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하 Oct 05. 2024

마지막처럼

 2024년 9월 25일 오전 11시 55분, 이틀 전 맞춰 둔 알람 소리에 자세를 다잡았다. 잠시 후 12시, 허둥대며 휴대폰 화면을 눌렀지만 대기 번호는 3만 번 대! 슬프다. 여기까지인 건가. 맥없이 화면을 바라보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훅훅 숫자가 줄어들더니 거짓말처럼 예매화면이 나타났다. 눈에 보이는 좌석을 허둥지둥 선택하고 결제 완료. 요즘 티켓팅은 피가 튈 정도로 치열해서 ‘피켓팅’이라고 한다던데 나에게도 이런 날이! 드디어 나도 콜드플레이 내한 공연에 갈 수 있게 되었다.    

  

 평소 나는 공연 예약에 열을 올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몇 년 전 임영웅 콘서트 티켓 예매에 성공해서 순식간에 효녀로 거듭났다던 친구의 사연을 들었을 때도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이번엔 간절했다. 무려 콜드플레이였다. 그러니까 나는 내년 봄, 보컬인 크리스 마틴의 목소리를 꼭 직접 들어야 했다. 굳이 서사를 따지자면 내년은 2025년이니까, 오래전 나를 위로한 그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을 기회일지도 모르니까.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때로 너무 얄궂고 비장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지막인 순간을 매번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게다가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사건은 무척 가볍게 느껴져서 마지막이라는 말을 쉽게 붙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무심코 지나쳤다가 후회할 때가 있다. 그러면 이후에 다가오는 이벤트를 대강 넘길 수 없게 되는데, 내게는 이런 후회의 순간이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십 년 전, 지금은 고인이 된 신해철의 콘서트였다. 한여름의 어느 날 홀로 출근한 빈 교무실에서 마음 졸이며 티켓을 예매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무척 오랜만의 공연이었다. 따라서 나에겐 가야 할 이유가 충분했지만, 가면 안 될 이유 또한 충분했다. 우선 티켓값이 상당했다. 당시 빠듯한 형편이었던 내가 공연 당일 단 몇 시간을 위해 10만 원이 넘는 소비를 해도 되는지 죄책감이 몰려왔다. 그래도 예매까지 마쳤지만, 이번엔 다섯 살 아이가 마음에 걸렸다. 출근할 때마다 나랑 떨어지기 힘들어하는 아이를 주말에 부모님에게 맡기면서까지 갈 일인가. 공연 이틀 전 시어머니의 병원 입원 소식까지 들은 나는 결국 예매를 취소했다. 누가 상상했겠는가. 그것이 그의 마지막 콘서트가 될 것이라고는.     


 두 번째는 작년 가을 엘지 트윈스의 한국시리즈 경기였다. ‘엘레발(엘지팬의 설레발-설명을 달기도 속상하다), DTD(내려갈 팀은 내려간다)’ 등의 온갖 조롱을 견뎌내고, 마침내 정규 시즌을 1위로 마감한 자랑스러운 나의 엘지가 29년 만에 우승할 순간을 관전할 기회였다. 그런데 그 세월 동안 숨죽인 채 방구석에서 울고 있던 팬들이 그렇게 많았을 줄이야. 티켓 오픈 시간마다 사력을 다했지만 단 한 장도 건지지 못하는 내 손가락이 미웠다. 나를 비웃듯 중고 사이트에서 엄청난 웃돈을 얹어 버젓이 판매되고 있는 티켓을 보며 피눈물을 흘렸다. 어쩌면 그때가 살아생전 보는 마지막 한국시리즈 경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한국 시리즈를 29년 후에야 본다면 내 나이가 얼마야... 끔찍하고 불온한 상상이었지만 그 순간은 그랬다.   

   

 콜드플레이가 내게 큰 의미로 다가온 것은 9년 전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한 아버지가 사무실에서 갑자기 쓰러져, 이틀 만에 우리 가족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무렵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아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내 마음은, 황망함과 슬픔의 단계를 거쳐 분노로 이어졌다. 누구에게라도 화를 내며 소리 지르고 싶었다. 아버지만 사라진 채 태연히 흘러가는 일상이 낯설어서, 입을 꾹 다문 채 마냥 누워만 있고 싶었지만 수업을 위해 밝은 목소리를 냈다. 꾸역꾸역 감정을 억누른 일과를 보내고 돌아오는 퇴근길이면 차 안에서 울음이 터졌다. 그날도 운전을 하며 울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곡의 제목은 ‘Fix you’,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사망으로 슬퍼하는 아내 기네스 펠트로를 위로하려고 보컬인 크리스 마틴이 쓴 곡이라고 했다. 음악이 위로가 되는 순간을 이전에도 경험했지만 그날보다 더 강렬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날 이후 그 곡은 나에게 큰 의미가 되었다.      


 내년이 지나고 그다음 해에도 콜드플레이가 또 한국을 찾아올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2025년에 반드시 그가 부르는 노래를 직접 듣고 싶어졌다. 크리스 마틴은 나를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가 불러 줄 노래가, 아버지의 10주기를 맞는 나를 위로해 줄 것임을 안다. 그래서 나는 내년 4월 그들의 공연을, 다시 오지 않을 마지막처럼 기다린다. 

작가의 이전글 떠나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