, 살신성인하면 2000만 동포와 동체로 부활할 것이니 일신을 어찌 아낄 것이며 집안이 기울어도 나라를 회복하면 삼천리 옥토가 자기의 소유이니 일가를 희생하라.” 이 투쟁 정신이 훗날 청산리 전쟁이나 봉오동 전투 등 동북지역 무장독립투쟁의 빛나는 성과로 이어지는 그 출발점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이곳에서 많은 좋은 사람들을 만난다. 좋은 만남은 언제가 좋은 영향을 가져다준다. 단둥에서 만난 ‘무오독립선언’은 첫눈에 눈을 번쩍 뜨게 하는 매력을 가졌다. ‘무오독립선언서’는 우리 민족이 우리나라를 되찾으려면 민족이 대동단결해야 함을 강조하고 문장은 단호하다. 맨몸을 던져서라도 독립을 되찾자고 한다. 세계사적인 대 전환기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순국선열들의 얼을 되살리는 일부터이다.


 그리고 나는 고구려 사람들이 어떤 땅에서 논밭을 일구며 살면서 말을 타고 질주하며 넓은 세상으로 뻗어 나갔는지 느끼고 싶었다. 세계사적인 대전환의 시기에 고구려가 우리 한민족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 땅 위에 흐르는 그들의 혼과 얼을 보고 느끼며 호흡하고 싶었다. 장수왕릉과 무너진 광개토왕릉을 보면서 우리 조상들의 우주에 대한 사유가 얼마나 대단했나 직접 보고 싶었다.

 환인시에서 오녀산성으로 차를 몰았다. 중국인들이 이렇게 표기하지만 사실은 ‘홀승골성’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이렇게 등재되었고 이곳이 바로 고구려의 첫 도읍지이고 우리 민족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서니 쫓기는 주몽의 절박한 외침이 귀에 들리는 듯하다.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라! 오늘 도망하는 중에 날 쫓는 자들이 이르렀으니 어찌하랴! 이런 긴박한 상황에 강으로부터 물고기와 자라 떼가 떠올라 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이것은 신화가 아니라 장수왕이 부왕의 업적을 기록하고 건국자인 시조 주몽에 대해 기록한 광개토왕 비문에 적혀있는 내용이다.

 신화가 아닌 현실로 내 앞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가슴은 요동을 치는데 조상의 숨결을 만나는 기쁨과 경외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고구려의 웅장한 기상이 산세에서 그대로 전해진다. 이곳은 산하가 험준하여 방어하기 좋고 토양이 기름지다고 한다. 폐허의 궁성이 있던 산은 첫눈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이런 험한 산속에서 생산되는 작물이란 별로 없었을 것 같다.

 매표소 관리인이 관람객 없다는 이유로 산성에 입장을 시키질 않아서 결국 오르질 못했다. 반쪽의 조국은 다른 정권의 허가를 못 받아서 못 들어가고, 조상의 잃어버린 고토의 왕성은 중국인 관지자의 무책임으로 못 들어가니, 비통함이 못난 후손의 가슴을 쥐어뜯는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퉁화로 차를 돌렸다. 퉁화는 중국의 미사일 기지가 있는 곳이다.     


 다음 날 아침 퉁화에서 유하현의 추가가까지 54km 거리, 나는 20km 정도는 차를 타고 36km를 뛰어서 갔다. 이곳은 신흥 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 강습소가 있던 곳이다. 달리면서 그들이 이곳을 행군하며 훈련하던 모습을 상상했다. 귓가에 독립군가가 들리는 듯했다.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 동포들 건질 이 너와 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에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국내에서 모여드는 청년들에게 구국의 이념과 항일정신을 고취시켜 조국광복의 중견간부로 양성하던 곳이었다. 추가가로 가는 길목엔 온통 옥수수 밭뿐이었는데 추가가가 가까워지자 논이 기름져 보인다. 이곳 만주 지방에 논은 다 조선인이 개간한 것이다.


 1910년 조국이 국권을 뺏기자 신민회는 항일무장투쟁을 공식노선으로 채택하고 만주에 독립무장운동의 전초기지가 될 무관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1920년까지 2000명이 넘는 독립군 간부와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곳이지만 이곳엔 표지석 하나 안내판 하나 없다.


 부서진 기와 한 장, 벽돌 한 장이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곳에 서서 두 눈을 부릅뜨고 두리번거리고, 불굴의 항전을 이어가려고 흘린 땀 냄새 입자라도 맡아보려고 코를 벌름거려보았다.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기에 가슴으로 느끼려고 가슴을 최대한 활짝 펼쳐보았다.     

 다시 발걸음을 옮겨 퉁화에서 집안으로 가는 길은 대관령이나 미시령 고갯길 같은 험한 고갯길을 넘고 또 넘는다. 한 20여 일 쉬다 다시 뛰려니 몸이 난(亂)을 일으킨다. 몸은 그동안 무거워졌고 발가락에 심하게 통증이 온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몸이 심통을 부린다고 그 응석을 다 받아주질 않는다. 통증이란 놈도 눈치만 늘어서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한다. 나도 눈치껏 통증이 오면 살살 달리거나 걷는다. 그대로 달리기를 멈추질 않는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는 통증이 웬만큼 온다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 옛날 항일 전사들처럼.

 그 험한 산을 넘어와서 만나는 곳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새 둥지 같은 도시 집안이다. 중국식으로는 지안이고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 국내성이 있던 곳이다. 지세가 태양의 새 삼족오가 둥지를 틀고 살았을 그런 곳이다. 이곳은 높은 산이 찬바람을 막아주어서 같은 위도의 다른 도시보다 평균온도가 몇도 높다고 한다. 얼핏 보아도 천혜의 요새 같은 도시이다.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 졸본성보다는 많이 낮고 평평해졌지만 아직도 거칠고 험한 곳이었다. 고구려인들은 무엇이 두려워 이렇게 험한 요새 같은 곳에 터를 잡고 나라의 기반을 잡아갔을까? 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아침에 일어나 지도에 표시된 고구려 박물관을 찾아갔지만 옛 시청 자리로 옮겼다는 소리를 듣고 다시 찾아갔다. 건물은 현대식으로 잘 지어져 있었다.


 박물관의 고구려 유물들을 보고, 그곳에서 다시 광개토왕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저 멀리서 거대한 무덤이 무너진 채로 옛 위용을 보이는 것이 첫 느낌에도 바로 광개토대왕릉이다. 피라미드와 같은 기단식 적석총 위로 초겨울 햇살은 눈부시게 내리쬐건만 대왕의 능은 무너져 내려 거대한 돌무지와 다름이 아니었다.


 그 옛날 천하를 호령하던 대왕의 능은 후손들이 당나라에 나라를 빼앗긴 이후 천대를 받으면서 동네 집 주춧돌로 하나둘 도둑맞아 무너져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외세에 의지한 신라의 삼국통일은 안타깝기 짝이 없다. 그때부터 이 만주벌판의 대부분의 땅은 우리 땅이 아니었다.

 저 산 어딘가에 올라 요동을 바라보며 천하를 도모하던 소년 담덕의 웅대한 기개와 만나니 저절로 무릎이 꺾여져 자연스럽게 절을 하며 고구려의 역동적 기운으로 통일을 이루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그곳에서 조금 더 언덕으로 올라가면 장수왕릉이다. 언덕길을 박차고 오르는데 어디선가 송대관의 ‘나는 하행선 너는 상행선’하는 노래가 들려와 몽환병 환자처럼 노랫소리를 따라갔다. 소리는 밭에 세워둔 자전거에서 나왔는데 사람이 안 보여 두리번거리다 저 구석에서 일하는 사람을 발견했다.


 “안녕하세요?”하고 소리 지르자 일하던 사람이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반갑게 맞는다. “뭐 하세요?” 물으니 뎅아지 밭을 손보고 있다고 한다. 뎅아지란 고추의 조선족 말이라는데 북한식 말이겠거니 이해했다. 자기는 며칠 전에 한국의 청주에서 일하다 왔다고 한다. 만주 지역의 조선족 가정의 대부분의 사람은 한국으로 일하러 갔다는 것이 놀랍다.

 옛 국내성 부근인 이곳에는 고구려 최대의 무덤인 태왕릉(太王陵)과 사신총 등 석릉과 토분 1만 기(基)가 있으나 외형이 거의 완벽하게 남아있는 것은 이 장수왕릉뿐이다. 1600년 전 지어진 계단식 피라미드 형태의 거대함과 정밀한 설계기술, 석조기술 그리고 운반기술에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고 권력층의 의지와 백성들의 억척스러움에 고개가 숙어진다. 장군총 우측 위에는 고인돌 모양의 무덤이 있는데 약간 무너져 내렸지만 이것도 대단한 무덤이다. 장수왕 애첩의 묘라고 하기도 하고 최측근 부장묘라고 하기도 한다.


 환도산성은 국내성으로부터 2.5km 떨어진 해발 676m의 산에 서쪽은 칠성산의 험준한 산세가 천혜의 성벽이 되어주고 동쪽이 퉁구하 하천을 따라 형성된 비교적 넓은 산골짜기가 펼쳐졌다. 이곳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해가 지고 있어서 급하게 바로 앞의 환도산성 끝자락에 올라 내려다보는 퉁구하 하변에 산성 무덤 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보인다. 거대한 피라미드 돌무덤이 2만기나 보인다. 세계 어느 제국의 무덤 군(群)이 이보다 더 장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더란 말이냐?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하게 성 아래 수많은 거대한 피라미드 무덤이 죽은 자와 산 자의 영원히 순환하는 천지의 약동을 전해준다. 잠시 머리를 숙이고 죽은 자의 꿈을 산 자가 내림받는 의식을 거행한다. “예술은 보여주기 위해 보여지지 않는 곳에 숨어있다,”고 누군가 말했지만 이곳에 보이지 않게 충만히 흐르는 기의 무도(舞蹈)을 즐기려 최대한 심안(心眼)을 열어야 했다.     

 고구려 발해의 멸망 이후 천 년 만에 찾아온 역사적 대전환기에 우리의 운명을 다시 주변국들의 힘의 논리에 맡겨버리고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면 우리 후손들은 과연 우리를 용서할 것인가?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결정을 해야 한다. 지금의 어려움을 우리 온 겨레의 집단지성으로 극복하고 상생 평화의 시대를 활짝 열 때이다.


 우리는 조상들의 지혜와 불굴의 의지에 힘입어 물질이 지배하던 시대를 넘어 정신문화의 변환과 합일을 통해서 세계의 중심국가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자주적인 통일을 이루어낸다면 짧게는 을사늑약 이후 100년의 한이요, 길게는 천년을 한을 일시에 풀며 세계를 향해 태양에서 나온 세 발 달린 검은 새가 날개를 활짝 펴고 웅비해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지금 우리 땅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통일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외세에 의지하고 눈치만 보며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친다면 역사의 오욕을 어떻게 다 감당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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